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13_0040
6세기 말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十七年. 上賜湯璽書曰. 朕受天命, 愛育率土, 委王海隅, 宣揚朝化, 欲使圓首方足, 各遂其心. 王每遣使人, 歲常朝貢, 雖稱藩附, 誠節未盡. 王旣人臣, 須同朕德, 而乃驅逼靺鞨, 固禁契丹. 諸藩頓顙, 爲我臣妾, 忿善人之慕義, 何毒害之情深乎. 太府工人, 其數不少, 王必須之, 自可聞奏. 昔年潛行財貨, 利動小人, 私將弩手逃竄下國. 豈非修理兵器, 意欲不臧, 恐有外聞, 故爲盜竊. 時命使者, 撫慰王藩, 本欲問彼人情, 敎彼政術. 王乃坐之空館, 嚴加防守, 使其閉目塞耳, 永無聞見. 有何陰惡, 弗欲人知, 禁制官司, 畏其訪察. 又數遣馬騎, 殺害邊人, 屢騁姦謀, 動作邪說, 心在不賓.
『隋書』卷81, 「列傳」46 東夷列傳 高麗
[수(隋) 문제(文帝)] 17년(597) 상(上)이 탕(湯)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짐은 천명을 받아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데, 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위임하고,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각기 그 마음을 이루도록 하였소. [그런데] 왕은 매번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하고 비록 번국(藩國)을 칭하지만, 성의를 다하지는 못하였소. 왕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의 덕과 같이 베풀어야 하거늘 도리어 말갈(靺鞨)을 핍박하고 거란(契丹)을 통제하였소.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의 신하가 되고자 하는데, [왕은 이와 같이]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니 어찌 해로움이 크고 깊다고 하지 않겠소?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반드시 그를 필요로 한다면 스스로 [나에게] 주문(奏聞)하면 될 것인데, 몇 해 전에는 몰래 와서 재화로써 이익으로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궁수(弩手)를 데리고 그대의 나라로 달아났소. 병기를 수리하는 의도가 착하지 못하므로 바깥소문을 두려워하여 도둑질한 것이 아니겠소? 이때 [짐은] 사자에게 명하여 왕의 번국을 위무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을 살펴보고 그 정치방법[政術]을 가르치고자 해서였소. [하지만] 왕은 [사자를] 객관에 앉혀 두고, 엄히 막아 지키면서 그 눈과 귀를 닫고 막도록 하여 끝내 보고 들을 수 없도록 하였소. 어떠한 음흉함이 있어서 다른 이가 알지 못하도록 하고, 관사(官司)를 통제하며 그가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였소? 또한 [왕은] 자주 기마(騎馬)를 보내 변방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번 간계한 계획을 펼쳐 올바르지 못한 낭설을 만들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
『수서』권81, 「열전」46 동이열전 고려
이 사료는 수(隋)나라 문제(文帝, 재위 581~604)가 고구려의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에게 보낸 새서(璽書)의 일부이다. 이 새서는 600년(고구려 영양왕 11년)을 전후해 수나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첨예화되는 과정이 잘 드러난다는 점과, 당시 고구려에 대한 수나라의 입장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해당 사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도 그대로 실려있는데, 새서를 보낸 시점이 언제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수서(隋書)』 「고려전(高麗傳)」의 경우 개황(開皇) 17년(수 문제 17년), 즉 597년(영양왕 8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597년은 평원왕 대가 아니라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 대이다. 그러므로 새서를 보낸 시점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새서의 수신자에 오류가 있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대부분은 시점이 잘못되었다고 이해한다. 『수서』 「고려전」에 따르면 새서를 받은 평원왕이 답서를 준비하다 사망하였다고 했고, 『수서』 「본기(本紀)」에서 평원왕의 사망 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찬자 역시 『수서』 「고려전」의 시점이 잘못되었다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새서의 작성 및 발송 시점을 대부분 590년(영양왕 1년)으로 본다.
새서에서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의 적대 행위를 질책하고, 이를 시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수나라는 583년(평원왕 25년) 돌궐(突厥)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고, 요서 지역의 고보령(高寶寧) 세력을 제거하고 이 지역으로 진출해 왔다. 이에 따라 고구려와 수나라는 요서 지역에서 국경을 마주하였는데, 이로부터 양국은 우호적 관계에서 비우호적 관계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수나라의 우선적인 관심이 남방의 진(陳)나라에 있었으므로 양국 관계의 악화가 바로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89년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통합하면서 상황이 변화하였다. 수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를 고구려에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료는 그 일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의 잘못으로 지적한 사항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말갈과 거란 문제, 둘째 고구려의 간첩 활동, 셋째 수나라 사신에 대한 적대적 처우, 넷째 국경 지역에서의 군사 활동이다. 새서의 작성 시점이 590년이라는 점에서, 수나라 문제가 지적한 4가지 사항은 대체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제 관계가 비우호적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580년대 중⋅후반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새서가 보내진 이후 고구려와 수나라의 국제 관계는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어느 정도 회복된 듯 보였다. 양국의 사신이 계속 왕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국의 군사적 긴장은 갈수록 높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경 지역의 말갈과 거란을 둘러싸고 양국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598년(영양왕 9년) 고구려의 영양왕은 말갈 기병 1만 명을 동원해 수나라 영주총관부(營州總管府)를 공격했다.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전면적인 전쟁 상태로 치달았는데, 이러한 양국 관계의 변화는 이후 612~614년 대규모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대수관계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46,여호규,한국역사연구회,2002.
「7세기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전쟁」,『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임기환,역사학회 편, 일조각,2006.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의 서방정책 연구』, 이성제, 국학자료원, 2005.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o_013r_0010_0010_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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