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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문(高定問)
고구려 부흥운동 (高句麗 復興運動) - 민족문화대백과
한성 이외의 지역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668년 당의 검교동책주도독부(檢校東冊州都督府) 장사(長史)였던 양현기(楊玄基)는 반수령(反首領) 고정문(高定問)을 주살하였다고 한다. 동책주도독부는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에 설치된 안동도호부 예하의 기미부(羈縻府)였다. 고정문은 두만강 유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부여성 - 나무위키
단 고구려 유민인 이타인(李他仁)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타인은 책성욕살(柵城褥薩)[4]의 지위에 있었는데 고구려가 멸망하려 하자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투항하였다고 한다. 약 670~675년 즈음 부여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타인은 반란토벌에 참여해 공을 세운다. 또한 당나라 장수인 양현기(陽玄基)의 묘지명에 따르면 양현기는 고구려 원정에 참여해 668년 동책주(東柵州)도독부 장사(長史)로 임명되었다. 양현기가 직접 동책주의 도독에 임명되지 않은 건 현지 유력자를 도독 같은 장관으로 앉혀 현지인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보좌관으로 당인을 앉혀 실질통치 및 감시를 맡겼던 게 당나라의 이민족 점령지에 대한 통치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현기는 고구려 부흥군의 지도자인 고정문(高定問)을 토벌하고 그를 주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전투에 대한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두 인물 다 동일시기 동일지역에서 활동한 서로 관련깊은 인물들이고 이타인이든 양현기든 이후로는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 멸망 직후 고구려 유민 지도자 고정문이 부여성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으며 그것이 당나라 측의 함락 및 항복 기록이 자주 바뀐 이유로 보인다. 다른 성들의 경우도 비슷했을 거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주
[4] 원문에는 책주도독(柵州都督)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나라쪽에서 기록한 것으로 책주는 고구려의 책성(柵城)에 대응하고 도독은 고구려 지방구획에서 대성의 장관인 욕살에 대응한다. 따라서 고구려 기준으로는 책성욕살이 된다.
고구려 멸망 이후 扶餘城 圈域의 부흥운동 - 김강훈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당의 지배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대응하였다. 부흥운동은 그 중 하나였다. 고구려 고지의 상황은 당 조정의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669년 8월 당 고종의 涼州 순행 시도와 좌절을 전하는 사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부여성 권역에서 상당한 규모로 고구려 유민들이 당의 지배에 저항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는 당 고종의 순행을 반대하는 첫째 이유로 제시될 정도였다.
부여성 권역의 고구려부흥운동은 당의 기미지배에 협력했던 재지유력자들이 재차 당의 지배에서 이탈하면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며,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의 일부도 동참하였다. 부여성 권역의 군사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던 당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당에 귀부한 고구려 유민 李他仁을 파견하였다.
이타인의 군사활동은 일정부분 성과를 거두어 부여성 권역의 부흥운동은 소강 내지 진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렇지만 673년 윤5월 이전에 일어난 벌노성 전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부여성 권역에는 부흥세력이 잔존한 상태였으며, 당시까지 당의 지배가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구려사 명장면 129] 고구려 부흥전쟁 (2) 이타인(李他仁) 대 고정문(高定問) - 매경
어쨌든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기미지배 체제에 의해 동책주 지역에도 지방관은 고구려인이 맡고, 이를 감시·통제하는 자리에는 당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양현기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런데 양현기 묘지명에는 수령 고정문(高定問)이 모반하여 이를 주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고정문은 이타인 투항 이후 책성 지역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고, 고구려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키다가 양현기에 의해 진압당했음을 알려준다.
고정문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정보가 전혀 없어 아쉬울 따름이지만, 앞서 '이타인 묘지명'을 통해 부여 지역에서, '양현기 묘지명'을 통해 책성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중요한 역사상을 전해준다. 즉 고구려 영역 전역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유민묘지명(遺民墓誌銘)을 통해본 당(唐)의 동방정책(東方政策)과 고구려유민(高句麗 遺民)의 동향 - 여호규·바이건싱/배근흥(拜根兴/拜根興)
③-㉣ <양현기묘지명(陽玄基墓誌銘)>40)
龍朔元年(용삭원년)(661년), 隨契苾何力破鴨淥, 授游擊將軍, 左驍衛善信府果毅(수글필하력파압록, 수유격장군, 좌효위선신부과의). 總章元年(총장원년)(668년), 授鹿陵府長上折衝, 仍檢校東柵州都督府長史(수녹릉부장상절충, 잉검교동책주도독부장사). 誅反首領高定問等, 封定陽郡公·食邑二千戶(주반수령고정문등, 봉정양군공·식읍이천호).
* 40) 판독문은 『전당문보유(全唐文補遺)』 8; 권덕영 외, 앞의 책, 2015, 254쪽 참조
한편 <양현기묘지명(陽玄基墓誌銘)>에 따르면 양현기(陽玄基)가 고구려 멸망 이후 검교 책교 동책주도독부 장사(檢校 東柵州都督府 長史)에 임명된 다음 반수령(反首領)인 고정문(高定問) 등을 주살하고, 정양군공·식읍이천호(定陽郡公·食邑二千戶)에 봉해졌다고 한다(사료 ③-㉣).
전술하였듯이 동책주도독부(東柵州都督府)는 두만강 유역의 책성지역에 설치한 당의 기미부로 파악된다. 그런데 동책주도둑부(東柵州都督府)의 장사(長史)에 임명된 양현기(陽玄基)가 반수령(反首領)인 고정문(高定問) 등을 주살했다고 하므로 고정문(高定問) 등은 부흥운동을 전개하다가 당의 관인인 양현기(陽玄基)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반수령(反首領)’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정문(高定問)은 책성지역의 유력자로 추정된다. <양현기묘지명(陽玄基墓誌銘)>을 통해 책성지역에서도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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