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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간

 

 

고문간 (高文簡) - 민족문화대백과
집필자 : 노태돈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때, 고구려 멸망 후 몽고고원의 돌궐로 이주한 유민.
주요 관직 : 좌위대장군 요서군왕(左衛大將軍遼西郡王)
 
정의
 
삼국시대 때, 고구려 멸망 후 몽고고원의 돌궐로 이주한 유민.
 
내용
 
몽고지역으로 이주해간 고구려 유민들은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돌궐의 가한(可汗)에 예속되어 생활하였다. 그 가운데 고문간 집단이 가장 컸던 것 같다.
 
그는 묵철가한(默啜可汗)의 사위가 되었으며, ‘고려왕 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 칭하여 졌다. 8세기 초 돌궐에 대한 당나라의 공세가 적극화되고, 묵철가한(카파간 카안)의 횡포에 대한 반란이 내부에서 일어나 돌궐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고구려 유민인 고공의(高拱毅)집단과 돌궐족의 욱사시부(郁射施部), 토욕혼(吐谷渾)의 모용도노(慕容道奴)집단 등과 함께 715년 오르도스지역으로 이동하여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나라 현종은 그를 좌위대장군 요서군왕(左衛大將軍遼西郡王)으로 봉하였으며, 719년 그의 처 아사나씨(阿史那氏)를 요서군부인(遼西郡夫人)으로 봉하였다. 그뒤 그는 계속 당나라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고문간(高文簡) - 나무위키
 
1. 개요 
 
고구려 유민 집단의 우두머리.
 
2. 일생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몽골 지역으로 이동하였던 고구려 유민 집단의 우두머리들 중 하나였는데, 고문간이 이끌던 유민 집단은 당시 몽골에서 세력이 컸던 돌궐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유민들의 우두머리 중에서도 제법 세력이 컸던 모양인지 당시 돌궐의 가한이었던 카파간 카안(묵철가한)의 사위가 되었으며,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8세기 초에 돌궐은 외부로는 당나라의 침입에, 내부로는 잦은 반란으로 인한 분열과 권력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1] 결국 고문간은 이대로 돌궐에 의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715년에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현종은 투항해온 고문간을 좌위대장군 요서군왕(左衛大將軍遼西郡王)으로 봉하였으며, 719년에는 고문간의 아내인 아사나씨(阿史那氏)를 요서군부인(遼西郡夫人)으로 봉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서 고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벼슬도 받고 좋은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계속 당나라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 평가
 
고구려 유민들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며 나름대로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는 점은 훗날에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와도 흡사하다. 그러나 한창 당나라가 쇠약해지던 시기에 일어나서 당나라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던 이정기와 비교하자면 다른 점도 많은 인물.
 
고문간이 활동하던 시기는 여전히 당나라가 강력한 국력을 떨치던 시기였던 데다가 고문간이 의탁하던 돌궐은 이래저래 고난을 겪던 시기였다.[2] 돌궐을 버리고 당나라로 투항했던 것은 고문간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1] 묵철가한도 잦은 내부반란을 진압하던 도중 716년에 어이없게 살해당했다.
[2] 비슷한 시기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의 종제 실활도 돌궐을 버리고 당나라로 투항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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