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nh/view.do?levelId=nh_004_0040_0030_0010_0020

 

(2) 지방통치조직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1)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부여는 2천 리에 걸치는 방대한 영토를 동·서·남·북의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 지역들을 ‘가’들이 관할하였으며, 중앙은 국왕이 직접 통치하였다.
 
부여에서는 전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온 나라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지방에는 ‘사출도(四出道)’가 있었다. 사출도라는 말은 단순히 지방을 네 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했다는 의미보다는, 고구려의 5나부(五那部)처럼 수도를 중심으로 대체로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을 나눈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도(道)는 교통로 또는 그 교통로상에 위치하는 지역을 뜻한다.573) 따라서 사출도는 왕도로부터 사방에 통하는 길로서 고대국가의 지방지배의 기본이 되는 도로와 그 주변 읍락을 의미하는 말이며574) 완비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출도는 제가(諸加)에 의해 관할되었다. 제가는 중앙 관계인 마가·우가·구가·저가로만 한정하여 보는 견해575)가 있으나, 여기서의 제가는 이를 포함한 부족장 전체를 의미하는 범칭으로 생각된다. 이들 제가들은 당시에는 ‘압로(鴨盧)’라고 불렸던 것 같다.<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가 부여를 쳤다는 기사 뒤에 광개토왕을 따라서 고구려로 간 자들로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가 나온다. 여기서 미구루·비사마 등 압로 앞에 붙은 명칭은 부여에 있던 특정 지역집단이나 부족의 거주지일 것이다. 따라서 지명 뒤에 표기된 압로는 ‘부족집단’을 의미하는 표현이거나 또는 이른바 사출도를 관할하는 ‘가’나 ‘간(干)’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능비문에서는 부여성과 압로를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실체가 다른 것으로서 부여의 수도를 부여성이라 불렀고,576) 압로는 일정지역의 가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7) 이 집단들은 국가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자 독자적으로 지역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는 부여사회의 지방세력이 중앙에 대해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 부족은 지방세력을 인정하고 이와 연맹하여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5개 지역으로 구분된 지역집단 밑에는 읍락(邑落)들이 있었다. 각 지방의 읍락들은 성책(城柵)으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그 성책이 아주 높고 견고하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그것을 감옥과 같다고 하였다.578) 이러한 읍락의 구체적인 유적이 최근 길림시 교외의 자오허/교화현 츠쉐이/지수향 신지에/신가고성지(蛟河县/縣 池水乡/鄕 新街古城址)와 쑹장/송강촌 푸라이동/복래동(松江/松江村 福來东/福來東)고성지에서 발견되었다.579) 신가·복래동 두 고성은 평지에서 높이 솟아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홍갈색의 굽접시·시루 등이 많이 나왔고, 성의 평면은 원각방형(圓角方形) 즉 원형에 가깝다.580) 이러한 사실은≪삼국지≫부여조의 “(부여는) 먹고 마시는데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성책은 모두 둥근데 마치 뇌옥(牢獄)과 같다”는 기사와 부합한다. 또한 서한(西漢)∼양진(兩晋)시대에 제2송화강유역은 부여의 영역으로 현재의 교하현 지수향과 송강촌은 부여국의 세력범위에 포함되어 있던 곳이다. 그리고 최근 동단산 남성자(南城子)를 부여의 왕성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을 따른다면,581) 신가·복래동 두 성지는 부여의 읍락유적이 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가고성은 주위 둘레가 200m(약 184m) 정도로 작은 범위 안에 읍락 지배를 위한 건물들이 있어 주로 각 읍락의 대표나 호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두 고성은 모두 자오허/교하(蛟河)의 서안에 있으며 남북으로 서로 9㎞ 떨어져 있다. 두 성이 떨어져 있는 거리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점은 부여 읍락의 존재양태와 관련하여 좀더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 조두(俎豆) : 제사(祭祀) 때, 신 앞에 놓는 나무로 만든 그릇의 한 가지.
* 뇌옥(牢獄) :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
* 호민 : 부유한 평민
 
이처럼 읍락은 부여연맹체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집단이었다. 그러나 이 읍락은 곧바로 중앙권력에 의해 파악되는 지방지배 단위는 아니었다. 중앙에서는≪삼국지≫부여조에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방위에 따라 크게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한 일종의 국읍인 사출도를 두어 제가가 담당하게 하여 지방을 총괄하였던 것이다.≪삼국지≫동이전 선비조(鮮卑條)에는 “(선비는) 우북평(右北平) 이동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부여와 예맥의 20여 읍과 접하여 동부를 이루었다”582)라고 하였다. 여기서 읍락은 아마도≪삼국지≫위서 동이전 한(韓)조에 나오는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것으로,<광개토왕릉비>의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등의 ‘△△△압로’에서 ‘△△△’에 대응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부여의 중앙에서 지방을 파악하는 통치단위였다고 할 수 있다. 사출도연맹체제 내에서는 부여왕권이 각 국읍 내에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하였겠지만, 아직 제가들의 자치적 성격이 온존되는 상태였으므로 각 국읍 내의 단위집단(읍락)에까지는 중앙권력이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림 8>신가고성지(新街古城址) 평면도와 채집유물 ①
1. 주성(主城), 2. 위성(衛城).

 


<그림 8>신가고성지(新街古城址) 평면도와 채집유물 ②
1. 석부(石斧), 2. 도기이(陶器耳), 3. 방격문도편(方格紋陶片), 4. 도기구연(陶器口緣), 5. 교상이(橋狀耳), 6. 도증저(陶甑底), 7. 도두주(陶豆柱).
 
* 석부(石斧) : 돌도끼
* 도기이(陶器耳) : 도기 손잡이
* 방격문(方格紋) : 바둑판과 같이 가로와 세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 교차하는 모양의 무늬
* 도기구연(陶器口緣) : 도기 입구 부분
* 교상이(橋狀耳) : 다리모양의 손잡이
* 도증저(陶甑底) : 시루 바닥
* 도두주(陶豆柱) : 굽이 높은 다리가 달린 접시 모양의 그릇의 기둥
 
이처럼 부여의 연맹체제에 의한 지방통치는 지역 단위집단인 읍락집단을 일원적으로 통제할 만큼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지수장층인 제가(諸加)의 자치력을 인정하는 가운데,583) 이들을 통한 간접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부여는 왕위의 부자상속 및 한과의 교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강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제가세력들을 통제·감시하는 지배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재지수장층 : 지역 지배층
 
부여의 지방지배 및 정복지역의 통치방식은 한대(漢代) 이래 부여에 예속되어 있던 읍루족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삼국지≫동이전 읍루조에는 읍루인들이 “한 이래로 부여에 신속(臣屬)하였는데 부여가 그 조부(租賦)를 과중하게 부과하자 그에 반발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부여의 읍루에 대한 지배는≪삼국지≫의 기록처럼 읍락별로 복속시켜 그 족장(族長)을 통하여 공납을 징수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속민(屬民)-공납(貢納)에 의한 지배체제로 보기도 하는데,584) 이 체제는 각 읍락사회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이들을 종족적으로 묶어서 동옥저부락·읍루부락 등으로 집단적으로 파악하여 공납을 받는 지배방식이다. 대체로 부여의 정복지역에 대한 통제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믿어지며, 따라서 정복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하호(下戶)계층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공납지배는 매우 가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읍루가 위(魏)의 황초(黃初)연간(220∼225)에 공납징수가 가혹함에 저항하여 그 지배에서 이탈하였다는 사실에서585) 이를 잘 알 수 있다.
* 조부(租賦) : 세금
* 하호(下戶) : 전근대기에 촌락을 구성하던 농민층. 피지배민.일반민
 
 
 
573)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모두루일족과 고구려왕권(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조선학보(朝鮮學報)≫99·100, 1981), 160쪽.
574) 김철준(金哲埈), 앞의 책(1976), 63쪽.
575) 이병도(李丙燾), 앞의 글, 212쪽.
 
576)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신라(新羅)의 수도를 신라성(新羅城)이라 한 것으로 보아 부여(夫餘)의 수도도 부여성(扶餘城)이라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577) 압로(鴨盧)는 동부여(東扶餘)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貴族)과 같은 존재를 나타내는 ‘가(加)’나 ‘간(干)’과 같은 의미를 지닌 칭호(稱號)로 보기도 하고(박시형,≪광개토왕릉비≫, 1966, 207쪽), 혹은 이동가능한 취락(聚落)으로 보기도 한다(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고구려역사와 동아시아(高句麗史と東アジア)≫,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 1989, 65쪽). 혹자는 막연히 성(城) 또는 관명(官名)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천관우/千寬宇,<광개토왕릉비재론(廣開土王陵碑再論)>,≪김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압로 앞에 지역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가(諸加)집단이나 귀족의 칭호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
 
578) ≪삼국지(三國志)≫권 30, 위서(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30, 부여(夫餘).
 
579) 동쉐정/동학증(董学增/董學增),<길림교하현신가·동래동고성지고(吉林蛟河縣新街·福來東古城考)>(≪박물관연구(博物館硏究)≫2기(期), 1989), 69∼72쪽.
 
580) 두 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부여 도성(都城)의 한 유적인 길림시 모아산(帽兒山) 한대(漢代) 목곽묘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토기의 바탕과 기형(器形)이 한대 유물의 바탕·기형과 다르기 때문에 부여 유물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마더첸/马德謙/馬德謙/마덕겸,<담담길림용담산동단산일대적한대유물(談談吉林龍潭山東團山一帶的漢代遺物)>,≪북방문물(北方文物)≫2기(期), 1991).
 
581) 우궈쉰(无国勋/武國勳/무국훈),<부여왕성신탐(夫餘王城新探)>(≪흑룡강문문총간(黑龍江文物叢刊)≫4기(期), 1983).
 
582) ≪삼국지(三國志)≫권 30, 위서(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30, 선비(鮮卑).
583) ≪후한서(後漢書)≫권 85, 열전(列傳) 75, 동이 부여국(東夷 夫餘國).
584) 임기환(林起煥), 앞의 책, 138쪽.
585) ≪삼국지(三國志)≫권 30, 위서(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30, 읍루(挹婁).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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