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13_0030
5세기 전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 乙卯年,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壺杅, 十.
「廣開土王壺杅」
#, 을묘년(乙卯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호우(壺杅) 십(十).
「광개토왕호우」
이 사료는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 대를 전후한 시기 고구려와 신라와의 대외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른바 ‘광개토왕 호우(廣開土王壺杅)’라고 불리는 청동 그릇은 1946년 경북 경주시 노서동 140호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노서동 140호분의 발굴은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실시한 첫 발굴 조사란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큰데, 발굴과정에서 ‘#, 을묘년(乙卯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호우(壺杅) 십(十)’이란 명문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출토됨에 따라 이후 이 고분은 호우총(壺玗塚)으로 불리게 되었다. ‘을묘년’이라는 간지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란 광개토왕의 시호가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그릇은 415년(장수왕 3년)에 고구려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은 그릇 바깥쪽 바닥에 새겨져 있으며, 서체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와 비슷하다.
그릇 바닥에 세로로 4자씩 모두 4열의 양각으로 된 명문 상단에는 ‘#’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벽사(辟邪) 내지 주술적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명문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십(十)’이란 글자는 여백을 메우기 위해 넣은 것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단순한 길상구(吉祥句)로 보기도 하며 10이란 숫자로 이해하고서 이러한 그릇을 10개 만들었음을 뜻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이러한 ‘#’ 문양이나 ‘십(十)’에 대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현재로서는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가 어렵다.
이 그릇에서 주목할 점은 무엇보다 고구려에서 제작한 그릇이 왜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4세기 후반부터 적어도 5세기 중⋅후반까지는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특히 신라가 왜(倭)의 침입을 받고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자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 왜를 몰아 낸 것을 계기로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신라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심지어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관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우총에서 광개토왕 호우가 출토된 배경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 지어 검토되어야 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광개토왕을 장사 지낸 1년 뒤에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호우를 만들었는데, 그 의식에 조공국의 사절로 신라 사신이 참석하면서 호우가 그들에게 주어져 경주까지 오게 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호우(壺杅)의 ‘호(壺)’는 병 또는 단지를 의미하고 ‘우(杅)’의 경우 잔 또는 물그릇을 의미하므로, 호우는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를 담는 일종의 의례 용기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고구려에서 제작된 의례 용기가 어떤 경로를 거쳐 경주로 유입되었고, 나아가 신라 고분에 부장되었는지는 앞으로 조금 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 호우에 남겨진 명문은 글자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세기 전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사료적 가치는 높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 명문과 호우총의 연대에 대하여」,『과기고고연구』13,김창호,아주대학교 박물관,2007.
『호우총과 은령총』(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제1책), 김재원, 을유문화사, 1948.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장창은, 신서원, 2008.
『금석문자료』1(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편, 국립중앙박물관, 2010.
『호우총 은령총 발굴 6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국립중앙박물관 편, 국립중앙박물관, 2006.
「광개토왕호우명문」, 노태돈,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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