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백제유민(百濟遺民) 지문구성(誌文構成)과 찬서자(撰書者)
한국고대사연구
2014, vol., no.76, pp. 241-295 (55 pages)
발행기관 : 한국고대사학회
이동훈 목원대학교
* 지문(誌文) : 죽은 사람의 이름과 나고 죽은 날과 행적과 무덤이 있는 곳과 좌향 따위를 적은 글
고구려 백제 유민 묘지명은 현재까지 30개 이상이 발견되었다. 묘지명을 통하여 고구려 백제 말기의 관직제도와 정치상을 파악할 수 있고, 멸망 후의 유민의 동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묘지명에 대한 연구가 최근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회(李懷) 묘지명(墓誌銘) 같은 경우는 고구려유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고구려유민묘지명으로 간주되는 등 해석상 오류도 적지 않다.
고구려 백제 유민은 묘주나 그 조상이 고구려 백제 출신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 출신으로 기재된 경우가 적지 않다. 고구려 왕족 출신이 당시 중국의 명문사족인 발해고씨(渤海高氏)로 자칭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씨(高氏)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출신의 유민들은 상당수가 그 조상의 출자에 대하여 조작하였다. 심지어 두선부(豆善富)의 경우는 그 출신을 두씨(豆氏)와 발음이 같은 두씨(竇氏)에 의탁하여 자신의 출계를 조작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백제 유민이 보편적으로 그들의 출자를 조작한 것은 당시 문벌을 숭상하였던 중국 사회에 이민족 출신으로서 적응하기 위한 생존 방법 중의 하나였다.
* 출자(出自) : 출신
한편 백제유민 예씨(禰氏) 가족 묘지명은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조상의 출자가 백제에서 중국으로 변해가는 전모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예씨(禰氏) 가족의 출자가 중국으로 변개된 것은 독특하게 운영되었던 백제의 관직제도가 먼저 그 빌미를 제공하였다. 백제는 자국의 독자적인 관직 이외에도 중국식 관직을 함께 운영하였다. 동성왕 이후 자국의 관리들에게 중국식 관직을 먼저 하사한 후에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이 사여한 중국식 관직을 승인받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예씨 일족은 이러한 백제의 관직제도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묘지명에 기록된 백제가 수여한 중국식 관직을 토대로 하여 예씨(禰氏) 조상이 중국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 변개 : 다르게 바꾸어 새롭게 고침
* 사여 : 개인적으로 줌. 사사로이 몰래 줌.
고구려 백제 유민 묘지명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휘(諱)와 자(字)가 모두 표기되었던 중국의 비문과는 달리 휘(諱)와 자(字)가 동일하거나 휘(諱)만 표기된 경우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를 통하여 중국과는 달리 성씨문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고구려 백제가 원래는 이름만 불렀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유민 1세대의 경우는 당(唐)나라에 투항한 시기와 동기에 대하여 서술하는 경우가 다수 나타나고 있다. 비문은 고국을 배반하고 적국에 투항한 그들의 행위를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군자다운 행동으로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백제 유민의 본국에서의 관작(官爵)이나 지명(地名)이 중국적 관점으로 재해석되고, 중국식 관작명이나 지명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다수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에게 낯선 욕살(褥薩) 같은 고유의 관직명은 대수령(大首領)으로 대체되어 표현되었다. 이것은 묘지명 작성이 당시 사람들이나 후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휘(諱) : 본명 / 자(字) : 성인식 후 지은 이름
묘지명은 공적으로 작성된 것과 사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묘비를 건립할 수 있는 사람은 법적으로 서민이 아닌 관료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묘비 건립과 비문 작성 과정에는 어느 정도 정부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대 묘지명 작성자는 초기에는 사관(史官)이 주로 담당하였지만 후기에는 문학(文學)을 담당하던 관리인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전담하였다. 고구려 백제 유민 묘지명은 현재까지 8개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작성자의 신분이 묘지명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일지라도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국가에서 지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6개의 묘지명의 경우는 사관이나 한림학사 등 담당 관리가 묘지명을 작성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편 묘지명의 작성자가 드러나 있지 않거나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등을 국가가 지원하지 않는 다른 묘지명의 경우는 대부분 사적으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에서 최종적으로 추인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쳤겠지만, 비문의 작성은 개인의 행장(行狀)에 기초하여 작성된 자료를 토대로 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 비문의 작성자는 묘주(墓主)와 관련 있는 벗이나 친인척이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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