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308171502709
고구려 장수왕, 신라 눌지마립간 만나러 왜 충주에 왔을까
[고구려사 명장면 40]
임기환 입력 2018.03.08. 17:15
엊그제 남북 정상회담이 곧 열리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은 바람에 찬 기운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의 염원을 담은 훈풍이 봄바람보다 먼저 불어온 것이다. 절로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들으며 지난 회부터 다루고 있는 중원고구려비의 역사적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 볼 때 한반도에서 최초의 정상회담이 기록된 비문이 바로 중원고구려비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원고구려비는 아직 판독되지 않은 글자가 많아 비문 내용을 이해함에서도 백가쟁명식으로 많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판독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앞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5월에 고려대왕(高麗大王) 조왕(祖王) 영(令)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위아래가 서로 화해하여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五月中 高麗大王 祖王令□ 新羅寐錦 世世爲願如兄如弟 上下相和守天 東來之)."
이 문장에 등장하는 고려 대왕은 과연 누구일까? 광개토왕설, 장수왕설, 문자왕설이 제기되어 논란이 분분하다. 그리고 '조왕(祖王)'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글자 그대로 '할아버지 왕'으로 해석하여 고려 태왕의 할아버지 왕에 해당한다는 견해도 있고, 조왕은 태왕 아래의 왕에 해당되는 지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또 조왕(祖王)은 '상왕(相王)'으로 판독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 한편 신라 매금을 만나러 동쪽으로 온 인물이 고려 태왕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지만, 태왕이 직접 온 것은 아니라는 일부 주장도 있다.
중원고구려비 탁본 (2000년 고구려연구회 탁본)
어쨌든 현재로서는 비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과 함께 형제국으로서 우의를 다지기 위해서 현재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져 있는 충주 지역까지 온 것은 거의 틀림없다고 보인다. 이러한 행위를 전통적으로 '회맹(會盟)'이라고 부르는데, 요새식으로 얘기하면 곧 정상회담이다. 그런데 이 고려 태왕이 누구냐가 논란거리인데 필자는 이 회맹이 있었던 시기를 449년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추정이 옳다면 이때 회맹에 참여한 고려 태왕은 장수왕이고, 신라 매금은 눌지마립간이다.
그런데 고구려왕과 신라왕이 만난 사례만을 든다면, 이보다 앞서 광개토왕 때에도 있었던 듯하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400년에 고구려가 5만 대군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던 왜를 물리치고 신라를 구원한 뒤에 신라 매금이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을 바쳤다는 뉘앙스의 기사가 있다. 물론 글자 판독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있다.
그런데 당시 신라 매금, 즉 내물왕이 고구려를 방문해서 광개토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만남의 성격을 회맹, 즉 양국의 정상회담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 아래 있었고 왕자나 왕제(王弟)를 인질로 고구려에 보내는 실정이었다. 또 고구려 왕이 신라 왕을 매금(寐錦)으로 칭호하면서 결코 자신과 동격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신라를 구원한 직후였기 때문에 양국은 그 세력이 상당히 기울어져 있어 아무래도 동격의 국왕이 만나는 정상회담 자리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그렇다면 중원고구려비에 보이는 장수왕과 눌지왕의 만남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이루어진 첫 정상회담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위에 제시한 문장에서 보듯이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고려 태왕과 신라 매금이 형제처럼 지내기"를 바라는 뜻으로 만났다고 하니, 이때야말로 양국의 왕이 마주하는 정상회담의 성격을 비로소 갖추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비문의 기술에 의하면 눌지왕을 여전히 매금으로 부르고 있고 고려 태왕, 즉 장수왕이 신라 눌지왕과 그의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행위도 일종의 책봉과 같은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회맹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고구려 입장을 투영한 비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고, 또 아래에서 살펴보듯이 회맹 이후 신라의 움직임을 보면 이때 회맹이 고구려의 우위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양국 국왕이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는 매우 긴장감 높은 자리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최초의 정상회담이라고 부를 만하다.
비문을 통해 필자가 파악한 당시 회맹의 모습은 이렇다. 먼저 우측면에는 5월의 회맹을 준비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5월 어느 날 고려 대왕(장수왕)이 신라 매금(눌지왕)과의 회맹을 위해 동쪽으로 왔으며, 신라 매금과 고려 태자 공(共)이 태왕을 맞아 영접하였다. 태왕은 신라 매금 및 그의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동시에 고구려의 신료들에게도 의복을 하사하였다. 6개월 뒤인 12월 23일에는 5월의 회맹에 참여하였던 고구려 측 관료와 신라 측 관료가 모여서 그 회맹에서 이루어진 협약에 따라 모종의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고구려군에 의한 모종의 군사활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비문은 종결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시점은 회맹이 있었던 449년 이듬해 무렵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고구려에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던 신라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던 시기였다. 고구려에 인질로 간 왕제 복호(卜好)를 몰래 귀환시킨 것은 그러한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433년과 434년에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자 신라 역시 사신을 보내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런 신라의 움직임을 보면서 고구려로서는 자신의 세력권에 있던 신라의 이탈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원고구려비문에 담긴 449년 5월에 이루어진 고구려왕과 신라왕의 회맹은 신라의 이탈을 막아보려는 고구려의 적극적인 외교 전략에서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때 회맹이 신라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는 못했던 듯하다. 이듬해인 450년에 고구려 변방의 장수가 신라 하슬라 성주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장수왕이 분노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 "내가 대왕과 우호를 닦은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이니 이는 어찌 의리 있는 일이겠는가"라고 질책하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다가 신라 왕의 사죄를 받고 군대를 돌이켰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장수왕의 말 중에 "우호를 닦았다"는 내용이 바로 449년의 회맹이 아닐까 짐작한다. 또 비문에 보이는 고추가 공(共)의 군사활동은 아마도 이때 고구려의 공격과 연관된 사건을 가리킬 것이다. 이렇듯 450년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되어 점차 적대적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때 회맹을 기록한 중원고구려비는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우월한 위상의 마지막 장면을 기록하게 된 셈이다.
당대 동북아시의 패자로서 위세를 떨치는 고구려의 태왕이 신라 왕과 회맹하기 위해 접경지역인 최변방 중원 지역까지 순행하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더욱 449년 5월에 중원 지역에서 장수왕과 눌지왕이 만난 회맹은 삼국시대에 사료로 확인되는 두 나라 국왕이 만난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다. 그런 점에서 삼국시대 역사의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곧 열리게 될 남북 정상회담도 우리 현대사의 명장면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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