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털남·나꼼수 때문에"... '유모차의 습격' 낳았다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 마감... 뉴욕 투표소에 젊은층이 몰린 까닭은?
12.04.03 13:52 ㅣ최종 업데이트 12.04.03 13:59 최경준 (235jun)
▲ 지난달 28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된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2일 최종 마감된 가운데,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는 유모차를 대동한 30대 젊은층 유권자가 높은 투표율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 최경준
"뉴욕 한국총영사관에서 근무한 이래 이렇게 많은 유모차가 방문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한국총영사관에서 선거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영사관의 한 직원은 혀를 내둘렀다.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총영사관을 방문한 유모차가 이날 하루만 50여 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재외국민 투표에는 중·장년층보다 20~30대 청년층의 참여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선거 관계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민병갑 뉴욕퀸즈대학(사회학) 교수는 "미국 동포들의 정치적 성향은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실제 투표에서는 야권 성향의 젊은이들이 훨씬 많이 참여했다"며 "미국에 계속 거주하려는 영주자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임시체류자의 차이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친구들과 SNS로 대화하는 것조차 겁 난다"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된 재외국민 투표가 2일 최종 마감됐다. 예상대로 투표율은 매우 저조했다.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거인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지난 2월 마감 당시 등록률 자체가 5.6%(12만3571명)에 불과했다. 이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투표소 접근성 등의 문제 때문에 투표를 포기하면서 극히 낮은 투표율을 기록한 것이다.
미국 뉴욕의 경우 사전에 투표하겠다고 등록한 4606명 가운데 투표를 끝낸 유권자는 1745명에 그쳤다. 워싱턴DC 역시 2014명의 투표등록자 중 855명만이 투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07개국 158개 공관별로 진행된 재외국민 선거는 12만3천571명의 투표등록자 가운데 5만5397명이 투표에 참여, 44.83%의 투표율을 나타냈다. 전체 재외선거 대상자(223만3천193명) 대비 실투표율은 2.48%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낮은 투표율 속에서도 뉴욕 투표소의 경우 젊은 유권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져 눈길을 끌었다. 뉴욕 재외선거관리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전체 투표자 중 최소 60~70% 정도가 40대 이하 젊은층이었다"며 "뉴욕 지역이 유학생이나 상사 주재원이 많다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말했다.
뉴욕 투표소에서 진행된 젊은층의 투표 행태를 해외 투표소 전체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9일 앞으로 다가온 4·11 본 총선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풍향계가 될 수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4·11 총선에서도 20~30대 투표율이 선거 판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내외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뉴욕 한국총영사관에서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를 마친 뒤, 20~30대 젊은 유권자들의 요청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최경준
지난 28일부터 6일간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서 만난 20~30대 젊은 유권자들은 "한국 뉴스를 보면 나중에 돌아가서 어떻게 살지 걱정이 되더라"고 입을 모았다. 유학생인 이재국(29)씨는 오는 5월이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현재 이씨가 하고 있는 고민은 등록금, 취업, 결혼 등 또래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투표소까지 이씨의 발길을 이끈 직접적인 요인은 바로 "민주주의의 퇴보"였다.
"20~30대가 1980년대를 겪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많이 가지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만 봐도 큰 문제 아니냐. 민간인 사찰 문제 때문에 주변에서도 많이 불안해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SNS로 대화하는 것조차도 이젠 겁이 난다. 제 친구의 아버지가 고위공직자인데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사람 주민번호만 알아오라고 했다'더라.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같은 현실에서는 더 이상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니냐."
임성복(33, 유학생)씨도 "잘못된 것에 대해서 잘못됐다고 얘기하고 싶었다"며 "청와대에서 민간인 사찰을 주도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개했다.
"정말 영화 같은 일을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가 벌이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민간인 사찰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 지켜봐야 한다. 오늘 아침 (<오마이뉴스>가 만드는 팟캐스트 방송) '이슈 털어주는 남자'에서 민간인 사찰 문제를 워터게이트에 비교하는 것을 듣고 투표하러 왔다. 어떻게 정부가 일반 개인을 그렇게 사찰 할 수가 있나."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장단기 유학생들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직접 피부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최원석(40)씨는 "제 주변 사람들을 보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정치에 관심이 높다"며 "불합리한 것을 많이 보니까, 투표를 통해 그에 대한 의사표명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씨의 부인 민경은(38)씨도 "현 정부 들어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모든 일이 저에게 (투표를 해야 한다는) 자극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뒤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해 왔던 문제들이 지금 한꺼번에 터지는 것 같다"며 "지금에 와서도 그것을 방관하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게 너무나 한심스럽다"고 말했다.
뉴욕 힉스빌에 살고 있는 이일동(26)씨는 투표 마감시간보다 15분 늦어서 결국 투표를 하지 못했다. 집에서 투표소까지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서울에서 대전 정도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도 문제지만, 투표 기간이 시험 기간과 겹쳐서 도저히 짬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국내 정치 상황을 보면 이번에 꼭 투표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다"며 발길을 돌렸다.
"저는 한미FTA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론에 대한 국가 정책이 너무나 퇴보하고 있다. 낙하산 인사 때문에 언론사 노조가 파업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고 싶었다. 미국은 뭔 말을 해도 보장이 사회인데, 우리나라는 다른 목소리를 내면 재갈을 물린다. 그렇게 가다보면 너무나 무서운 사회가 될 것 같아 안타까웠다."
▲ 지난달 28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된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2일 최종 마감된 가운데,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는 20~30대 젊은층 유권자가 높은 투표율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 최경준
"이털남·나꼼수 듣고 투표하러 왔다"
백종만(40, 직장인)·백승희(34)씨 부부도 자동차로 30~40분 거리를 달려와 투표에 참여했다. 3살짜리 딸의 손을 잡고, 15개월 된 아들의 유모차를 밀며 투표를 마친 이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투표소를 나섰다.
"뭔가 바꿔야 겠다는 의무감으로 왔다. 많은 이슈가 있지만 저는 심판론에 공감을 한다. 그것 때문에 실제로 투표를 하러 나왔다. 심판론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겠지만, 언론장악 문제, 민간인 사찰 문제, 경제 문제, MB정권의 정상적이지 않은 통치 행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안질수(32, 직장인)씨는 "반값등록금 같은 경우 선거 때만 공약으로 내놨다가 나중에는 흐지부지 없어지지 않았느냐"며 "이번 총선에서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젊은층의 투표율이 높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안씨는 "사실 젊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찍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며 "올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야권통합 과정을 보면서, '밥상을 차려줘도 못 먹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뉴욕 지역 젊은층이 투표소로 대거 몰린 데에는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와 이털남·나꼼수 등 인터넷방송 팟캐스트의 역할도 컸다. SNS 등이 젊은층의 정치 의사소통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젊은층도 국내 이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SNS 등으로 젊은층의 선거참여도가 크게 늘었던 지난 2010년 6·2지방선거 때 20, 30대 투표율은 각각 41.1%, 46.2%였다. 이런 현상은 이번 4·11 총선에서도 그대로 재현될 전망이다.
임성복씨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 SNS나 인터넷뉴스를 통해서 국내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다"며 "젊은층이 SNS를 많이 쓰면서 자기 주장을 확실하게 표현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 높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영기(31, 유학생)씨도 "예전에는 트위터를 통해 연결체계를 형성하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팟캐스트를 통해 감춰졌던 정보들을 많이 접할 수 있고, 그런 게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며 "그런 것이 젊은층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투표에 참여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뉴욕에 온 김경민(24)씨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기에 와서 나꼼수 등 팟캐스트를 더 챙겨들었고, 그 영향으로 투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지난달 28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된 4.11 총선 재외국민 투표가 2일 최종 마감된 가운데, 뉴욕 한국총영사관 투표소에는 20~30대 젊은층 유권자가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이들은 투표를 마친 뒤, SNS 등에 올리기 위한 투표 인증샷 촬영도 잊지 않았다. ⓒ 최경준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이후 37년 만에 첫 투표, 감격"
전반적으로 투표 접근성이 떨어지는 가운데 중장년층보다 젊은층의 활동성이 높다는 점도 젊은층을 투표소로 이끈 요인이 됐다. 김충구(35, 유학생)씨는 "지난해 재외국민선거 모의투표 때는 여권에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고 하더라"며 "그러나 실제 교통 문제 등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중장년층이 투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오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 대선 때도 재외국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질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임채림(25)씨도 "저희들은 학생이어서 그나마 투표를 할 수 있었지만, 생업이 있는 분들이나 직장인들은 투표하기 쉽지 않다"며 "정치에 대해 젊은층의 관심이 더 높다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이동이 편하고, 후보자나 정당의 정보를 찾기 위한 인터넷 활용도가 높기 때문에 젊은층의 투표율이 높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젊은층에 비해 중장년층은 투표소를 방문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투표등록을 해놓고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뉴욕 브룩클린에 살고 있는 김한순(70)씨는 큰 어려움 없이 사촌동생인 김영자(68)씨와 함께 투표소를 찾았다. 김한순씨는 37년 만에 처음 투표를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때 투표하고 처음"이라며 "(총영사관 앞에 있는) 태극기를 보니까 눈물이 핑 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김영자씨도 "25년 만에 투표를 하고 나니까, 애국심이 생기는 것 같고 감회가 새롭다"며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TV를 통해서 한국 소식은 다 알고 있다. 정당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이미 평생 동안 마음에 쭉 담아놓은 당이 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투표했다"고 말했다.
민병갑 교수는 "상사 주재원이나 유학생 등 임시체류자는 한국에 뿌리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 돌아가 하기 때문에 계속 미국에서 살 계획인 영주자들보다 투표율이 높았다"며 "게다가 영주자들은 생업에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선거 참여가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민 교수는 이어 "투표율과 상관없이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대부분 국내 정치에 관심이 많고, 국내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어서 새누리당(구 한나라당)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 등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그런 양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만 놓고 보더라도 시민권자들보다 영주권자가, 영주권자보다 임시체류자가 더 진보적"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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