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3004&menuSeq=12&kindSeq=1&writeDateChk=20120222 

<58>비사성 함락
비장하게 사수하던 성내주니 唐 식량 공급 길 열어 
2012.02.22

수군은 압록강서 시위하며  오골성 고구려 전력 견제 

단동에서 바라본 압록강. 645년 이곳에 당나라 수군이 출동해 오골성의 고구려 병력을 견제했다.
 
비사성은 사방으로 가파른 산비탈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본래는 서문으로만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산성 가운데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는 동서방향으로 한없이 뻗어 있는 관문채(關門寨) 골짜기다. 현재 서문인 관문채문을 조성해 놓은 곳에서 수십미터 남쪽 오른편으로 보이는 요(凹)자형 바위 벼랑 사이가 바로 옛 관문이다. 그 경사가 급한 위험한 골짜기를 올라가 벼랑에 달린 그 문을 넘어야 비사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50년 전만 해도 이곳에 성문의 흔적과 성벽을 쌓았던 반듯한 돌들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문을 조성해 놓은 관문채 아래쪽은 배수로만 남겨 놓고 모두 성벽을 쌓았으며 사람들은 오른쪽 벼랑 사이에 난 좁은 성문으로 다녔다고 한다. 한 병사만 지키고 있으면 천군만마를 막을 수 있는 자리다. 

비사성에 남아 있는 고구려군 가운데 정예병들은 모두 관문채 방어에 나섰을 것이다. 어디 도망갈 데도 없는 그곳을 지키는 고구려군들의 각오는 비장했으리라. 좁고 가파르기로 이름난 그 살인적인 골짜기를 줄지어 올라오는 당군을 향해 돌을 굴리고 활을 쏘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물론 당나라 지휘관들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노장들 가운데는 비사성에서 전투를 한 경력이 있는 자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31년 전인 614년 7월 수나라 장군 내호아(護兒)는 그곳을 함락시킨 바 있다. 

645년 5월 2일 관문채 골짜기는 죽음의 냄새로 자욱했다. 상륙한 다음날 당군은 곧바로 비사성 공격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이 돌과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유혈의 골짜기를 뒤로한 채 아래쪽으로 퇴각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정명진은 시야가 확보되는 주간전투는 고구려군의 직사 화기에 노출돼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많은 피를 흘린 후에야 그는 야간공격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휘관들을 자신의 막사로 모아 놓고 빠른 시일 내에 고구려군의 방어선을 뚫고 비사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극형을 내리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놓았으리라. 황제가 요하를 건너 고구려 땅으로 들어오고 있는 지금 비사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해군제독 장량도 그 아장인 정명진 자신도 무사할 수 없었다. 황제가 도착하는 순간 식량도 고구려 땅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그러자 부총관(副總管) 왕문도(王文度)가 자신이 전투에 앞장서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싸우다 죽거나 상관에게 맞아 죽거나 선택해야 할 위치였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관문채 골짜기에 들어섰다. 장성인 왕문도가 앞장섰다. 병사들은 그를 따라 줄줄이 관문채 골짜기를 향해 올라갔다. 멀리 어둠 속에서도 고구려 병사들은 당나라군이 전의를 새로이 다진 것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수많은 돌과 화살이 내려왔다. 화살은 물론이고, 주먹 만한 돌이라도 위에서 떨어지는 그것은 위력적이라 제대로 맞으면 즉사한다. 화살은 한 명을 죽일 수 있으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은 굴러 내려오면서 그것이 운동에너지를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병사들을 죽인다. 하지만 밤이었다. 관문채 성문에서 돌과 화살을 발사하는 고구려 군대는 고정돼 있지만 기어 올라가는 당군은 그래도 자신의 위치를 골짜기에서 약간이나마 수정할 수 있었다. 피아가 보이지 않는 상태는 당군에 유리했다. 그래도 많은 병사가 희생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당군들은 줄줄이 쓰러졌지만 지속적으로 기어 올라갔다. 고구려 군인들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의 강한 기세였다. 결국 관문채 성문 앞에 도착한 당군은 파성추를 가져와 성문을 부쉈다. ‘책부원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총관 왕문도가 앞장서고 사졸들이 계속하여 진격하니 성중(城中)이 무너졌다.” 선봉대가 관문채를 통과하자 막혀 있던 당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성 안에서 고구려 군대는 차분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당군의 사냥이 시작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희미한 저항마저 완전히 제압됐고, 성 안에 살아남은 남녀 8000명이 줄줄이 묶여 성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은 아마도 노예선 같은 배를 타고 산동으로 향했을 것이다. 

현지 전설에는 장량이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이 관문을 여러 번 쳐도 끄떡하지 않으니 개구리를 숭상하는 고구려인의 습속을 빌려 교묘하게 개구리왕의 신통력을 이용해 이 관문을 열게 돼 비사성을 함락시켰다고 전한다. 발해용왕에게 무사항해를 기원했던 장량이 비사성 함락에도 주술의 힘을 빌렸던 것이 아닐까. 어떻든 이 전설은 비사성 함락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전해준다.

비사성이 당 수군 수중에 들어가고 깃발이 교체됐다. 장량은 정명진과 왕문도를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해 비사성을 지키게 하고 항만의 수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곧바로 함대를 재정비해 출항시켰다. 목표지는 압록강이었다. 고구려 함대가 집결돼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함대는 총관(摠管) 구효충(丘孝忠)과 고신감(古神感)이 이끌었다. 대련만을 출발한 함대는 요동반도 남쪽의 연안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함대가 나가면서 주변 연안과 섬의 고구려 봉수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압록강에 집결해 있던 고구려 함대는 당 수군이 그들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 수군의 입장에서는 언제 고구려군 수군이 나타나 전투가 벌어질지 몰랐다. 압록강 입구에 도착했지만 고구려 수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력의 손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온전하게 보존된 수군의 존재 자체가 당에 억제력을 주는 힘이었다. 

물론 고구려는 당 수군의 이번 압록강 출전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황제가 요동성으로 가기 위해 요하를 건너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 수군은 압록강 주변을 위협해 서북의 요동성으로 향하려는 오골성에 있는 고구려의 전력을 묶어 놓으려고 했다. ‘자치통감’은 “총관 구효충 등을 (비사성에서) 나누어 파견해 압록수에서 요병(曜兵ㆍ시위를 의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수뇌부는 당나라 수군을 고구려 함대에 맡겨 두고, 압록강 하구와 멀지 않은 오골성에 배치된 병력들을 요동성으로 북상시켰던 것 같다. ‘자치통감’은 645년 5월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신일(5일) (황제가) 요하 소택지의 동쪽을 건넜다. 을해일(8일)에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요동성을 구원하러 왔다.” 

당나라의 압록강 정보-사신 통해 지리 현황 등 모두 입수

당 수군은 압록강에 대한 현지 정보를 이미 소유하고 있었다. 641년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당나라 병부 산하 정보부(직방)의 국장 진대덕이 그곳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가 고구려를 다녀와 당태종에게 올린 보고서인 ‘고려기’의 편린이 ‘한원’에 수록돼 있다. 

“‘고려기’가 말했다. 마자수는, 고려(고구려를 의미)에서는 엄수라고도 하며 지금 이름은 압록수다. 그 나라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이르길, 물줄기는 동북녁 말갈국 백산에서 비롯돼 나온다. 빛깔이 오리 대가리를 닮았고, 이 때문에 흔히 압록수라 부른다고 한다. 요동에서 500리 떨어져 있다. 국내성 남녘을 지나며, 또한 서녘에서 한 물줄기와 합치는데 바로 염난수다. 두 물줄기가 흐름을 합쳐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 가운데 이 물줄기가 가장 크고, 맑고 시원하게 물결이 일며, 지나는 곳 나룻터마다 큰 배가 모여 있다. 그 나라는 이 물줄기를 천험의 요충지로 믿어 기댄다. 지금 살피니, 그 물줄기 넓이는 300걸음이고 평양성에서 서북쪽 450리에 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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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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