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 닉슨 하야시킨 두 글자…‘BH’의 결말은?
등록 : 2012.03.30 20:52수정 : 2012.03.30 22:18


그것은 수첩의 한 페이지에 또렷이 박혀 있었다. WH. 화이트 하우스, 즉 백악관을 가리키는 두 글자였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빌딩에 자리잡은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한 괴한들의 수첩에서 발견된 이 글자 위에는 하워드 헌트라는 이름이, 옆에는 202-456-2282라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는 전화기를 들고 수첩에 적힌 숫자를 돌렸다. 전화는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 찰스 콜슨의 비서를 거쳐 헌트에게 연결됐다.

전화를 받은 헌트는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다. “이런!” 그러곤 황급히 수화기를 내던졌다. ‘쾅’ 소리가 전화 줄을 타고 우드워드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헌트는 4개월 뒤 워터게이트 빌딩을 침입한 괴한들과 함께 불법 침입 및 도청 혐의로 기소됐다. 법정에서 판사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도청을 시켰는가? 돈은 누가 댔는가?” 헌트는 독자적인 행동이었다는 말만 되뇌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스스로 백악관을 떠난다.

WH는 닉슨 대통령을 찌른 비수였다. 백악관은 닉슨 대통령의 연루 의혹을 진화하기 위해 총력을 쏟았다. 백악관 공보비서 론 지글러는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을 ‘3류 강도극’으로 치부하며 백악관이 논평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닉슨 대통령은 중앙정보국(CIA)에 연방수사국(FBI)의 조사를 방해할 것을 지시하기까지 했다.

30일 공개된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비수가 박혀 있다. 문건 곳곳엔 BH, 즉 청와대를 가리키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하명’과 짝을 이룬 이 글자는 청와대가 사찰을 지시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민간인 사찰 파문은 한국판 워터게이트로 비화할 수 있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 여당에서조차 “대통령이 해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야당은 공개적으로 대통령 하야를 거론하고 나섰다.

닉슨 대통령의 법률 고문 존 딘은 궁지에 몰렸다. 백악관의 워터게이트 연루설이 불거진 직후 닉슨 대통령과 이 문제를 상의했던 그는 상원 청문회에 불려나가 진실을 추궁받는다. 나흘 동안 이어진 심문에서 그는 결국 닉슨 대통령을 고발했다. “백악관의 연루설을 진화하기 위해 어떤 조처가 취해졌는지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은폐가 가능할지 자신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청문회의 수석 고문이 “증언을 번복하지 않을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체념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예.”

닉슨 대통령은 비판적인 언론을 끔찍이 싫어했고, 그것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닉슨 대통령을 인터뷰했던 오락프로그램 진행자 프로스트의 얘기를 다룬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을 보면, 닉슨 대통령은 언론을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도 않고, 대표권도 없으면서도 또 하나의 권력으로 행세한다”고 못마땅해하며 “망할 놈들”이라고 불렀다.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뭔가를 승인한다면 그건 누군가에게 불법이란 낙인 없이 업무를 수행하게끔 할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호언하기도 한다.

WH라는 글자에서 시작한 워터게이트는 흔히 부도덕한 권력의 종말과 진실의 승리를 상징한다. 민주당에 대한 불법 사찰과 도청, 백악관과 정보기관의 은폐 공작으로 점철된 권력의 거짓말은 언론의 추궁과 특별검사의 기소, 의회의 탄핵안 가결로 이어졌고, 결국 닉슨 대통령의 하야로 귀결됐다. 특별검사를 해임하면서까지 버티며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던 닉슨 대통령은 임기 중에 백악관을 떠나는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겼다. BH의 끝은 어디일까?

유강문 경제국제에디터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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