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861832
500억 물어내라고? 죽음 부르는 유령 또 나왔다
[넥스트브릿지] 사용자의 '절대 반지' 노동자에 대한 손배가압류
사회 박영기(onekorea) 22.09.05 21:59ㅣ최종 업데이트 22.09.05 21:59
정책네트워크 넥스트 브릿지(Next Bridge)는 지식경제, 기후, 디지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등 전환의 시대를 직면하여 비전과 정책과제를 연구하는 포스트 386 세대(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서 90년대생 청년) 중심의 연구자·정책 전문가의 네트워크다. 넥스트 브릿지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사회 지향과 정책과제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이 가능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정책담론을 위한 대중적인 소통을 희망하며 다양한 분야의 정책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의 정책과제를 가지고 매주 정책 칼럼을 연재한다. [편집자말]
▲ 지난 7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고소, 손배 탄압 중단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촛불혁명 이후 한동안 잠잠해지는 듯했던, 손배가압류라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부르는 유령이 다시 출몰하고 있다. 아마도 '법과 원칙'만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이 계기가 된 듯하다.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사실상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대우조선해양이 그 첫 깃발을 드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 8월 21일 열린 이사회에서 하청노조인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우조선해양이 노조에 청구하는 손배소송 청구 금액은 500억 원으로 알려졌다.
손배가압류라는 유령이 한국 사회에 등장한 지 어느덧 20여 년이 됐다. 2003년 두산중공업 배달호 노동자의 죽음이 있었다. 직접적 사인은 '분신자살'이었으나 진짜 죽음의 이유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손배가압류'에 따른 기업 살인이었다. 그 후로도 많은 노동자의 죽음이 이어졌다.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유성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손배가압류와 노동 탄압에 따른 죽음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손배가압류 금액이 처음으로 1000억 원을 넘어선 이명박 정부로 시작해,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7년 상반기 손배가압류 상황은 24개 사업장 65건, 누적 청구 금액 1867억 원, 가압류 금액 180억 원에 이르렀다. 일부 강성 사업주와 컨설팅회사가 주도하여, 주로 강성노조인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대상으로 시작된 손배가압류는 노동조합 와해와 탄압의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손배가압류를 넘어 명예훼손, 모욕 등 정신적 피해에 대한 사용자의 소송제기가 급격히 늘어나기도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같은 뿌리인 보수정당 국민의힘 윤석열 정부 또한 반노동·친기업 정책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손배가압류가 합법적인 노동자 탄압의 도구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불법파업 손해배상 책임은 '부진정 연대채무'이다. 다시 말해, 대우조선해양이 노조에 청구하는 손배소송 청구 금액에 대입해볼 경우 이 500억 원을 노조가 갚든 조합원 중에 누구 하나가 갚든 아니면 공동으로 갚든, 조합원 개개인에게 선택적으로 변제 책임을 지울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노조와 조합원이 500억 원을 갚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회사는 먼저 노동조합의 재산과 조합원들의 임금과 재산에 대한 가압류 소송을 진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회사는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맘대로 길들일 수 있는 전가의 보도를 지니게 된다.
합법적 노조 탄압 도구
노동조합에 제기된 손배가압류 소송 중 '조건부 소 취하'로 종결된 사안의 소 취하 조건을 살펴보면 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 목적이 단지 손해에 대한 '배상'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6월 30일 국회에서 개최된 '소송기록을 통해 본 손배가압류제도 토론회' 자료에 따르면 사용자가 소 취하 조건으로 제시한 요구 조건들은 희망퇴직(11건), 노조탈퇴(5건),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 포기(17건), 반성문 제출(2건) 등이다.
파업 등 쟁의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임에도, 회사는 쟁의행위 기간 발생한 손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산정한 손해배상 금액을 청구함으로써 노동자를 정신적으로 압박 위축시키고, 동시에 노동조합 탈퇴 또는 희망퇴직의 종용, 노동자 지위확인 소송의 취하 등의 2차 노동 탄압을 벌이면서 사실상 부당노동행위의 합법적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손배가압류 금액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개인에 대해서는 생존 자체를 위협할 만큼의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 금액이지만 기업과 사업주 입장에서는 쟁의 이후 노동자들의 초과근로를 통해서 그리고 생산성 향상을 통해 손배가압류 금액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는 경우가 태반이므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하다.
노동자들은 부풀려진 과도한 손배가압류 금액과 긴 소송 과정에서 비롯된 급격히 늘어나는 소송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됨으로써 결국 중도에 소송을 포기하거나 사용자의 요구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손배가압류라는 절대 반지는 사용자가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노조와 조합원이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됨으로써 더 이상 타협 없는 극단적 대립과 투쟁의 상징물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노사 상생이나 산업평화와는 거리가 먼 최악의 선택지가 된다.
손배가압류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 법원과 국회, 정부의 노력이 중요하다. 먼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의 노동3권을 대하는 태도가 변해야 한다.
법원은 사유재산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기업과 사용자의 편이 되어왔다는 게 노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현행법상 파업이 합법 파업으로서 손배가압류 등 법적 책임이 면책되기 위해서는 주체·목적·절차·수단에 있어서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문제는 법원으로부터 이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파업이라는 게 본디 자유시장주의 측면에서 볼 때 불법성을 띠고 있음이 다분한데 이를 합법 파업이라는 틀에 맞추려는 시도 자체가 쉬울 리 없다. 사법부는 파업의 위법·불법성을 따지기 전에 파괴 또는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단순 노무수령 거부의 쟁의행위는 사용자가 수인할 의무가 있고, 노동자의 그런 권리는 헌법 제33조가 부여한 기본권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지난 5월에 있었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 파업의 업무방해 형사처벌 위헌심판에서 헌법재판소 재판관(5명) 다수의 의견이 좋은 예다. 비록 위헌결정 정족수에 1명의 재판관이 부족하여 합헌 결정되었으나 인권의 최후 보루인 대법원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를 촉구한다.
국회와 정부의 적극적 해결 의지 필요
▲ 지난 8월 22일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노란봉투법 봉투를 들어 보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국회는 일명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 노조법 개정은 정당한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히고 노동자 개인에게 손배 청구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손배가압류 제한을 통한 노동기본권 보호, 임원이나 조합원 등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 청구 금지, 신원보증인에 대한 손해배상 금지, 노조 규모에 따른 손해배상 상한액 제한, 손해배상액 경감의 구체적 '사유'와 '기준' 제시 등이 담길 필요가 있다. 특히 야당이지만 법률 통과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다수당인 민주당의 책임이 클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대우조선해양과 하청업체노조 간 벌어지고 있는 손배가압류 문제는 윤석열 정부가 풀 수 있는 과제다. 대우조선해양이 하청업체노조에 청구하고자 하는 손배가압류 금액은 단일 사건으로 최대인 500억 원에 이른다.
손배 소송은 굳이 이사회 의결이 필요치 않으나 굳이 이사회에 보고했다는 것은 대우조선해양 측이 이 문제해결에 있어 윤석열 정부와 검찰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혹시 모를 배임죄 등 법률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모면책일 가능성이 있다.
필요하다면 법무부, 검찰, 감사원, 고용노동부가 정부 합동으로 대우조선해양 손배가압류 문제해결에 나설 필요가 있다. 그간 수많은 열사가 발생했듯 손배가압류 문제는 폭발성이 높은 예민한 문제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다.
* 필자 소개: 박영기.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는 성남 사람이다. 노동조합 활동가로,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을 역임한 공인노무사로, 노동자와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뛰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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