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13_0010
고구려의 천하관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中略)…… 至十七世孫國𦊆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廣開土王碑文」
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 元出北夫餘. 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亻□□.
「牟頭婁墓誌銘」
五月中, 高麗大王相王公□新羅寐錦, 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東來之.
「中原高句麗碑文」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우셨다. (추모왕께서는)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셨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시니,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으셨다. ……(중략)…… (고구려의 왕위가) 17세손(世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는데, (태왕께서는)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하였다. (태왕의) 은택(恩澤)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달하였다.
「광개토왕 비문」
하백의 손자이고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는 원래 북부여에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이 나라가 가장 성스러운 …을 알았다.
「모두루묘지명」
5월 중에 고려대왕(高麗大王) 상왕공(相王公)과 신라의 매금(寐錦)이 대대로 원하기를 형제처럼 상하가 화목하게 천도(天道)를 지키기를 원하였으니, 동쪽으로 왔다.
「중원고구려비문」
이 사료는 모두 5세기 고구려의 금석문으로, 당대 고구려인의 천하관(天下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먼저 「광개토왕 비문」은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건국과 출생 사실을 전하고,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의 즉위와 업적을 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비문에서는 추모왕이 천제(天帝)와 하백(河伯)의 혈통을 이어 고구려를 세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러한 추모왕의 혈통을 이어받아 황천(皇天)과 사해(四海)까지 광개토왕의 은택과 무위가 미쳤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사해가 주목되는데, 사해란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를 의미한다. 고구려의 왕은 천손(天孫)으로 세계의 지배자였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서 「광개토왕 비문」에는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손 의식과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은 비단 왕실뿐 아니라 여러 귀족 가문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모두루묘지명」 역시 왕실의 신성함을 찬양하고, 또한 고구려 왕의 권위가 세계에 미치고 있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구려인의 천하관은 관념적으로만 아니라 현실의 국제 정치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고구려의 여러 주변 국가를 속민(屬民)으로 보고, 마땅히 조공(朝貢)을 바쳐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 보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구려 대왕과 신라의 매금(寐錦)이 형제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로써 천도(天道)를 지켜 나갈 것을 기원한다고 하였다. 고구려 왕이 중심이 되고, 신라의 매금이 그를 따라 여기에 신속(臣屬)해 천(天)의 질서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천하관과 국제 관계 인식은 중국의 천하 관념 및 세계 인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구려 천하관의 바탕에는 전통적인 건국 신화가 있었고, 이를 당대 확립된 왕권과 고구려 중심의 국제 질서가 현실화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4∼5세기 고구려 왕자의 천하관에 대하여」,『호서사학』11,양기석,호서사학회,1983.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만들어진 고대』, 이성시 저⋅박경희 역, 삼인, 2001.
『고구려의 역사』, 이종욱, 김영사, 2005.
『고구려 정치사 연구』, 임기환, 한나래, 2004.
관련 이미지
모두루묘지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view.do?levelId=ti_005_0100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gskr_001_0010_001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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