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1214150605126


고구려는 왜 평양으로 천도했을까

[고구려사 명장면 34] 

임기환 입력 2017.12.14. 15:06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계승했음에도 그는 여러 모로 아버지 광개토왕과 대비되는 군주였다. 장수왕(長壽王)이라는 왕호에서도 금방 알 수 있듯이 98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재위 기간만도 79년이다. 광개토왕이 불과 21년 재위하고 39세로 사망하였음을 생각하면, 장수왕이 아버지 몫까지 대신 살았다고나 할까.


대외정책에서 장수왕은 광개토왕과 달랐다. 광개토왕이 한반도는 물론 요동과 북방 등 동서남북 사방으로 정복 활동을 벌였다면, 장수왕은 고구려 세력권의 확장과 유지에 주력하였다. 광개토왕이 전 생애를 전쟁터에서 보낸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면, 장수왕은 당대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간 노련한 외교전략가였다. 사실상 장수왕의 최대 업적은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고구려 위상을 뚜렷이 자리 잡게 한 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장수왕은 413년에 즉위해 491년에 사망할 때까지 79년간이나 고구려를 통치했기에 5세기 고구려는 장수왕의 시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장수왕의 시대를 연 첫걸음이 재위 12년에 단행한 평양 천도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천도란 가장 강렬하고 극적인 정치적 사건이다. 수도를 옮기는 일에는 각 사회 계층의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근자에 우리도 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적 논란을 경험한 바 있으며, 그 결과 현재 세종시라는 행정수도 이전으로 일단락되었다. 당시 벌어진 사회적 논의가 헌법소원과 헌법재판소 판결 등으로 이어진 과정을 돌이켜보면 수도를 옮긴다는 것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 커다란 사건인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통 통신이 발달한 지금도 그럴진데, 고대국가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고대국가의 수도는 단순히 정치·행정의 중심지에 그치지 않는다. 수도는 지배귀족들 대부분이 사는 거주지다. 고대국가에서는 수도(왕경)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으로서, 왕경인과 지방민 사이에는 상당한 신분적 차별마저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군사방위 체계는 물론 교통과 통신, 조세 징수제 등 모든 정치·사회 시스템이 수도를 중심으로 편제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천도를 한다는 것은 단지 왕궁과 관청, 지배층의 거주지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수도를 중심으로 국가사회 시스템 전반을 다시 편제하고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일종의 국가 리모델링 사업이다.


그럼에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평양천도에 관해서 단 한 줄의 기사만 전할 뿐이다.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이 기사는 천도 그 자체 외에는 더 이상 말이 없지만 평양 천도를 둘러싸고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내력이 있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먼저 천도를 하려면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진다. 첫째, 천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둘째, 천도를 한다면 어디로 옮길 것인가?


장수왕은 왜 이 시점에서 천도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기록은 전혀 없다. 하지만 수도 국내성(현재 중국 지린성 지안시)이 갖는 입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압록강 중류 산악지대에 자리 잡은 국내성은 군사적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대외적으로 팽창해 나가기엔 교통의 개방성이나 경제적 기반에서 한계가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국가 발전 방향은 제국적 확장이었다. 이는 단순히 영토의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종족과 문화권을 아울러 고구려 국가 시스템에 통합하고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독자적 세력권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국내성은 이런 새로운 도약의 근거지로 적절할까? 아니라면 가장 적합한 새로운 근거지가 과연 어딜까? 당시 고구려인들이 주목한 곳은 평양이었다.


평양 대성산성 : 장수왕 평양 천도 무렵에 축조한 산성이다.


평양은 비옥하고 너른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 경제적 기반에서 국내성 일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이곳은 산간 지대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고구려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었을 게다. 더욱이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만큼, 고구려 지배층은 그런 위상에 걸맞은 왕도를 건설하고 영화를 누리고 싶어했을 것이다. 평양은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곳이다.


또 내륙 깊숙이 있는 국내성과는 달리 평양은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새로이 고구려 중요 기반으로 떠오른 한반도 서북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요동이나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진출할 때도 거점과 배후 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바닷길로 국제 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즉, 평양의 지리적 조건은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국가 운영을 뒷받침할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사실 광개토왕 시절 이뤄진 정복 활동의 화려한 성공은 군사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전연·백제·신라·왜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했던 국제적 감각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고구려는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정당한 위상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의 입지도 국제 무대에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 점에서도 평양은 적절한 후보지다.


평양이 적절한 후보지라고 하더라도 천도는 장수왕의 결심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평양 천도는 오랜 숙고와 정지 작업의 결과였다. 평양 천도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광개토왕으로 짐작된다. 그는 평양의 도시 건설을 추진하면서 사찰을 건립하고, 주민을 이주시켰으며, 수시로 평양을 순수했다. 그는 평양을 한반도 내 외교·군사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을 본다면 광개토왕대에 이미 평양 천도가 결정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평양 천도 대목에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당시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하필 천도지로 한반도 평양을 선택했을까? 요동 땅 어디쯤에 기세 좋게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대륙을 향한 진출력이 약화된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의문은 누구나 가져볼 만하다. 하지만 그 의문에는 만주땅과 대륙 진출에 대한 우리들의 막연한 환상이 깔려 있다. 국제 정세, 수도의 군사상 입지, 영역 지배의 중심지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하면 평양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는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북위, 남조, 유연과 더불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유지해가는 중심축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데는 수도로서 평양이 갖는 개방성과 국제성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또 고구려 '천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평양은 새로운 문화 변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평양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분벽화가 그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커다란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게 된다. 아니 단지 천도의 결과가 아닌, 그런 결과를 지향하고 천도를 결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양 천도는 도읍 옮기기가 아니라 나라 새로 만들기라는 '개혁'의 실천이었다.


태왕릉, 장군총 등 수많은 조상들의 무덤이 있고, 400년 동안 대대로 가꾸어와 살기에 익숙해진 국내성을 떠나 낯선 평양땅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은 아마 장수왕 자신도 싫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손들에게 보다 풍요로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현재의 어려움을 감내하는 결심과 결단이 당대인의 몫으로 주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장수왕 때 고구려인들은 그리 부끄러움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러고 있을까? 우리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좋은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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