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tapa.org/article/evRMG
'이태원 참사' 혼란 키운 윤석열 정부의 '근조 없는 검은 리본' 지시
홍여진 2022년 11월 08일 18시 20분
⬤ 인사혁신처, 참사 직후 ‘글자 없는 검은 리본 패용’ 전 공무원에 지시
⬤ 근조 리본 판매자들 “‘근조’ 글자 없는 리본 거의 판매한 적 없다”
⬤ 전국 지자체·공공기관, 근조 리본 거꾸로 달거나 급하게 제작 의뢰
⬤ 일부 방송사 앵커들도 ‘글자 없는 리본’...방송사들 “자발적 결정”해명
이태원 참사 직후 윤석열 정부가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을 지정하면서 전국 지자체와 공공기관 등에 내린 ‘근조(謹弔) 글자 없는 검은 리본' 패용 지시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추모 리본 착용 지시에 전국의 공무원들이 기존의 근조(謹弔) 리본을 거꾸로 달거나, 기성품을 못 구해 리본 제작을 의뢰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태원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이름 붙인 윤석열 정부가 근조 리본의 ‘근조’라는 글자를 지우며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사처의 ‘글자 없는 검은 리본’ 패용 안내 논란
정부가 전국의 공무원에게 검은 리본 패용을 처음 지시한 건 이태원 참사 다음 날인 10월 30일이다. 이날 오후 12시 한덕수 국무총리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 결과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11월 5일 24시까지를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해 사망자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로 했으며, 서울 시내에 합동 분향소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애도 기간에는 전 공공기관과 재외공관에서 조기를 게양하고, 공무원 및 공공기관 직원들은 애도를 표하는 리본을 패용하기로 했습니다."
- 한덕수 국무총리 (중대본 브리핑 발표, 10.30)
이날 중대본 브리핑에 나온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방문규 국무조정실장,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가슴에는 똑같이 '근조'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한 총리의 브리핑 이후인 오후 2시 58분경 인사혁신처는 ‘이태원 사고 계기 공무원 기강확립 관련 국무총리 지시사항 전달’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전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에 발송했다. 이 공문을 통해 '국가 애도기간 중 애도를 표하는 검은색 리본 패용'이라는 한 총리의 지시사항을 전달하며 “전국의 공공기관 및 산하기관에 전파해 주지시키라”고 안내했다. 이때는 검은 리본에 ‘근조’라는 글자의 유무를 따로 정해서 안내하지는 않았다.
▲지난 10월 30일 인사혁신처가 ‘이태원 사고 계기 공무원 기강확립 관련 국무총리 지시사항 전달’이라며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에 보낸 공문. ‘국가애도기간 중 애도를 표하는 검은색 리본 패용’을 지시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5시간 뒤인 오후 8시경 인사혁신처는 ‘국무총리 지시사항 관련 추가 안내’라는 업무 연락을 중앙행정기관 복무담당자에게 다시 보냈다. 여기에는 "국가애도기간 중 애도를 표하는 검은색 리본 패용과 관련해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을 착용해 주시길 바란다"는 구체적인 지침이 담겼다.
그러면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이날 중대본 브리핑에서 글자 없는 리본을 패용한 모습을 참고 사진으로 보냈다. 왜 글자 없는 검은 리본으로 패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았다.
▲10월 30일 인사혁신처가 행정안전부 등 중앙행정기관에 추가로 보낸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 관련 업무 연락
인사혁신처의 업무 연락에 따라 행정안전부 지방인사제도과는 교육부와 전국 지자체에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패용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인사혁신처로부터 받은 사진도 공문에 덧붙였다. 다른 정부 부처들도 각 부처 산하기관에 같은 공문을 발송했다.
▲행정안전부 지방인사제도과에서 교육부와 전국 지자체에 발송한 공문의 참고 자료 사진. 10월 30일 오후 12시 중대본 회의 결과 브리핑 장면이다. 왼쪽부터 방문규 국무조정실장,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모두 '근조'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달고 있다.
인사혁신처 “실무적 어려움 고려한 안내”... 현장선 “글자 없는 리본 찾는 게 더 어려워”
이런 정부 지침이 하달되자 전국의 지자체와 공공기관, 공기업 직원들이 일제히 ‘근조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달았다. SNS에선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은 처음 본다는 반응이 나왔고, 엉뚱한 정부 지침을 비판하는 언론 보도도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가 국가애도기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검은 리본 패용 지침을 내리면서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한 것이다. 국가애도기간이 처음으로 선포된 2010년 천안함 사건 때도 정부가 모든 공무원에게 근조 리본 패용을 지시한 적은 있지만, 리본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안내하지는 않았다.
글자 없는 검은 리본 지침을 두고 논란이 일자 인사혁신처는 6일 설명자료를 내고 이렇게 해명했다.
“리본의 규격 등과 관련해 휴일 리본 준비를 위한 실무적인 문의가 있는 상황에서 휴일부터 당장 리본을 착용해야 하는 현장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인사혁신처 내부 논의를 통해 추가 안내한 것입니다.”
인사혁신처 설명자료 (2022. 11. 6.)
즉, 인사혁신처는 참사가 발생한 시점이 휴일인 점을 고려해 근조 리본을 조금 더 쉽게 구하게 하기 위해 글자 없는 단순한 형식의 검은 리본으로 방침을 정해 안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 공무원들은 인사혁신처의 설명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시중에서는 '근조'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을 구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다. 뉴스타파가 무작위로 10여 곳의 지자체와 공공기관, 공기업 등에 확인한 결과 모두 이번 정부 지침에 따라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단체로 구매했다. 이 과정에서 ‘근조’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을 찾지 못한 공무원들은 기존의 근조 리본을 거꾸로 달거나, 급하게 제작을 의뢰해서 착용하기도 했다.
이번 참사 이후 근조 리본을 구매한 소방청 119 상황실 관계자는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찾지 못해 기존의 근조 리본을 구매한 뒤 뒤집어 달았다"고 말했다. 한 지역 교육청의 물품 구입 담당자도 “글자 없는 리본이 없어 근처 현수막 업체에 의뢰해 제작해서 착용했다”고 전했다.
▲뉴스타파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한 소방청 119상황실의 근조 리본 구매 결과 사진. 소방청 119 상황실은 글자가 없는 검은색 리본을 구하지 못해 일반적인 근조 리본을 구입해 뒤집어 달았다.
근조 리본 판매업체들 “근조 글자 없는 검은 리본 판매한 적 없다”
근조 리본을 판매해 온 업체들도 정부 지침을 의아해했다. 뉴스타파가 현재 근조 리본을 판매하고 있는 다수의 업체에 문의한 결과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은 거의 판매해 본 적이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15년간 근조 리본을 판매해 왔다는 한 온라인 업체 대표는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근조’라는 글자가 있어야 정상인 거죠. 지금껏 글자가 없는 리본은 듣지도 보지도 못해서 정부 지침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도를 표할 거면 근조든, 조의든 뜻이 담겨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애도의 뜻으로 리본을 패용한다면서 근조라는 글자를 뺀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근조 리본을 판매하는 A 업체 관계자
이 업체 대표는 공무원들로부터 검은 리본을 대량 주문 받은 뒤, 일반적인 근조 리본을 뒤집어 다는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지난 일요일(30) 하루 만에 1만 8천 장의 근조 리본이 나갔습니다. 글자가 없는 리본이 없는데, 공공기관에서 글자 없는 리본들을 찾길래 기존의 근조 리본을 뒤집어 달라고 알려줬죠.”
근조 리본을 판매하는 A 업체 관계자
20년간 근조 리본을 판매했다는 다른 장례용품 업체 대표의 답변도 같았다.
“여태까지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판매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1년에 한 분 정도 물어보시는 경우는 있었는데 실제 판매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근조'라는 글자가 없는 리본을 대량으로 주문 받아 판매한 건 처음이에요.”
근조 리본을 판매하는 B 업체 관계자
“애도의 뜻이 담긴 글자를 빼고 애도를?” 진정성 의심 비판
그렇다면 공무원들로부터 리본 규격에 대한 문의를 받고 ‘글자 없는 검은 리본’으로 정했다는 인사혁신처의 설명은 사실일까. 누가, 왜 통상 판매되는 근조 리본이 아닌 글자가 없는 리본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을 낸 것일까.
이에 대해 인사혁신처 대변인실은 “기록으로 관리하고 있지 않아 담당자를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어려우나 행정안전부, 국무조정실, 식약처, 국방부 등 여러 기관으로부터 문의가 있었다”고 답했다. ‘근조’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이 실무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판단은 누가 내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인사혁신처 내부 논의를 통한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인사혁신처 대변인실은 또 “글자 없는 리본으로 안내를 하긴 했지만, 검은색 리본의 패용 목적이 추도와 애도에 있는 만큼 그 규격과 형식 등에 관계 없이 착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정부가 내려보낸 조치사항은 ‘권고’에 불과할 뿐 공무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강제 사항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사혁신처가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패용한 사진을 참고로 안내하면서, 형식에 관계없이 리본을 착용할 수 있다고 해명한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지자체의 물품 담당 공무원은 "정부에서 글자 없는 검은 리본 예시 사진까지 보내왔기 때문에 당연히 같은 리본으로 구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역 교육청 소속의 공무원은 “근조 글자가 없는 리본을 본 적도 없는 데다, 추모 리본의 형태를 정부가 통일시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긴 했다"면서도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 인사혁신처에 반문하진 못했다. 꺼림직하긴 했지만 정부가 구체적인 지침을 내렸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 그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정보공개 포털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지역 교육청의 검은 리본 구매 목록. 인사혁신처는 규격과 형식에 관계없이 리본을 착용할 수 있다고 뒤늦게 설명했지만, 정부 기관들은 인사혁신처 지침대로 글자 없는 리본을 구매하거나 근조 리본을 구입해 거꾸로 달았다.
이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추모 리본 패용 지시에 정부가 말한 애도의 진의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행정안전부의 한 공무원은 "이태원 '참사' 대신 '사고'라는 중립적 용어를 강조하는 정부 태도에 비춰봤을 때 검은 리본에 '근조'라는 글자가 명확하게 쓰여 있으면 참사의 의미를 더욱 키우거나, 국가 분위기가 너무 엄숙해진다고 생각해서 내린 지침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며 "애도를 할 거면 명확히 글자가 적힌 리본을 다는 게 맞을 텐데,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지침을 정한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태원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현하라는 것에 이어 ‘근조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 착용’은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번 지침에 한덕수 총리와 이상민 장관의 직접 지시가 있었는지 반드시 따져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KBS·SBS·YTN 앵커도 글자 없는 검은 리본 패용…“자발적 결정” 해명
정부의 검은 리본 지침이 논란이 되면서 일부 방송사 진행자들이 패용한 검은 리본도 도마 위에 올랐다. 언론사가 엉뚱한 정부 지침을 그대로 따라서 글자 없는 리본을 패용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SNS상에는 각 방송사 뉴스 앵커들이 검은 리본을 착용한 장면을 캡쳐해 비교하는 게시글이 공유되고 있다.
(사진설명) 방송사 뉴스 화면 캡처. MBC(오른쪽 아래)를 제외한 방송사 앵커들은 ‘근조’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을 패용한 채 방송을 진행했다.
방송사 중 가장 먼저 검은 리본 패용 방침을 정한 곳은 KBS다. 참사 다음날인 10월 30일 오후 2시 뉴스특보부터 진행자들이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달았다. YTN과 SBS는 31일부터 뉴스 앵커 등 방송 진행자들이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달고 방송했다. MBC는 30일 뉴스 앵커들이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달았다가 1일부터 일반적인 근조 리본을 패용했다. 이에 대해 각 방송사는 “정부 지침과 무관한 자발적 결정”이라고 해명했다.
KBS 보도본부는 자사 기자들에게 “아직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상자가 많은 상황이라 사망자에 대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근조’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해 자율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며 "KBS는 정부 지침이 나오기 전인 30일 오후 2시 대 특보부터 글자 없는 리본을 사와서 달았다"고 설명했다.
YTN 관계자는 “보도국장이 뉴스 앵커팀장에게 근조 리본을 구해서 패용할 것을 지시하긴 했으나, 글자의 유무를 정해주진 않았다. 앵커팀에서 자발적으로 리본을 구해 패용한 것으로 정부 지침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SBS 통합뉴스룸 조정 보도국장은 “정부지침은 받은 적도 들은 적도 없으며, 의상실에서 준비한 리본을 앵커들이 패용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지난 1일부터 글자가 있는 리본으로 바꿔 단 MBC는 글자 없는 리본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바꿔 달았다는 입장이다. MBC 박성호 뉴스룸 국장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 사망 인원이 150명을 넘어 국가적 재난 상황으로 확인되면서 30일 당일 방송 진행자들도 추모의 뜻을 나타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리본을 달도록 조치했다”며 “당시에는 리본의 형태나 문구 등을 특별히 신경 써서 지시하지는 않았다. 뉴스룸 행정 직원들이 방송에 나오는 정부 인사들의 검은 리본을 보고 의상팀에 제작을 의뢰해 앵커들이 31일까지 패용했으나, 경위를 파악하고 일반적인 근조 리본을 달도록 다시 지시했다”고 말했다.
‘근조(謹弔)’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삼가 슬픈 마음을 나타냄’이다. 하지만 늑장 대응으로 이태원 참사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윤석열 정부는 희생자에게 조의를 표한다면서도 ‘신속성’을 이유로 ‘근조’가 빠진 리본 패용 지침을 내리면서 애도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제작진
취재 홍여진 강현석 홍주환
디자인 이도현
출판 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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