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파공작에 납치돼 남한서 간첩활동…법원 “국가가 18억 배상”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 김성길씨
대한민국 상대 손배소 1심 승소
“응어리진 억울함 알아줘 감사”
진실위 등 국가기관 통하지 않고
피해자가 스스로 증거 수집해
법원서 피해 인정받은 첫 사례
조일준 기자 수정 2024-11-25 10:39 등록 2024-11-25 07:00
 
1955년 북한 함경남도에서 남한의 북파 공작원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납치됐던 김성길(82)씨가 2024년 6월 강원도 춘천 집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아버지의 전사확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955년 북한 함경남도에서 남한의 북파 공작원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납치됐던 김성길(82)씨가 2024년 6월 강원도 춘천 집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도중 아버지의 전사확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북한에서 국군 첩보부대원들에게 납치돼 남한으로 내려온 뒤 간첩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북한에서 납치된 민간인에게 대한민국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두 번째 판결인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등 국가기관의 조사를 통하지 않고 피해자가 스스로 증거를 수집해 법원으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은 첫 사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재판장 황순현)는 지난달 30일 북한 민간인 납치 피해자 김성길(82)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대한민국은 김씨와 부친 고 김아무개씨에게 18억3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정부는 지난 19일 즉각 항소했다.
 
1955년 8월24일 13살이던 김성길씨는 함경남도 북청군 바닷가 마을 집에서 잠자던 중 아버지와 함께 대한민국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 북파 공작원들에게 납치됐다. 두 사람을 강원도 고성군 부대로 데려온 첩보부대는 이들 부자에게 북한 관련 정보를 캐내고 서로를 볼모 삼아 북파 공작에까지 이용했다. 이후 김씨의 아버지는 피랍 1년여만인 1956년 10월 해상침투작전에 동원됐다가 숨졌다.
 
하지만 국군 첩보부대는 아들 김씨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감춘 채 1957년 15살인 김씨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두 차례나 북파 공작에 동원했다. 김씨가 고등학생이던 1959년 12월 ‘비밀 엄수’ 조건으로 그에게 호적을 만들어줬지만, 김씨는 공안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농사일과 뱃일 품팔이로 연명해야 했다. 이후 1968년 강원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1999년에 명예퇴직했다. 김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공식 확인한 것은 2009년 11월 해당 부대가 ‘전사 확인서’를 발급하면서였다.
 
2024년 6월 김씨와 그의 아내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관련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2024년 6월 김씨와 그의 아내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관련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대한민국 법원이 북파공작원의 북한 주민 납치 사실과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앞서 지난해 7월 서울고등법원은 1956년 10월 황해도에서 납치돼 끌려온 김주삼(87)씨의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국가 배상액을 원심보다 늘려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국가의 상고 포기로 판결은 확정됐다.
 
김주삼씨 사건을 비롯해 국가의 위법행위에 대한 과거사 손해배상 대부분은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결정을 토대로 이뤄지지만, 김성길씨의 경우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조차 없어 소송 과정이 쉽지 않았다. 김주삼씨 판결 이후 자신도 소송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김씨는 직접 증거를 수집해 법원에 제출해야했다.
 
소송의 최대 쟁점은 ‘민법상 소멸시효’였다. 정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단기),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장기)을 경과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된다며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 등을 인용해 “원고에게는 객관적으로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어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는다”며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또 재판부는 “사실관계 규명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피고(국가)가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증거수집능력이 현저하게 열악한 지위에 있는 원고로서는 피고의 공권력에 기대하여 진실을 규명하여 달라고 요구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김씨의 법률대리인 이강혁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김주삼씨 사건에 이어 국군이 한국전쟁 이후로도 북한 지역에 특수부대를 보내 민간인 납치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음을 인정함으로써, 한반도 현대사 남북한 대립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내고 민족 화해와 평화의 필요성을 새삼 일깨워준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마음에 응어리진 억울함을 재판부에서 알아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의 항소에 대해 “절차가 그렇다면 할 말은 없다”면서도 “국가가 잘못했으면 그걸 인정하는 게 원칙 아니겠냐”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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