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42400330001


오녀산성

한국의 산성



역사적배경


고조선의 변방지대인 압록강 중류유역에는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보급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작은 소국들이 조그만한 성을 둘러싼 마을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을들은 점차 몇 개의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5개의 소국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이 연맹체를 구성하여 고구려가 성립되었다. 고구려의 5부족은 계루부를 비롯하여 절노부, 관노부, 소노부, 순노부인데 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이들 소국들이 계곡이나 하천을 중심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奴)’는 시내, 강을 의미하는 고구려말로 물가의 토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보다 1세기나 앞서 고구려현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오녀산성 원경오녀산성 원경


주몽은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활을 잘쏘는 등 여러 가지 특출한 능력이 있었고 특히 사냥에 뛰어났다. 이에 북부여 왕자긍이 시기하여 주몽을 죽이려 하자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엄리대수(송화강 상류의 휘발하로 추정)를 건너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홀본(忽本), 즉 지금의 환인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운다.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흘승골성 또는 졸본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고구려 초기 중심지였던 졸본지역은 토양이 기름지고 산하가 험준하여 도읍하기 알맞은 지형이다. 실제 혼강유역의 환인분지에는 수십개의 소하천이 있고, 그 주변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 일대에서는 청동시시대의 유적 뿐만 아니라 고려서 초기적석묘군도 다수 조사되었다. 환인분지는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쌓여 있고, 분지 내에도 험준한 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다. 특히 오녀산은 환인분지에서 가장 험준한 산으로서 전국시대 연나라 계통의 주조도끼가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오녀산성은 환인분지에서 가장 험준한 천혜의 요새지로 이른 시기부터 방어시설로 이용되었으므로 주몽집단이 이 지역을 장악한 후 도읍을 정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오녀산은 해발이 800m 정도이고 정상부에는 남북 1km, 동서 300m인 평탄지가 조성되어 있고 항상 물이 솟아나오는 샘이 있어 평상시에 거주하기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지역이다.


문헌기록이나 지형조건 등으로 보아 오녀산성은 첫 번째 수도였던 졸본성의 방어용 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평상시 도성이었을 졸본은 어디로 비정될까. 광개토왕릉비의 기록내용을 근거로 하면 忽本은 홀본은 오녀산 동쪽의 환인댐 수몰지구 일대로 추정된다. 현재 환인댐으로 인하여 수몰되었지만 이곳에 있었던 하고성자나 나합성이 졸본성일 가능성이 가장 큰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환인일대는 요동에서 국내성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 이므로 오녀산성은 국내성 천도 이후에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환인서쪽에서 혼강으로 진입하는 교통로를 공제하면서 환인분지 일대의 중심적인 군사방어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고 추정된다.


오녀산성 이야기


오녀산성 건물지오녀산성 건물지


오녀산성은 환인현에서 동북으로 8.5km 거리에 있는 혼강 맞은편 기슭인 五女山상에 위치하고 있다. 오녀산은 해발 800m 정도이며, 정상부의 지세는 평탄하지만 정상부의 주변은 100-200m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성은 남북으로 길쭉한 부정형을 이루고 있으며, 절벽 윗부분의 평탄한 정상부와 정상부 동쪽의 완만한 사면을 포용하고 있다. 정상부는 남북의 길이가 600m 동서의 너비가 110-200m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천연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쪽방면에서 정상부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서문주변에만 일부 성벽이구축되어 있다. 동사면을 포괄하고 있는 성벽은 정상부의 동남쪽 해발 670m 지점에서 사면을 따라 내려와 해발 610m 지점에서 단애를 따라 곳곳에 인공적인 성벽이 구축되어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4,754m이며 그중 천연성벽이 4,189m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위적으로 축조한 성벽은 565m로 12%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성벽 하단부의 너비는 4~6m이고 상부의 너비는 2.2~4.4m로 단면을 보면 위가 좁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동벽도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지만 높은 곳은 6m 정도 남아있다.


오녀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6년부터 2003년까지 4차에 걸쳐 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와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가 연합으로 실시하였다. 평탄한 정상부의 건물지조사가 주로 진행되었으며, 성벽조사는 서문지와 동문지 등 일부구간에 대해서만 실시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정상부의 토층은 대략 50cm 정도로 얇고, 표토층와 흑갈색층, 황갈색 층 등 3개의 층으로 구분되었다. 표토층은 10-20cm 정도이며 여러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두 번째층인 흑갈색층은 대략 10-25cm 정도의 두께이며 흑회색도기편과 백자편 등 송, 금나라 시기의 유물이 주로 출토되었다. 세 번째층인 황갈색토층은 10-18cm 정도이며 사립이 혼입된 홍갈색토기편과 갈색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출토유물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5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1기 문화층


Ⅱ구역과 Ⅳ구역의 서부에 조금 나타난다. F48의 3층 아래쪽과 2,3층 에서 수혈주거지와 약간의 사질이 혼입된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어 신석기시대 만기에서 청동기시대의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의 유적은 혼강 일대의 일정한 범위에 걸쳐서 분포되어 있다.


오녀산성 정상으로 오르는 좁은길 


오녀산성 정상부에 형성된 암벽



제2기 문화층


Ⅱ·Ⅲ·Ⅳ구역에서 보인다. 원형과 장방형의 수혈주거지에서 다량의 석촉과 석도, 토기편, 방추자 등이 출토되었으며, 약간의 청동유물이 출토되었다. 시기는 청동기시대 만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3기 문화층


Ⅱ·Ⅳ구역에서 보인다. Ⅲ구역과 3호 대형 건물터 가까이에서도 소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길이 13.8m 너비 6-8.2m 규모인 1호대형건물지와, 직경 3-4m 정도의 원형수혈건물지가 조사되었다.


대형건물지에서는 초석이 발견되며 원형수혈건물지에서는 온돌은 확인되지 않고 아궁이 시설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유물은 석립이 일부 혼입 된 회갈색 토기편과 쇠괭이, 쇠가래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모두 손으로 빚어서 만들었으며, 두개의 손잡이가 달린 관(罐), 손잡이 4개 달린관(四繫罐), 가로손잡이 달린 동이(盆), 잔(杯) 같은 것 등이 출토되었다. 화폐로는 오수전(五銖錢), 대천오십전(大泉五十錢)이 출토되었다. 시기는 고구려 문화의 초기에 해 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이 시기에 산상 동북계곡의 1,2호 성벽과 산하의 남벽과 동벽 및 성문을 구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녀산성 건물지 복원


제4기 문화층


이 문화층은 산성의 전 구역에서 발견되며 층위상으로 1, 2층 아래의 대부분과 3층에서 확인된다. 4기는 산성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주거지가 밀집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주거지는 4-5m 크기의 장방형 수혈주거지로서 ㄱ자 형태의 온돌구조를 갖추고 있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니질계와 운모와 활석립이 혼입된 조질계로 구분되는데 조질계토기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토기의 소성온도는 비교적 낮은 편이며 윤적법으로 성형한 것이 대부분이다.


형태는 甕(옹), 罐(관), 盆(분), 壺(호), 甑(증), 盤(반), 그릇뚜껑 등 매우 다양하다. 문양은 그리 많지 않은데 현문(弦文)과 수파문(水波文)이 확인된다. 철기는 절대 다수가 두드려 만들었고, 몇 가지 기혈(器皿)만 거푸집에 부어 만들었다. 철기는 일부 생활용기를 제외한 대부분이 단조제품이며 주로 무기류들이다.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5기 문화층


각 발굴 구역에 두루 나타나며 1, 2층 밑부분의 집터와 2층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집터는 긴네모꼴 수혈식이며 대부분 ㄱ자형의 3고래 온돌을 구비하고 있다. 유물은 도기, 자기, 철기, 동기, 은기, 옥기 같은 것들이 출토되었으며 그중 도기, 자기 철기가 많다. 토기는 모두 회색과 흑색의 니질토기이며, 사질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토기는 테쌓기를 하였고 소성도는 높은 편이다. 그릇 생김새는 관, 단지, 시루 따위이고, 자기에는 흰색, 검은색, 진한 홍갈색, 차와 같은 녹색 유약을 발랐고, 독, 관, 주발, 병 같은 것도 있다. 철기는 두드려 만든 단조와 주조로 나눌 수 있는데 그릇이 많은 편이고, 생산, 생활, 군사 같은 여러 영역에서 두루 사용한 것이다. 또한 안무사지인(按撫使之印), 경략사사지인(經略使司之印), 도총소인(都統所印) 등의 인장이 발견되었으며 개원통보, 황성통보, 천원동보, 희원통보, 대평통보 등의 동전이 다수 출토되었다. 시대는 金나라 때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결과를 보면 3기와 4기 문화층이 고구려 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녀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물들은 대부분 3세기 이전인 3기와 4~5세기의 4기 문화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5세기 이후부터 발해 때까지 6~7세기 유물은 보고되지 않고 있다.


오녀산성 시설물


오녀산성 연지


오녀산성 동문지


오녀산성 성벽의 축성방법은 남벽과 동벽의 일부는 협축으로 구축되었으며 서벽과 동벽의 나머지 구간은 편축으로 구축되었다. 성벽에 대한 단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벽 내부의 구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면석이 무너지고 노출된 뒷채움돌의 상태로 보아 편축성벽이라고 하더라도 경사면을 ㄴ자 형태로 파고, 양끝단에 면을 맞추어 정연하게 석축을 하되 위로 올라가면서 좁혀쌓아 사다리꼴 모양이 되도록 하고, 내면은 흙으로 다져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녀산성의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대략 6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장대석과 쐐기모양의 성돌, 길쭉한 북모양의 뒷채움성돌, 판석, 잡석, 쇄석 등이다. 이러한 성돌은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되었는데 성벽의 기단부에는 가공하지 않은 장대석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위로 올가가면서 점차 작고 가공된 성돌을 사용하였다. 오녀산성에 사용된 쐐기형 성돌의 크기는 너비 50cm, 길이는 55cm, 두께는 20cm 정도의 성돌이 많으며 외면의 중간부분이 주변보다 약간 도드라지도록 다듬은 것이 특징이다. 뒷채움돌은 길이가 63~76㎝로 면석보다 길이가 길고 너비 19~26㎝, 두께 12~18㎝ 정도이다.


성벽은 한단 한단이 수평을 유지하도록 한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들여쌓기를 하여 성벽의 기울기는 대략 80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바위가 있는 부분은 바위를 그대로 활용하여 성돌을 바위의 형태에 맞추어 다듬어서 쌓았다.


성벽의 정상부에는 여장이 구축되어 있다. 여장은 성가퀴 또는 화살을 막는 곳이라는 뜻에서 ‘살받이터’라고도 한다.


여장은 삼국시대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녀산성에는 이러한 여장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동벽의 일부구간에서 확인되는 여장의 현존 높이는 80cm 정도이며 너비는 대략 1-1.5m 정도이다. 타구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여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어떤 형태의 총안이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벽의 여장 안쪽에는 특이하게도 주통이라고 하는 너비 30cm 정도의 방형 구멍이 있다. 이러한 주통시설은 오녀산성외에도 환도산성과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등 고구려 전기의 산성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오녀산성에서는 2구간과 5구간에서 19개가 발견되었다. 주통과 주통의 간격은 0.8~2m 정도로 일정치 않으며 구멍의 크기는 대략 20-30cm 정도이며 깊이는 70-80cm 정도이며 평상시에는 덮어놓았던 뚜껑돌이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주통의 용도에 대해서는 쇠뇌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와 굴림통나무(滾木)를 매다는 밧줄을 묶는 기둥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발굴보고서에서는 구덩이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에 나무판을 연결하여 몸을 숨기기 위한 치첩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녀산성에는 정상부와 동벽 내부 두 곳에 샘이 조성되어 있다. 그중 성정상부에 있는 집수시설은 길이 11.5m 너비 5m 깊이 1m 정도의 장방형으로 구축되었으며, 집수시설의 동쪽에 있는 우물에서 물이 흘러들도록 하였다.


오녀산성에서의 성문은 동문, 서문, 남문 등 3개가 확인되고 있다. 그중 동문은 어긋문 형태의 성문으로서 후기의 성문처럼 옹성형태를 취하지는 않고 있으나 ㄱ자 형태로 회절한 동벽이 1자형의 남쪽성벽과 90도 정도의 각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문구부양쪽 성벽이 치성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문구부의 너비는 4.3m 정도이다.


오녀산성 서문지


오녀산성 성벽


오녀산성 남문지


서문은 오녀산 정상부의 서쪽에 있는데 서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너비는 3m 이며, 문의 남쪽과 북쪽에는 성벽을 이어 쌓았는데 북쪽의 성벽은 ㄱ자 형태로 회절하도록 하여 마치 치나 적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돌의 면석은 쐐기모양의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으며, 뒷채움돌은 길쭉한 마름모꼴의 성돌을 사용하였다. 문지의 바깥쪽 양쪽바닥에는 구멍이 파여진 확돌이 놓여있고, 문 안쪽부분의 양쪽에는 凹자 형태의 위실(衛室)이 구축되어 있다.남문은 남벽의 동쪽 끝에 있는데 산성의 동남모서리에 해당한다. 남벽의 동쪽은 절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쪽부분만 높이 4.3m 정도의 지상성벽이 구축되어 있다. 문지부분의 남벽 마감부분은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쇄기형의 성돌로 협축 성벽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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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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