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70_0050_0060


태자성(太子城)


좌표 : 41°22'25.3"N124°26'29.1"E 
참고 :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11872&localCode=krcn


형태사항

둘레 1,425m, 면적 132,500㎡

(撫順市博物館, 1992; 東潮·田中俊明, 1995; 王綿厚, 2002; 魏存成, 2002)라는 기록│둘레 1,450m(國家文物局, 2009); 1,500m(王禹浪·王宏北, 2007); 3리(陈大为, 1995)라는 기록이 있음. 12점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하래하향 태자성촌(遼寧省 新賓縣 下夾河鄕 太子城村)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80무순시박물관문물보사대
(撫順市博物館文物普査隊)
1980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실측조사가 이루어짐. 발표는, 撫順市博物館, 1992, 「遼寧新賓顯高句麗太子城」, 『考古』1992-4를 통해 이뤄졌음.
1986 王綿厚, 孫力에 의해 양맥(梁貊)유적을 조사하면서 현지답사가 이루어짐. 성 규모는 일반적이었으나, 지리위치는 매우 중요했고, 매우 특색있게 구축되었다고 보고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고 함.
. 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1980~1982무순지구 무순보사대
(撫順地區撫順普査隊)
무순지구 무순보사대(撫順地區 撫順普査隊)가 신빈현(新賓縣) 관내의 소자하(蘇子河)와 부이강(富爾江) 유역의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됨(溫秀榮·張波, 1996).

 


구조특징


태자성(太子城)이란 이름은 성 근처에 있는 태자하(太子河)에서 유래함. 강 이름이 ‘태자하(太子河)’라고 불리게 된 유래는 전국(戰國) 연(燕) 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보내 진시황을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하고 화를 피해 요동 연수(衍水)로 왔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고 함. 『读史方輿紀要』에서는 ‘태자하는 연수(衍水) 연태자 단(燕太子 丹)이 연수(衍水)로 와 몸을 숨겼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태자하(太子河)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음. 만약 태자하(太子河)가 이 유래로 이름이 붙여졌다면, 태자성(太子城)은 태자 단이 머물렀던 성은 아님. 태자성은 고구려성으로, 태자 단과 어떠한 관계성도 연결할 수 없음. 다만 태자성이란 이름은 그 지역에서는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


산성 평면은 타원형에 가까운데,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음. 성안 동단 완만한 대지(臺地)에는 내성이 축조되어 있음. 즉 태자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된 복곽식 산성임(東潮·田中俊明(1995)은 동쪽을 외성, 서쪽을 내성으로 구분함). 산정식산성으로 분류하기도 함(魏存成, 2011). 성벽, 성문, 치, 요망대, 성가퀴, 봉화대, 거주지, 우물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기와, 토기, 돌절구 등이 출토됨.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함. 내, 외벽은 편(偏)방추체의 쐐기형 돌이나, 장방형 혹은 장방형에 가까운 돌을 사용하였고, 장심(墻芯)에는 불규칙한 돌을 사용하였음. 그 가운데 두대모세(頭大尾細)한 편방추체의 쐐기형 돌은 주로 내벽에서 볼 수 있는데, 세밀하게 가공함. 일반적으로 길이 78㎝, 너비 75㎝, 두께 15㎝임. 가장 큰 돌은 길이 76㎝, 너비 90㎝, 두께 43㎝임. 반면 비교적 작은 돌은 길이 35㎝, 너비 30㎝, 두께 10㎝임. 외벽 석재는 대부분 장방형 혹은 장방형에 가까운 돌을 사용하였는데, 장방형에 가까운 돌의 경우, 편방추체의 쐐기형 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음. 하지만 보편적으로 장단의 비율이 축소되고, 두께는 두꺼워지며, 뾰족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게 되어, 장방형이거나 장방형에 가까워짐. 돌의 크기는 대체적으로 비슷한데, 일반적으로 길이 30㎝, 너비 24㎝, 두께 24㎝임. 크기가 비교적 큰 기단부에 구축된 돌은 길이 42㎝, 너비 44㎝, 두께 20㎝임.


산성 성벽의 축조는 각 구간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적절하게 이루어졌음. 동벽 아래는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인공 성벽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음. 다만 바깥은 수십미터 높이의 절벽이고 안은 내성의 평탄한 높은 언덕이기 때문에, 사람이 떨어지기 쉬웠음. 이에 낮은 벽을 축조해서, 전쟁 때에는 병사들이 기댈 수 있게 하여 보호하고, 평상시에도 안전을 제공하였음. 이 낮은 벽은 성가퀴라고도 할 수 있음. 남벽은 절벽이 있지만 그리 높지 않아 높은 성벽의 축조가 필요했음. 그런데 안측은 경사진 지대였기 때문에, 성벽을 축조하기 위한 넓은 지면이 없었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다지 높지 않은 암벽 상부에 바깥을 향하도록 홈을 파내고, 암벽바닥과 성벽기단부가 일체가 되게 하면서 성벽을 쌓았음. 이로써 성벽 높이를 해결하고, 무너지는 염려도 없게 되었음. 서벽의 남단과 서단도 성벽을 건립할 기초조건이 없었음. 이에 밖에만 석벽을 쌓았고 안쪽은 산비탈에 의지하면서 그 위에 성가퀴를 쌓아 성벽과 산비탈을 결합시킴으로써 성벽의 이심력(離心力)과 밖으로 붕괴되는 것을 방지함. 북벽은 구불구불 뻗어 있는 산등성이 위에 있는데, 바깥은 험준한 비탈이고, 안쪽은 약간 경사진 비탈임. 축성자는 산등성이에 일렬로 늘어선 산등성이돌을 골간으로 삼아, 내외 양면에 석벽을 둘러싸서, 성벽이 내외로 쓰러지지 못하도록 함(撫順市博物館, 1992).


성벽을 부분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음. 우선 외성 성벽은 험준한 절벽 가장자리에 축조함. 외성 길이는 1,425m임. 북벽의 경우, 북문~내성벽 북단 교차지점까지로 길이는 280m임. 성벽은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융기하는 산등성이를 따라 점차 높아짐. 좁고 길다랗게 솟은 산등성이의 암벽을 골간으로 삼아, 양면에 돌을 쌓아 내외벽을 축조하였는데, 성벽은 정상부까지 들여쌓기를 함. 내벽은 높이 6m, 외벽은 높이 8~10m, 기본 너비 4~6m, 정상부 너비는 1m 임. 동벽은 내성벽 북단~내성벽 남단 구간으로, 길이는 395m이고, 평면은 궁형에 가까움. 동벽은 모두 가파른 절벽 가장자리에 축조된 낮은 성벽으로, 기본 너비·정상부 너비 1m, 높이 0.5~1m임. 성벽은 수직으로 쌓았고, 들여쌓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음. 남벽은 동벽과 내성벽의 남부 교차지점~남문 구간으로, 길이는 260m임. 성벽 축조방법에 따라 동·서 양 구간으로 나눌 수 있음. 동단(東段)의 성벽축조방법은 동벽과 같음. 대부분 낮은 성벽인데, 다만 지세가 점점 낮아지면, 성벽은 점차 높아짐. 서단(西段)은 가파른 비탈 혹은 낮은 초벽(峭壁) 상부를 2m 깊이로 파내고, 밖으로 개방된 높이 5m의 성벽(城墻)기조를 만들었음. 그리고 기조 바깥에 벽석을 쌓고, 안은 깬돌로 채웠음. 성벽과 기조 꼭대기의 높이가 같아지면, 그 결합부에 높이 0.5m, 정상부 너비·기본너비 1m인 낮은 석벽을 다시 축조함. 마지막으로 서벽은 남문~북문 구간으로, 길이는 490m이고 성벽 평면은 반원형임. 남문~산성 서단은 서벽의 남단과 서단임. 이 양단 성벽은 토석혼축이며, 축조방법은 그리 험하지 않은 산비탈의 허리에 성벽 기단부를 축조할 지면을 다듬은 다음, 돌로 외벽을 쌓고(이러한 축조방법은 심양 석대자산성에서도 사용됨), 중간과 흙과 깬돌을 채웠음. 벽석, 흙 및 돌로 채워진 장삼이 산비탈 허리의 흙둔덕과 높이가 같아지면, 그 결합부 위에 높이 1~1.5m, 너비 1m의 낮은 성벽을 다시 축조하였음. 이 단의 성벽아래에는 돌을 깔아서 축대를 쌓았음. 서벽 서단에서 동쪽으로 꺾어져 북문에 이르는 구간은 서벽 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하여,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3m, 기단부와 정상부 너비 3m의 크고 높은 석벽을 구축하였음. 이 구간의 성벽 일부분에 드러난 성벽 기단부를 보면, 성벽 기단부는 성벽보다 밖으로 0.5m 정도 뻗어 나와 있고, 높이는 0.5~1m임.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내외벽을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았음. 일부 부분은 바깥으로 기울어져 붕괴될 우려가 있는데, 성벽 바깥에 산비탈 아래~성벽정상부까지 돌을 쌓은, 높이 30~40m, 경사도 60°인 대규모의 축대가 형성되어 있음. 서벽 위에는 돌 기둥(石洞)이 있음. 노모저강(老母猪崗) 산줄기로 이어지는 서벽에는 인공방어시설이 집중적으로 구축됨. 이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다른 성벽과 달리 산줄기로 연이어져 방어가 취약하기 때문임. 이에 움푹 들어간 산등성이를 천연해자로 삼은 다음,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적의 접근을 차단하고 아군을 은폐할 수 있게 하였음.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고, 최고지점에 봉화대를 구축하여 입체적 방어시설을 완비함(여호규, 1999).


내성벽은 따로 분리하여 볼 수 있음. 내성은 산성 동쪽 비탈에 남북방향으로 길게 구축된 한 줄기의 석벽 사이에 있음. 내성의 평면은 대략 반원형으로 북, 동, 남 세 면은 모두 수직 절벽임. 성벽의 길이는 280m(魏存成(2002)은 내성이 675m라고 기록함), 기단부 너비는 2.5m, 정상부 너비는 2m, 남은 너비는 3m임. 성벽 기단부는 거대한 돌로 3~4층 쌓았고, 그 위의 성벽은 안으로 들여쌓았음.


 

역사적 의미

 

태자성의 축조방식은 흑구(黑溝)산성, 패왕조(覇王朝)산성, 환도산성, 전수호(轉水湖)산성 등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이 있음. 상술한 산성들은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는데(초벽장(峭壁墻)), 태자성은 단순한 초벽장은 보이지 않고, 가파른 절벽 위에 인공성벽을 축조함. 가파른 절벽 위에 성벽 기조(城墻基槽)를 파내고 산등성이돌을 에워싸서 벽의 장심(墻芯) 골간을 만드는 방법은 고구려산성 가운데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음(撫順市博物館, 1992).


산성은 노모저강(老母猪崗)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축조되어 있는데, 이 곳은 북면의 험한 비탈과 동, 남 양면의 험준한 절벽을 갖추고 있는 말안장모양의 산등성이임. 즉 산성은 세 방면이 가파르고 주위의 평지가 연접된 조건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산성 북, 동, 남 세 면에는 북태자하와 소래하가 흐르면서 바깥 주위의 방어 장벽을 형성되어 있음. 산성 서쪽 모서리에 있는 낮은 산등성이가 산성과 연접되면서 산성의 외부로 연결되는 유일한 매개가 되었고, 산성방어면에서 유일하게 불리한 방면이 됨. 그래서 여기에 인공방어수단과 자연조건을 결합시켜, 낮은 산등성이에 넓고 큰 구호(溝壕)를 조성하며, 돌로 축대를 쌓아 산을 기어오르거나 은폐할 수 있는 조건을 없애버렸고, 성벽을 주요방어시설로 삼았으며, 마지막에는 서쪽 봉화대로서 주변을 공제(控制)하는 4단계의 입체적 방어체계를 구축함. 이로써 인위적으로 산성 서남모서리와 같은 산맥주맥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고, 최종적으로 산성의 네 모서리를 완전히 봉쇄시켜 완벽한 방어계통을 구축함. 북문 또한 문 바깥의 북태자하가 천연장벽을 이루는데, 치와 성 밖의 방수장대(防守墻臺)가 중앙에 있고, 말안장 형태의 옹성벽이 양측에서 성문옹성을 통제하는 종심(縱深)방어계통을 이룸(撫順市博物館, 1992).


태자성이 위치한 태자하는 한대(漢代)에는 대양수(大梁水)로 불렸는데, 『三國史記』와 『三國志』 등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에 태자하 상류 일대에는 ‘양맥(梁貊)’이 거주하였다고 함. 당시 고구려를 ‘맥’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양맥은 ‘대양수(大梁水) 유역의 맥족(貊族)’이라는 의미로서 고구려와 동일한 계열의 족속으로 추정됨. 이 지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와 한군현이 자리 잡은 요동평원 사이의 중간지대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음. 당시 고구려에서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혼강~소자하~혼하(渾江~蘇子河~渾河)루트였는데, 태자하 상류일대에는 이들 하천연안으로 통하는 산간로가 많이 발달되어 있었음. 북태자하(北太子河)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발흥지인 혼강(渾江) 연안으로 진입할 수 있으며, 특히 제 2현도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신빈 영릉진고성(永陵鎮古城), 목저성(木底城)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빈 목기진(木奇鎭) 일대 등 소자하 유역으로 나아가는 산간로가 많이 있음. 따라서 양맥 곧 태자하 상류일대의 전략적 위상은 고구려에서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혼강~소자하~혼하(渾江~蘇子河~渾河)루트와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음. 1~3세기 문헌자료에 보이는 양맥기사는 위와 같은 지리조건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음. 가령, 고구려가 유리왕대에 소자하 방면의 제2현토군 공격하기에 앞서 양맥을 공략하였는데, 이는 양맥이 태자하~혼강 또는 태자하~소자하 산간로를 통해 고구려군을 습격할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제거한 것임. 그 뒤에도 고구려와 중국세력은 양맥지곡(梁貊之谷)이나 양구(梁口) 등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데, 이들 전투지역은 소자하에서 태자하로 나아가는 산간로 입구나 그 주변일대로 비정됨. 이에 고구려는 양맥을 집단적으로 예속시켜 통제하는 한편, 중국과의 전쟁에 양맥의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함. 후한이 고구려 침공에 앞서 양맥의 유력자로 추정되는 ‘예맥거수(濊貊渠帥)’ 등을 살해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임. 다만, 당시까지 고구려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토착사회의 유력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함.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양곡(梁谷)’과 ‘양성(梁城)’ 등에서 왕릉을 돌보는 수묘인연호(烟戶)를 징발하였다고 함. 4세가 후반경 양맥 곧 태자하 상류일대는 ‘양곡(梁谷)’과 ‘양성(梁城)’이라는 두 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졌고, 특히 ‘양성(梁城)’이라는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이 축조됨. 왕제(王弟)가 중앙에서 토착사회의 유력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던 3세기 후반까지와는 달리 이제 지방관이 파견되어 직접 지배하였던 것임(여호규, 1999).


태자성은 북태자하 연안의 중심지역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성 내부에 거주용 공간이 넓다는 점에서 군사방어성과 함께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축조시기에 관해서, 무순시박물관(1992)의 연구 결과가 있음. 우선, 북문 옹성 평면은 말안장형인데, 그 형태가 나통산성 서남문과 약간 비슷함. 흑수산성 동문, 오녀산성 동문, 국내성 서문 등의 옹성은 모두 장방형으로, 고구려 산성 가운데 초기의 옹성형태임. 반원형 즉 말안장형의 옹성은 시간상 장방형의 옹성보다 늦음. 태자성 북문의 옹성형태는 흑구산성 등 고구려초기산성보다 늦다고 할 수 있음. 건축재를 살펴보면, 태자성 외성은 모두 꼭대기가 방형 혹은 방형에 가까운 돌로 석벽을 구축하였는데, 흑구산성·패왕조산성·오녀산성 등 고구려 초기 산성이 꼭대기가 장방형의 편방추체(偏方錐體) 쐐기형 돌로 석벽을 구축한 것과 차이가 있음. 그 재료의 가공술은 확연히 늦은 단계에 있음. 나통산성(羅通山城)의 서벽은 돌로 내외벽을 쌓았고 장심(墻芯)에는 흙과 깬돌로 채워 넣은 토석혼축벽임. 이와 같은 토석혼축벽은 태자성의 서벽 남단과 서단에서 볼 수 있음. 다만 태자성은 성벽 안쪽이 산비탈이여서, 내벽이 축조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 나통산성과 태자성은 주로 돌로 축조하기 시작하여, 중간에 흙과 돌을 섞은 벽인데, 모두 가지런한 석벽임. 이러한 점은 고이산성이 돌로 쌓지 않고, 다져진 흙과 깬돌로 쌓은 토석혼축으로 성벽을 쌓은 것과 같지 않음. 이로 보아 고이산성의 성벽축조방법은 나통산성과 태자성의 성벽축조방법과 비교해 볼 때, 늦은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음. 한편 태자성 내성은 편방추체 쐐기형 돌로 축조했는데, 외성에 사용한 돌이 장방형 혹은 장방형에 가까운 돌로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등 전체적으로 건축풍격이 같지 않음. 내성문은 장방형의 옹성으로, 오녀산성의 동문과 같음. 오녀산성 동문은 한쪽의 성벽이 다른 한 쪽의 성벽을 감싼 형태이며, 태자성은 양쪽의 내성 성벽이 서로 교차하는 형식임. 건축방식이 매우 비슷한데, 모두 고구려초기산성의 옹성형태에 속하고, 산성 북문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음. 내·외성은 건축자재와 축조방식, 옹성문 등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데, 내·외성의 축조시기가 다르다는 점이 반영된 것임. 내성은 전체 방어계통에서 독립된 單元을 이룰 수 있고, 외성을 떠나서도 하나의 성을 이룰 수 있음. 이로 볼 때 내성이 외성보다 축조시기가 이른 것으로 추정됨. 외성은 내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고, 외성 축조 후에도 내성은 계속 사용되면서, 내·외성이 배치되는 구성이 조성됨. 성이 위치한 태자하 상류는 고대 양맥이 활동한 지역이라는 견해가 있음. 양맥은 양수에 거주하는 맥인데, 양수는 지금의 태자하임.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33년 가을 8월(瑠璃王三十三年(서기 15년)秋八月) 왕명 오이, 마리, 령병 2만 서대양맥 멸기국(王命烏伊摩離領兵二萬西伐梁貊滅其國)”이라는 기사가 있음. 태자성이 위치한 곳은 옛 양맥이 거주하는 태자하 상류인데, 내성은 고구려 초기산성의 건축 풍격을 갖추고 있음. 이로 볼 때, 내성은 고구려 건국시기에 이미 여기에서 활동하던 양맥의 유적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고, 그 축조연대는 서기 15년 이전으로 추정됨. 고구려가 양맥거주지 즉 태자하 상류를 영역으로 삼은 이후에도, 이 곳을 고수하는데 힘을 기울였음. 태자하 상류를 통제하는 지점에 위치한 태자성은 필연적으로 계속해서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므로 내성은 기원 15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외성의 축조연대는 흑구산성 등 고구려 초기산성보다 늦고 고이산성보다는 이르다고 추정됨. 외성의 축조는 고구려의 끊이지 않은 요동공략의 역사와 관계가 있음. 고구려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그 방어권 또한 점차적으로 밖으로 확장됨. 위진남북조시기에 고구려영역이 요하(遼河) 일선까지 확장되면서, 서쪽변경에 고이산성 등 중성(重城)을 축조하여, 새로운 방어권을 구성하였는데, 소위 고구려장성이라고 일컫어짐. 고구려 초기 방어권 상에 있었던 태자성은 위진남북조시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중심구역이 되었음. 즉 초기방어권 상의 요충지에서 새로운 방어권 배후의 종심(縱深)방어시설로 변모한 것임. 외성은 당연히 이러한 군사상 필요에 의해 축조된 것임. 성에서는 수키와와 암키와가 출토되었음. 고구려가 기와를 사용한 시기는 3세기 중·만기로 추정되는데(林至德·耿鐵華, 1985), 태자성과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건물에 기와를 사용한 시간은 수도에서 기와를 사용한 연대보다 그리 많이 늦지 않을 것임. 고구려토기 분석연구에 의하면, 고구려 중기 토기는 대부분 물레제작의 니질 토기이고, 색깔은 회색·흑색·황토색 등이며, 소량의 모래가 들어가 있고, 저온의 시유도기가 출현한다고 함(耿鐵華·林至德, 1984). 비록 태자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많지 않지만, 고구려 중기 토기의 특징과 대체로 비슷함. 고구려 중기의 토기연대는 4세기 초~5세기 말로 추정됨. 그러므로 외성의 축조시기는 늦어도 4세기 이전으로 추정됨. 『三國史記』에서는 신성(新城), 즉 고이산성이 276년 서천왕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서천왕이 신성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음. 이는 3세기 중~만기에 고이산성이 이미 존재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새로운 방어권이 형성되었거나 혹은 초보단계에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음. 그렇다면, 고구려의 통일된 방어권의 縱深으로 계속 세워진 산성 가운데 하나인 태자성에서, 그 외성은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음. 이로 추측해 볼 때, 태자성 외성의 축조연대는 고이산성 건립이전으로, 즉 276년보다 이르다고 추정됨. 성에서 출토된 토기편이 비록 4세기 초~5세기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고구려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는 산성의 축조연대보다 늦음. 그러므로 외성 축조연대의 추측과 토기편이 4~5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음. 상술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태자성은 서기 15년 이전에 태자하 상류에 거주한 양맥의 유적이고, 서기 15년 이후에도 계속 사용함. 즉 태자성은 고구려 초기방어권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음. 3세기 중만기 이전에는 외성이 축조됨. 즉 고구려가 요동으로 확장한 이후에 확립된 신방어권에서 종심방어요충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음.


다음으로 동봉(蕫峰)(1995)의 연구가 있음. 태자성(외성)의 축조방법은 이른 시기에 축조된 고구려시대의 성과 비교해 볼 때, 견고성에서 뛰어남. 고구려 성의 축조시기를 세 시기로 나누어 볼 때, 태자성의 축조시기는 1시기보다는 늦고, 2시기보다는 이르다고 할 수 있음. 대체로 무순시박물관(1992)에서 추정한 축조시기에 동의함.


온수영, 장파(1996)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료대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은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등과 더불어 초기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보다 구체적인 축조연대를 추측해 볼 때, 산성이 위치한 지역이 비류국과 양맥고지(故地)라는 점에서 고구려 건국전후 즈음으로 추정됨. 고구려 중기산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두대미세頭大尾細)의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태자성 외성이 대표적임.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동이(盆), 반(盤), 옹(瓮),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 연대는 위진 아래임.


여호규(1999)의 연구에 따르면, 장방형 옹성구조를 갖춘 내성벽을 양맥인들이 축조하였을지는 의문임. 오히려 내성의 옹성구조와 성돌이 고구려 초기 산성과 유사하다면,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임. 따라서 태자성의 내성과 외성이 실제로 다른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면, 이는 축성목적과 기능이 달랐을 가능성을 시사함. 이러한 점에서 산 정상부에 군사방어시설로서 내성을 먼저 쌓았다기보다는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계곡과 완만한 경사지를 포괄하여 평상시의 거주성(居住性) 곧 지역지배를 위한 거점의 기능이 강화된 외성을 축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주목됨(임기환, 1998). 고구려는 1~3세기까지 양맥 곧 태자성이 위치한 태자하 상류일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다가, 4세기 이후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적인 영역지배를 도모함. 1~3세기경 태자하 상류일대는 지방지배라는 측면이 아니라 혼강에서 소자하, 혼하를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교통로와 관련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그러므로 1~3세기경 고구려는 태자하상류일대에 군사방어성을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태자성 내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됨. 그리고 4세기 이후 양맥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양성(梁城)’을 구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태자성 외성이 이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음. 〈광개토대왕롱비〉의 ‘양성’관련기사와 4세기 초부터 소자하 혼하 일대에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축조하여 축선방번체계(軸線防繁體系)를 구축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태자성도 늦어도 4세기 중반경에는 축조되었다고 여겨짐.


王綿厚(2002)의 연구로 볼 때, 요동에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산성 가운데, 태자성에는 ‘맥인(貊人)’과 고구려산성 축조기술에 대한 것들이 집중되어 있음. 산세의 험함을 이용한 동장직벽(東墻直壁), 산등성이 돌을 골간으로 삼고 양면에 돌을 쌓아 내외벽을 축조하고 정상부까지 들여쌓기를 한 북벽, 기조(基槽)를 먼저 파고 기조 바깥에 벽석을 쌓은 다음 안은 깬돌로 채워 넣고 다시 낮은 벽을 축조한 남벽, 전통적인 쌍면석벽으로 축조된 높이 3~4m의 서벽북단, 외성 안의 내성축조 등은 고구려 산성 가운데 드물게 보이는 것임. 하지만 고구려산성의 축성기술 거의 전부를 갖추고 있음. “내성”에 보이는 장방형으로 교차되는 옹성문과 축조방법을 볼 때, 산성의 축조 시기는 비교적 이르다고 할 수 있음. 현재 지면에서 발굴된 늦은 시기의 유물들은 산성이 발굴되기 전에 찾은 것일 뿐임. 건축구성, 내성유구, 여러 방식이 남아 있는 산성축조방법과 위치, 문헌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태자성은 고구려 초기에 병존했고, 태자하 상류에서 활동한 ‘양맥(梁貊)’의 고성(古城)임.


위치 비정에 관한 王綿厚(2002)의 연구가 있음. 이에 따르면 태자성은 맥성으로 추정됨. 맥성(貊城)은 ‘양맥(梁貊)’의 고성으로,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양성(梁城)’이라 불렸는데, 성의 이름은 옛 양수(梁水)와 맥부(貊部)에서 유래함. 맥성은 고구려가 혼강유역에서 건국되고 가장 먼저 병탄된 맥부 왕성 가운데 하나임. ‘양맥(梁貊)’의 고성(古城)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음. 첫 번째는 지리위치를 볼 때, 지금의 요동 태자하(梁水) 중·상류에 위치하고 있음. 두 번째는 고구려(梁貊)의 초기 산성임. 이 두 가지 조건을 부합하는 성이 태자성이라고 할 수 있음. 태자성은 “양맥(梁貊)”의 고지(故地)인 태자하 상류 남안에 위치하고 있음. 그리고 태자성의 배치, 규모, 축조시설, 유물 등은 고구려 초, 중기의 요소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음. 성이 위치한 곳은 ‘대양수(大梁水)’ 상류이고, 북쪽으로 한의 고구려현과 접해 있는데, 고구려 유리왕대에 ‘양맥(梁貊)’ 고성을 먼저 멸망시키고, 북쪽으로 고구려현을 침략하였다는 기록과 부합함. 이로 볼 때, 태자성이 초기 ‘양맥(梁貊)’의 고성이고, 고구려가 ‘양맥(梁貊)’을 병합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한 요동의 명망있는 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음.


 

자연환경

 

신빈현 서남 태자하 상류 우안에 위치한 하래하향(下夾河鄕)의 태자성촌(太子城村) 북쪽에 위치함. 태자성촌은 태자하(太子河)라는 강이름에서 유래함. 산성에서 남쪽으로 약 20m 떨어진 지점에 태자성촌(太子城村)이 있고, 서북쪽으로 약 500m 지점에 하래하향(下夾河鄕) 소재지인 강동촌(崗東村)이 있음. 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신빈현, 본계현, 환인현(新賓縣, 本溪縣, 桓仁縣) 세 현이 접경하는 지역으로 신빈(新賓)에서 본계, 관전, 봉성, 환인(本溪, 寬甸, 鳳城, 桓仁)으로 가는 도로가 산 아래를 통과하고 있음.


자연환경을 보면,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천산산맥(千山山脈)의 동북 지맥과 용강(龍崗)산맥의 서남 지맥이 서로 접하고 있는 지대임. 산성은 남북방향의 노모저봉강(老母猪峰崗)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음. 산성과 산맥이 연접된 지점은 낮고 움푹 들어간 산등성이임. 산성의 북쪽에는 태자하의 지류인 북태자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동, 남 양면에는 소래하(小夾河)가 산성을 휘감아 흐르고 있는데, 산성 동북모서리에서 북태자하로 유입되고 있으며, 하천 양안에는 상당히 넓은 하곡평지가 발달함. 산성 남부와 북부는 지세가 개활하고, 동부는 태자하의 하곡지대임. 산성은 산이 연결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지세가 험함. 성 안의 지세는 동·서 양단이 높고, 측면에서 보면 중간이 움푹 들어간 말안장형태와 유사함. 성 가운데 움푹 들어간 지대에서 자세히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세임. 산성 북면은 높이 30~40m의 가파른 비탈이고, 동․남 양면은 높이가 40~80m인 가파르고 험준한 절벽이며, 서면은 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높이 20m의 산비탈임.


 

유물정보

 

기와편(瓦片) 34점, 토기편(土器片) 5점, 돌절구(石臼) 1점


 

참고문헌

 

· 耿鐵華·林至德, 「集安高句麗陶器的初步硏究」『文物』 1984-1, 1984

· 林至德·耿鐵華, 「集安出土的高句麗瓦當及其年代」『考古』 1985-7, 1985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佟達, 「遼寧新賓縣高句麗太子城」『考古』 1992-4, 1992

· 蕫峰, 「東北地區高句麗山城的分類及年代」『博物館研究』 1995-3, 1995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林起煥, 「高句麗前期 山城 硏究」『國史館論叢』 82, 국사편찬위원회, 1998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신빈 태자성 위치도


신빈 태자성 평면도 1


신빈 태자성 평면도 2


 신빈 태자성 성벽 단면도 1

 신빈 태자성 성벽 단면도 2

 신빈 태자성 성벽 단면도 3

 신빈 태자성 성벽 단면도 4

 신빈 태자성 주변 지형도

 신빈 태자성 내성문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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