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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오부(高句麗五部)

1995년 노명호


고구려시대 5개의 정치세력집단체.


고구려 초기 연맹체 형성에 중심이 된 다섯 집단으로서, 국가 체제가 성립된 뒤 독자성을 상실하고 수도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연맹체시대에 고구려 5부(五部)의 명칭은, 중국 역사서 등에는 소노부(消奴部)주 01)·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로 표기되어 있고,『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비류부(沸流部)·제나부(提那部)·환나부(桓那部)·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내용


고구려 5부 명칭 속의 ‘노(奴)’ 또는 ‘나(那)’는 고구려 고유어의 같은 음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내〔川〕, 냇가의 평야, 또는 그러한 어떤 지역의 집단을 의미한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위의 다섯 집단 외에도 ‘조나(藻那)’·‘주나(朱那)’ 등 ‘-나(那)’로 지칭되는 집단들이 나타난다.


즉, 고구려 초기에는 이들 다섯 집단 이외에 ‘-나’로 지칭되는 여러 집단이 존재했는데, 이들 집단 간에 점차적으로 통합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고구려조(魏書 東夷傳 高句麗條)에는 “본래 다섯 족이 있었다(本有五族)”라고 해, 고구려 사회가 5부로 구성된 것은 초기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다섯 집단에 의한 소연맹체는 가장 강한 세력 기반을 가진 집단이 전체 연맹체의 영도세력이 되었는데, 초기에는 소노부가 연맹 왕권을 차지했다가 이후 새롭게 성장한 계루부가 연맹체의 장이 되었다.『삼국지』기록에 연나부(椽那部)에서 계루부로의 왕권 교체 기사가 이것이다.


그러나『삼국사기』에는 ‘-나’들의 통합이 태조왕(太祖王) 대까지도 진행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태조왕 20년(서기 72)과 22년의 관나부에 의한 주나의 통합이 바로 그 예이다.


고구려의 여러 ‘-나’들의 통합이 일단락되어 5개의 집단으로 정리된 것은 태조왕 대 무렵이다. 고구려 사회의 이러한 정치적 통합은 보다 강력한 지배 세력을 대두시켜, 계루부 왕족을 중심으로 5개의 집단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었다.


그 조직이 5부 체제(五部體制)에 의한 고구려 연맹체이다. 다섯 집단은 연맹체의 구성단위로서 ‘부(部)’로 편제되었고, 각 부는 일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자치권을 가졌다. 그러나 무역·외교·전쟁 등 연맹체 전체와 관련된 문제는 계루부 출신이 왕으로 대표되는 연맹체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부는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공간에 위치했으며, ‘부내부(部內部)’로 표현되는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본다. 이때의 5부 명칭은 다섯 집단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중심 세력이 된 ‘-나’의 명칭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초기의 부체제에 의한 연맹체 단계의 사회 기반이 ‘-나’ 단계의 사회기반과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한편 5부에는 각기 부장이 있어 휘하의 대소 족장을 통솔하였다. 이러한 통솔 관계가 조직화되어 ‘부’ 나름의 관원 조직이 존재하기도 하였다.『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왕과 마찬가지로 여러 족장들도 사자(使者)·조의(皂衣)·선인(先人)을 두었다 했고,『삼국사기』에서도 각 부 나름대로 그 같은 관명(官名)들과 패자(沛者)·우태(于台) 등이 보인다.


『삼국지』에 의하면 산상왕(山上王) 즉위 당시 발기(拔奇)와 소노가(消奴加)가 각각 3만여 인을 거느리고 공손강과 제휴하여 산상왕에 대항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시 부의 인구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데 소노부 외의 나머지 4부도 역시 비슷한 인구 규모였을 것이다. 이것은 같은 기록에 전하는 고구려 주민 수 3만호 즉, 15만여 인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만, 5부 내에서도 차이가 있었음을 감안할 때 계루부나 소노부의 규모는 평균 규모보다는 컸을 것이다.


변천


연맹체 조직이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자치권을 가지는 부의 존재도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왕권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은 각 부족의 내부 문제까지 간섭하게 되었고, 대소의 족장들도 독자적인 집단의 장으로서 존재하던 상태에서 국가 조직 안에서 지위와 역할을 갖게 되는 대소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3세기 말경에는 부의 자치권이 소멸되고, 부는 왕경(王京)의 행정 구역화되어 초기의 고유 명칭에서 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중부(中部) 등 방위에 따른 명칭으로 바뀌었다. 방위부로 개칭한 뒤의 귀족들은 부의 귀족과는 달리 중앙귀족화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한원(翰苑)

후한서(後漢書)

「나부 체제의 성립과 변천」 (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2004)

「1∼4세기 고구려 정치체제(政治體制) 연구」 ( 여호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1997)

「고구려·신라(高句麗·新羅)의 관계조직(官階組織)의 성립과정(成立過程)」 ( 김철준 ,『한국고대사회연구(韓國古代社會硏究)』,지식산업사(知識産業社),1975)

「삼국시대(三國時代) ‘부(部)’에 관한 연구(硏究)」 ( 노태돈 ,『한국사론(韓國史論)』2,서울대학교 국사학과,1975)

「高句麗五族五部考」 ( 今西龍 ,『朝鮮古史の硏究』,1937)



주석

주01 고구려조에는 涓奴部(연노부)로 나옴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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