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914153403080


고구려, 정말 북경 진출했나 덕흥리 고분은 말하고 있다

[고구려사 명장면 28] 

임기환 입력 2017.09.14. 15:34 


고구려는 북경까지 진출했는가?

"베이징은 고구려 땅이었다."


덕흥리고분을 소개하는 언론들이 단 기사 제목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대체로 북한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북한학계에서는 발굴 때부터 덕흥리고분의 주인공인 진(鎭)이 고구려 신도현 출신으로 '유주자사'를 지냈으니, 고구려가 4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하북과 산서지역을 포함한 유주 일대를 지배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그리고 1981년 덕흥리고분 발굴보고서를 호화롭게 출판하였는데, 여기서 북한학계의 공식 입장을 펼쳐놓았다. 요지인 즉 370년 전연(前燕)의 멸망으로 북중국 일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고구려가 유주를 점령하였고, 그 결과 13군 75현을 거느린 고구려의 유주가 만들어져 376년까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과연 고구려는 유주, 즉 지금의 베이징까지 진출한 것일까?


북한학계의 핵심 논거는 이렇다. 진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점 이외에, 덕흥리고분의 구조, 벽화 내용 등이 인접지역의 한족 및 선비족의 것과는 차이가 있는 반면에 여러 고구려 벽화고분과 계통상 연관된다는 점, 덕흥리 고분에 보이는 유주의 군단위 구성과 총수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의 유주와도 다르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같은 논거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한다. 즉 덕흥리고분은 고구려 벽화고분 중 이른 시기의 것으로 요동지역 벽화분과 연결되면서 동시에 고구려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주장. 유주의 군단위 구성과 총수가 중국 역대 왕조의 유주와도 다른 것은 실재했던 유주가 아니라 관념적으로 구성한 유주로서, 이는 진이 스스로 칭한 관직에 불과하다는 견해 등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진이 고구려 출신이 아닌 어느 중국 왕조로부터의 망명객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진은 출신이 고구려인인가, 아니면 중국 왕조의 망명객인가? 진이 역임한 유주자사는 고구려의 유주자사인가, 아니면 망명 이전에 역임한 중국 왕조의 유주자사인가? 또 유주자사는 실직인가, 아니면 자칭한 허직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 위해 묘지명에 기록된 진이 역임한 관직을 다시 살펴보자.


"건위장군(建威將軍) 국소대형(國小大兄)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饟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使)"


위 관직은 2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건위장군(建威將軍)에서 용양장군(龍饟將軍)까지는 주인공이 획득한 위계적 성격의 관이고, 요동태수부터 유주자사까지는 진이 역임한 관직이다. 4세기에 중국에서 통용되던 진(晉)나라의 관위체계를 기준으로 보면, 건위장군은 4품, 좌장군과 용양장군은 3품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장군직은 군사권을 갖고 있는 지방관의 위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관위로서 기능하였다. 따라서 앞부분은 건위장군에서 용양장군까지 진이 차례로 역임한 장군직이 점차 승급해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장군직 사이에 국소대형(國小大兄)이란 고구려 관직이 주목된다. 국소대형은 덕흥리고분에서 처음 보이는 관직인데 '國'은 고구려국이란 뜻으로 다른 관직과 그 성격을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듯하다. '小大兄'은 대형(大兄)에서 대-소로 나뉘어 파생된 고구려의 관등명이다. 아마도 대형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구려 관직인 '국소대형' 앞에 기록된 건위장군은 진이 고구려로 망명하기 이전에 역임한 관직이며, '국소대형' 이후의 좌장군, 용양장군은 망명 이후에 역임한 장군직이 된다.


다음 요동태수는 요동군을 관장하는 지방관직이며, 사지절(使持節)은 주(州)의 장관이나 장군에게 주는 칭호이다. 동이교위는 조위(曹魏) 때에 처음 설치된 중국 동방의 이민족 관련 업무를 담당한 관직이다. 유주자사는 유주를 관장하는 고위 지방관이다. 이런 지방관의 구성 역시 요동태수에서 유주자로로 승급한 이력을 보여준다.


덕흥리고분 13군 태수 내조도:13군 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하례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주자사를 허구의 관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앞서 국소대형을 기준으로 망명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보았듯이,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도 망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진은 고구려로 망명하기 전에 건위장군 요동태수를 역임하였고, 고구려 망명 이후에 국소대형을 받고 이어 좌장군, 용양장군에 유주자사를 역임한 것으로 추정함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즉 이번 글의 주요 논점인 유주자사는 진이 고구려로 망명하기 이전의 관직이 아니라, 망명한 이후에 역임한 관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주자사는 고구려의 관직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진이 고구려로 망명한 이후에 중국의 어느 왕조로부터 유주자사라는 관직에 책봉되었을 수도 있지만, 고구려 왕 아래의 신하가 다른 왕조로부터 관직을 받는다는 것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유주자사는 역시 진이 고구려로 망명한 뒤에 역임한 관직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러면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하고 진을 유주자사에 임명한 것일까? 북한학계는 문헌기록에서 중국왕조의 유주 영유 공백기를 찾아 370~376년에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한 것으로 주장했지만 문헌 기록의 앞뒤 정황으로 보아 그리 설득력이 없다. 그러기에 유주자사를 진이 자칭한 관직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는 진이 역임한 유주자사 아래 13군의 구성이 역대 중국 왕조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 유력한 논거가 되었다.


하지만 유주자사를 진이 자칭한 허구의 관직으로 보기에는 벽화 속의 13군태수 하례도(賀禮圖)가 전하는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다. 특히 맨 앞의 연군태수(燕郡太守)에는 분위장군(奮威將軍)이란 직명을 기록하고 있어 어떤 실제 인물을 가르키는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또 남벽 벽화의 '계현령착헌노(薊縣令捉軒弩)'라는 묵서명에서 계현령(薊縣令)의 존재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 '유주자사 진(鎭) - 분위장군 연군태수 - 계현령'의 직할 지방관 계통을 갖추고 있는 상황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즉 진이 역임한 유주자사가 단순히 허구의 관직이 아니라 어떤 현실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실제 관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나머지 여타의 군태수도 단순히 고분 내 벽화상으로 상상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겠다.


고구려가 유주를 차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구의 관직도 아니라면, 진이 역임한 유주자사 관직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한 가지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상정해보고자 한다. 이른바 5호16국 시대라고 불리는 북중국을 포함하여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다수 왕조와 국가, 종족들의 흥망성쇠가 거듭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의 이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러 왕조들은 이들 이주민을 편제하면서 관념의 영역과 실제의 영역 사이에서 양자를 조합하는 방식인 '교군(僑郡)'들을 빈번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교군이란 이주민들의 본래 소속 군현명을 따라 그 군현을 새로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4세기 이래 고구려에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이주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덕흥리고분이 위치한 평양 일대는 낙랑군 시절부터 중국계 이주민이 일찍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이들 이주민이 한반도 서북부에 정착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이들을 이주집단별로 거주케 하면서 통제해 갔을 것이다. 그런 통제책의 하나로 여러 중국 왕조에서 사용하던 교치(僑治)를 적용해 다수의 군현, 즉 교군을 설치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 결과 역대 중국왕조에 없던 독특한 13군 75현의 유주가 만들어지고, 이에 대한 관할의 책임을 유주자사 진에게 부여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고구려도 당시 동아시아 변동의 변두리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추론도 어디까지나 가능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사실 1600년의 시간을 넘어 과거와 만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가 '사실'과 직면하기 위해서는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되물어보아야 한다. 여기에 역사 공부의 출발점이 있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자칫 '역사'라는 허울을 쓰고 허구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십상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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