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조선 ․ 고구려 ․ 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
2018년 02월 14일 이동훈(목원대학교)
본 연구는 중국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행적을 추적한 논문이다. 본고에서 '遺民'이라는 용어 대신에 디아스포라(Diaspora) 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유민의 본래의 의미가 ‘멸망한 나라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국가가 멸망하기 이전에 중국으로 유입된 이들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에 의하면 ‘디아스포라’는 고유의 족적 정체성과 함께 새로 이주된 지역에 소속감 등 심리적으로 양속적(兩屬的)인 속성을 보인다고 한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고조선, 고구려, 부여계 이주집단은 모두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존재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들을 모두 ‘디아스포라’라고 정의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활약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크게 3~4세기에 이주한 집단과 5~6세기에 이주한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3~4세기에 이주한 디아스포라로는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부여계(夫餘) 계통의 이주민 집단을 들 수 있으며, 5~6세기에 이주한 디아스포라로는 고구려계 집단을 들 수 있다.
고조선계 이주민 집단은 313년과 314년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한 이후 중국의 요서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이다. 대표적으로는 낙랑왕씨(樂浪王氏), 창려한씨(昌黎韓氏), 요동동씨(遼東冬氏)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전연(前燕)의 수도인 극성(棘城) 근처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부여계 이주민 집단은 3세기 말에서 4세기 전반기에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이주한 집단이다. 이들 역시 극성 주위의 라마동이라는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고구려계 이주민 집단 역시 4세기 초에 전연과의 군사적 충돌 결과 발생했는데, 전쟁포로이거나 인질의 신분으로서 합류했다. 고구려계가 전연으로 이주한 직후 거주한 지역에 대해서는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지만, 고조선계와 부여계와 마찬가지로 전연의 초기 수도인 극성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우문선비(宇文鮮卑) 등 주변세력과의 각축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요서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전연 정권은 국가의 발전 전략을 중국 내지의 정권쟁탈에 뛰어들어 이들과 자웅을 겨루는 방향으로 수립하게 되었다. 전연은 당시 중국 북방의 패자였던 후조(後趙)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종국에는 북중국의 동부지역을 제패하면서 전진(前秦)과 동진(東晉) 정권과 천하통일을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전연의 중심지 역시 영역의 확대에 따라 용성(龍城)에서 계(薊), 그리고 업(鄴)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이와 같은 코스를 따라 이동하게 되었다. 다만 고조선계 이주민 집단은 대부분 극성 부근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한 후 선비족(鮮卑族)들은 전진의 국책에 따라 전진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관중(關中)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때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일부도 관중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10여 년 후 전진(前秦) 정권이 몰락하고, 후연(後燕)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후연의 건국을 지지하지만, 여암(餘岩)이 이끄는 일부 부여계 집단은 후연 정권에 합류하는 대신에 부여가 위치한 동북방향으로 이주하다가 요서지역에 머물러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후연과 다투기도 하였다. 또한 후연의 마지막 왕인 고구려계 출신 고운(高雲)의 존재도 확인된다. 이들의 행적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중국으로 이주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각각 고구려와 부여의 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4세기 후반 북위(北魏)가 후연(後燕)을 대신하여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북위는 고구려 이주민 집단을 북위의 초기 수도인 평성(平城)으로 이주시켰다. 평성의 현재 지명인 대동(大同)에는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구려계 인물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들의 성씨는 고씨(高)와 개씨(蓋)인데, 특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개(蓋)씨과 관련된 유적이 다수 발견된 점이 흥미롭다. 또한 고조선계 성씨로는 낙랑 왕씨 인물들이 다수 확인된다. 과거 왕(王)씨와 탁왕(拓王)씨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견해가 있었지만, 연구 결과 탁왕씨는 왕씨에서 유래한 성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에서 북위정권으로 이주하는 인물들이 사료에 다수 확인된다. 원래부터 평양에 토착하고 있었던 왕(王)씨와 한(韓)씨, 그리고 고구려 왕실의 성씨인 고(高)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행적 중 중국에서 확인되는 성씨는 고구려 고씨이다. 고구려 고씨는 북위에서 고관대작을 역임하는데, 대표적으로 북위 선무제(宣武帝)의 모친인 문소황후(文昭皇后)와 그 오빠인 고조(高肇)를 중심으로 한 일족이 확인된다. 그 밖에 북제(北齊)를 건국한 고환(高歡)을 고구려 출신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494년 북위는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하였다. 그에 따라 코리안 디아스포라도 낙양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는 이를 확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천도 이후에도 평성에 그대로 남아 북위의 최전선에서 유연 등 북방민족을 견제하는 군사적 업무에 담당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편 관중(關中)지역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행적이 확인된다. 특히 불교조상기(佛敎造像記)에서 개(蓋)씨의 존재가 확인이 되는데, 과거에는 이를 강족(羌族)으로 파악했으나, 현재는 이를 고구려 계통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힘을 받고 있다. 이들의 관중으로의 이주 시기는 370년대 전진에 의해 전연이 멸망하면서 이주했을 가능성과, 북위가 평성(平城)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중지역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모두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평성에서 개씨 일족의 유적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평성에 거주하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산서성(山西省)에 이웃한 섬서성(陝西省) 즉 관중 지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이 높다.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에서 활약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수백 년 동안 그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이민족정책에서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왕조는 자국에 복속된 유목민족을 분산 해체시키는 대신에, 중국 내지로 이주하여 북방민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그들의 고유의 사회와 풍속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하여 중국 내지로 이주한 이민족들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중국왕조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지만, 고유의 사회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왕조가 이들의 사회조직을 해체시키지 않은 것은 유목민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정책은 한족(漢族)을 대신하여 북방을 장악한 이민족정권에게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부여 이주민 집단 역시 그러한 이유로 중국화되지 않고, 고유의 족적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시기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중국에서 장기간 활동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몇 개의 소집단으로 분리되어 분산 거주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지만, 6세기 관중지역에서 발견된 불상조상기(佛敎造像記)에서 확인되듯이 여전히 해당지역에서 고유의 습속을 유지하면서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기존 연구에서는 고구려 백제 멸망 이후 중국으로 이주한 유민들에 대해서 유민사(遺民史)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하지만 일부 지배층을 제외한 상당수는 오랫동안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발해 멸망 이후 중국에 남아 있던 발해 유민과 원나라에 끌려갔던 고려인, 조선 전기에 한반도에서의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중국으로 이주했던 이주민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중국으로 이주한 이주민 중 상당수는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에 동화되지 않은 채 디아스포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원래의 거주지를 떠난 지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중국의 특정지역에서 여전히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족적(族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집단에 대해서는 유민과는 다른 개념인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한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이국(異國)에 남겨졌던 유민(遺民)의 역사에 집중되었다. 고구려 백제 유민사 연구와 발해 유민사 연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왕조 멸망과는 별개로 평상시에도 소규모의 전란으로 인해, 혹은 정치적 박해나 자연재해를 피해 중국으로 유입된 코리안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 국외 이주는 일시적이고, 소규모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는 누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사가들이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연구자가 개별적으로 전하는 이러한 종류의 기록에 설사 주의를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이주자가 국외로 이주할 당시 원래의 조국이었던 해당 왕조가 아직도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민(遺民)으로 지칭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또 각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틀이 없었기 때문에 연구에 나서기에는 저어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고대사에 적용함으로써 개별적이고 단편적인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로 묶어서 연구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졌다. 본 연구 방법은 역사가들의 눈에 중요시되지 않았던 이러한 단편적인 사례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성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시기적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되었던 기존 연구를 위진남북조시기까지 소급함으로써 관련 연구를 더욱 선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중국 내에 남아 있던 유민들의 역사도 언젠가는 중국에 동화되어 버리고 마는 ‘유민사(遺民史)’가 아닌, 국가가 망했어도 민족의 혼은 살아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시각으로 새롭게 접근함으로써 민족사의 지평을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코리안’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하게 할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역사무대가 한반도로 축소된 ‘국가사(國家史)’와는 별개로, ‘민족사(民族史)’적 관점에서 민족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국사의 범위를 동북지역 및 중국 전체로 확대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본 연구는 한중간의 역사전쟁인 동북공정과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가 되고 있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반박하는 유력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지하듯이 고구려 역사의 귀속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사항 중의 하나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거취문제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에 동화됨으로써 고구려사 는 결국 중국사에 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대 후기 절도사로 활약한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고구려 유민의 중국으로의 동화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진남북조시기에 중국으로 이주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역사 귀속문제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실증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본 연구는 중국으로 이주한 고구려 부여 등 우리의 선조들이 한족에 동화되었고, 결국 현재의 중화민족을 형성했다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부정하는 역사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본 연구 이후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면 통일적다민족국가론뿐만 아니라 향후 추진될 중국의 역사왜곡 등 관련 사실에 대한 학술적인 대응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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