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11813&localCode=krcn
백암성 (白巖城)
둘레 : 2.5㎞
지역 : 중국 요령성 요양시 등탑시 서대요진 관둔촌 47°17'49.4"N123°29'13.2"E
요령성(遼寧省) 요양시(遼陽市) 등탑(燈塔)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
개설
요양에서 본계(本溪)를 거쳐 압록강(鴨綠江)에 도달하는 교통로의 초입부에 있는 고구려 산성이다. 중국에서는 연주성(燕州城)으로 불리는 백암성은 요동 평야 멀리서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성벽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2.5㎞로, 동쪽과 북쪽은 잘 치석된 석재로 성벽의 안팎을 견고하게 쌓아올린 협축식(夾築式) 구조이며, 서쪽 일부와 남쪽 구간은 자연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였다. 현재 성벽은 고구려가 축조한 것을 명대(明代)에 개축한 것으로, 성벽 상단부에는 명나라가 석회를 이용하여 성돌을 쌓아올린 부분이 확인된다. 산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동남 모서리에는 방형에 가까운 위성(圍城)이, 북쪽에는 점장대(點將臺)로 보이는 방형의 평대가 있는데, 축조 방식이 매우 조잡하여 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남벽과 북벽은 절벽으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하지만, 서벽과 북벽은 지형상 안쪽이 높고 바깥쪽이 낮아 성 내부의 움직임을 외부에서 쉽게 관측할 수 있어 방어적인 측면에서 매우 불리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에는 다수의 성치(城雉)가 설치되어 있다.
건립 경위
1681년에 편찬된 『요양주지(遼陽州志)』에는 요양성 동북 57리에 위치한 석성산(石城山)에 석성이 있는데, 본래 고려의 백애성(白崖城)으로 당(唐)이 암주(巖州)를 설치하여 지금은 암주성으로 부른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645년 당이 백암성을 점령한 후 암주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연주성이 고구려의 백암성이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연주성의 성돌은 밝은 회색을 띄고 있어 백암성 명칭의 유래를 짐작해볼 수 있다.
백암성의 축조 시점은 요동 지역을 확보한 고구려 중기 이후로, 문헌 기록에 따르면 547년 신성을 보수할 때 백암성이 개축되었으므로, 늦어도 6세기 전반에는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치
백암성은 요양시에서 30㎞ 떨어진 등탑시 동남부의 서대요진(西大窰鎭) 관둔촌(官屯村)의 동쪽 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산성은 동쪽으로는 천산 산맥(天山山脈)을 등지고 있고, 서쪽은 혼하(渾河)·태자하(太子河)·북사하(北沙河)의 충적 평원을 향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화자진(鏵子鎮)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은 대청산(大青山)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두 산 사이로는 태자하가 흐른다.
태자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요동 평원 중앙부에 위치한 요양시가 나타나며,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천산 산맥을 넘어 압록강에 이르는 최단 코스인 본계에서 봉성(鳳城)으로 향하는 출발 지점인 본계시가 자리한다. 즉, 요동 평원과 천산 산맥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백암성은 태자하를 거슬러 본계를 지나 천산 산맥으로 진입할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형태
산성의 평면은 불규칙한 말각방형으로, 남북 길이 480m, 동서 너비 450m 내외이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대략 2.5㎞이다. 성벽은 산세를 따라 석축을 하였는데, 남벽은 태자하의 가파른 절벽으로 인해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다. 북벽은 경사진 사면을 따라 석축을 하였는데, 평면 형태는 바깥쪽으로 휜 활모양이다. 북벽은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사면이 비교적 평평한 관계로 7~8m에 달하는 높은 성벽을 쌓았다. 북벽의 동단인 동북 모서리에서 서쪽으로는 약 70m 간격으로 5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
현황
백암성은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예전부터 널리 알려진 고구려 산성이다. 요령성 문물 고고 연구소가 2009년과 2010년에 발굴 조사 한 결과, 고구려 시기의 성벽과 성치, 요금(遼金) 시기에 수축된 문지(門址) 등이 확인되었다.
고구려 시기의 성벽은 잘 치석된 석재로 성벽의 안팎을 견고하게 쌓아올린 협축식 구조로, 기단부에는 들여쌓았다. 반면 명대에 개축된 성벽은 고구려와는 달리 성벽 상단부를 중심으로 성돌 사이에 석회를 이용하여 접착한 부분이 확인된다. 북벽에 설치된 5개의 성치는 현재 4개만 남아 있는데, 그 중 2번째의 성치만 고구려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후대에 개축된 것이다. 고구려의 성치는 기단부를 들여쌓기 하였고, 모서리는 원형에 가깝게 굽도리 양식으로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해당 성치의 크기는 윗면의 길이 8.4m, 너비 5.2m 이며, 높이는 7.2~7.8m이다.
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동남 모서리에는 방형에 가까운 위성이, 북쪽에는 점장대로 보이는 방형의 평대가 있다. 평대의 규모는 길이 8m, 너비 7.4m, 높이 4.3~5.7m로, 축조 방식이 매우 조잡하여 성의 다른 구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위치상 고구려 시기에도 점장대가 있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백암성에서는 2009년 발굴 조사 당시 표면에 “……(재)(在) ……경신태형(庚申太兄孟)……(하)(下)부대형(部大兄)……”이 새겨진 석각 1점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시기의 토기와 함께 적갈색 연화문 와당, 승문과 격자문 등이 새겨진 기와들이 소량 출토되었다.
남벽과 북벽은 절벽으로 인해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서벽과 북벽은 지형상 안쪽이 높고 바깥쪽이 낮아 성 내부의 움직임을 외부에서 쉽게 관측할 수 있어 방어적인 측면에서 매우 불리하다. 그럼에도, 고구려가 성을 축조한 것을 보면 백암성은 군사 방어뿐만 아니라 지방 지배를 위한 치소성(治所城)으로도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백암성[연주성]은 요동 평원에서 압록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로 상에 축조된 고구려 시기의 성이다. 성 주변에서 건물지 초석과 함께 고구려 기와편이 다수 산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백암성은 군사 방어 뿐만 아니라 지방 지배를 위한 치소성으로도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여호규,『고구려 성』Ⅱ (국방 군사 연구소, 1999)
王綿厚, 『高句麗 古城 硏究』(文物 出版社, 2002)
王禹浪, 王文軼, 『遼東半島 地區的 高句麗 山城』(哈爾濱 出版社, 2008)
國家 文物局, 『中國 文物 地圖集-遼寧 分冊』(西安 地圖 出版社, 2009)
蘇鵬力,「燈塔市 燕州城 城址」(『中國 考古學 年鑒』, 文物 出版社, 2010)
魏存成,「中國 境內 發現的 高句麗 山城」(『社會 科學 戰線』201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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