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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41>제19대 광개토태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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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고구려는 백제와 숱한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백제가 고국원왕을 화살 맞혀 죽인 원수인데도, '이전의 잘못을 용서하는' 선에서 끝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솜방망이같다. 기실 고구려의 군사력이 막강하다고는 해도, 백제나 신라를 멸망시킬 정도까지는 되지 못한 것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에 버티고 있는 여러 나라들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사방 변경에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 가야, 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 또다시 후연, 비려(거란), 동부여, 백신(숙신) 등의 적들이 있었다. 백제는 '바다'라는 튼튼한 방어벽이 있어 북쪽과 동쪽의 고구려와 신라만 신경쓰면 되지만, 고구려는 아니다.

 

요동의 벌판은 강이 있대야 건너면 그만, 그나마도 저 북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륙, 말 한 마리만 있다면 달려서 압록강에서 집안, 환인, 단둥을 지나 요양을 거쳐 내몽골 초원까지 그대로 달릴수 있는 실로 가깝고도 짧은 거리다. 그런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으니 남쪽 애들만 신경쓰는 게 아니라 북쪽에서 언제 뒤통수 칠지 모르는 그것들도 신경을 써야되니, 피곤한게 이만저만이 아닌 거다. 실제로 고구려군 5만이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아 왜군을 격퇴하러 종발성 가있을 때 후연에서 쳐들어와서 고구려 서쪽 영토 7백리 뺏은 것만 봐도 알수 있다. 북쪽에 적들을 또 두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남쪽에까지 군사력을 모두 쏟아부을만한 '껀'이 되지 못했던 것.

 

안 그랬다면 그대로 밀어붙여서 통일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군사력을 더 증강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게, 죽기 싫어하는 인간들을 더 뽑아서 군대 보낸다면 세상에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나. 지금도 징병제 국가인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군대가기 싫다고 온갖 개지랄 다 떨어가며 군대가기 싫다고 면제받을 궁리만 하는 현실인데.(하여튼 진짜, 대안은 모병제 뿐인건가 역시.)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무릇 쳐서 깨뜨린[攻破] 성이 64개, 마을은 1,400이었노라.

 

그가 넓힌 땅은, 비단 고구려뿐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드넓은 크기였다. 동쪽으로는 동부여가 있던 목단강 유역과 연해주,서쪽으로는 후연과 접한 난하, 남쪽은 예성강에서 충주와 영일만을 경계로 백제와 신라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흥안령 산백 북쪽 흑룡강 일대까지. 광개토경(廣開土境)이라는 존호가 그저 이름뿐인 껍데기가 아님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22년(412)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태왕은 자신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보다 좀 일찍 죽었다. 《삼국사》에는 재위 22년,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21년이라 해서 1년 정도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사망 날짜는 『광개토태왕릉비』에 기록된 바 9월 29일. 《삼국사》 기록보다 한 달이 더 빠른 수치다.승하하실 당시 태왕의 나이는 39세. 선대 동명왕(40세)보다도 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광개토태왕릉비』의 탄식처럼, '하늘이 고구려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지 않은 탓'이었다.

 

광개토태왕의 무덤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오늘날까지도 광개토태왕의 무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여기저기서 지속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다만 『능비』가 있는 국내성(집안) 근교의 태왕릉과 장군총, 두 고분이 광개토태왕릉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라 있으며, 태왕의 무덤을 지킬 수묘인의 제도만이 비문에 남겨져있을 뿐이다.

  

『능비』에 보면 그의 무덤을 지킬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출신지 및 호수(戶數)에 대해서도 제법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 뽑은 출신도 숫자도 제각각이다. 대체로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으로 나뉘었다. 국연은 왕릉 수호나 제사 같은, 왕릉 관련 제반 사항을 책임지는 관리이고, 간연은 그러한 국연의 통제 아래서 실질적으로 능묘를 지키고 능묘와 관련된 온갖 작업(이를테면 무덤 벌초라던지 하는)을 하는 인물이라 한다.

 

매구여(賣句余) 사람은 국연(國烟)이 두 집[家], 간연(看烟)이 세 집.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세 집, 간연이 다섯 집.

돈성(敦城)의 사람은 네 집이 다 간연.

우성(于城)의 한 집은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두 집은 국연.

평양성(平穰城) 사람은 국연 한 집, 간연 열 집.

자련(訾連)의 두 집은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한 집, 간연 43집.

양곡(梁谷) 두 집은 간연.

양성(梁城) 두 집은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집은 간연.

개곡(改谷)의 세 집은 간연.

신성(新城)의 세 집은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한 집은 국연.

 

특기할만한 점은 광개토태왕의 묘를 지키기 위해 데려온 사람들 중에는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 즉 신래한예(新來韓濊)도 있는데, 그들까지 포함해 광개토태왕의 묘를 지키라 배정된 수묘인, 즉 연호(烟戶)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한 집, 간연 한 집.

모루성(牟婁城)의 간연 두 집.

두비압잠(豆比鴨岑) 간연으로 한(韓)의 다섯 집.

구모객두(勾牟客頭)의 간연 두 집.

구저한(求底韓)의 간연 한 집.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세 집, 간연 스물 한 집.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간연 한 집.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한 집, 간연 세 집.

객현한(客賢韓)의 간연 한 집.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간연 열 집.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간연 아홉 집.

구모로성(臼模盧城)의 간연 네 집.

각모로성(各模盧城)의 간연 두 집.

모수성(牟水城)의 간연 세 집.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한 집, 간연 세 집.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한 집, 간연이 일곱 집.

야리성(也利城)은 간연 세 집.

두노성(豆奴城)은 국연 한 집, 간연이 두 집.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한 집, 간연이 여덟 집.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두 집, 간연이 다섯 집.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한 집, 간연이 다섯 집.

태산한성(太山韓城)의 간연 여섯 집.

풍매성(農賣城)은 국연 한 집, 간연 일곱 집.

윤노성(閏奴城)은 국연 두 집, 간연이 스물 두 집.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 두 집, 간연 여덟 집.

전성(瑑城)은 국연 한 집, 간연 여덟 집.

미성(味城)은 간연 여섯 집.

취자성(就咨城)은 간연 다섯 집.

삼양성(彡穰城)은 간연 스물 네 집.

산나성(散那城)은 국연 한 집.

나단성(那旦城)은 간연(看烟) 한 집.

구모성(勾牟城)은 간연 한 집.

어리성(於利城)의 간연 여덟 집.

비리성(比利城)의 간연 세 집.

세성(細城)의 간연 세 집.

 

특기할만한 것은 당신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리저리 정복전쟁 다니시면서 포로로 삼았거나 멀리서 건너온 백제와 신라, 가야, 왜와 한족의 피정복민까지 함께 무덤을 지키게 하는 것.
그건 태왕의 유언이었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셨다.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관리를 시켰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까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 데려다 무덤을 지키며 소제하게 하라."

왕의 말씀이 이러했기에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를 데려다 묘를 지키게 했다.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예법을 잘 모를까봐, 다시 구민(舊民) 110가를 더 데려왔다.

『광개토태왕릉비』

 

이런 유언이 있었기에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고구려 원주민(....)인 국연(國烟)이 서른 집[家]에 정복민인 간연(看烟)이 3백 집, 모두 합쳐서 도합 330집이다. 광개토태왕이 죽고 2년이 지나 태세 갑인ㅡ서기 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 아들 거련이 그 묘를 산릉으로 옮겼고, 이 비석을 세우고 아버지의 공훈을 기리며, 수묘인을 두어 묘를 지키게 했다ㅡ고, 『광개토태왕릉비』는 전한다. 이러한 수묘인(守墓人) 즉 묘지기들의 신분에 대해, 백남운이나 왕진쿤(王健群) 같은 학자들은, 수묘인이 매매대상이 되고 전쟁포로였으므로 그 신분은 노비였을 거라고 봤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 위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해서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셔서 말씀하셨다.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

『광개토태왕릉비』


라고 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이미 이전에도 수묘인을 사고 파는 제도가 있었던 듯 싶은데, 고대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물건처럼 사고 팔린 것은 노비밖에 없다. 그걸 광개토태왕 때에 금지시키고 위반하는 사람은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다 벌을 받게 했다고 하는데, 언뜻 들어보면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수묘인이 자기 집을 유지하며 일정 한도의 자기 사유재산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노비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노비는 마소나 다름없는 그 집 재산이니까. 노비는 재산을 모으지 못한다. 그들은 태왕의 무덤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정 지역에 집단이주되었고, 경지(耕地) 등 그들에 대한 국가적 대책이 마련되었다. 군역(軍役)을 면제받은 대신에 수묘(守墓)의 역을 졌던 양민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수묘인은 국역을 지는 비자유민이었지만 노예는 아니었고, 국연과 간연의 관계는 호수(戶首)와 봉족(奉足)의 관계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수묘인들이 노비같아 보여도 단순한 노비는 아니었다는 것. 그건 다들 똑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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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업적을 평하면서 비문은 이런 말을 한다.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은택(恩澤)이 황천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四海)에 떨쳤노라.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었느니라.

『광개토태왕릉비』

 

세상을 고구려 중심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이 그들의 중심에서 세계를 보며 사방을 모두 오랑캐라 몰아붙이던 그 시대에, 고구려인들은 스스로가 하늘의 자손이고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했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천손이라 부르며, 사방 여러 국가들 가운데서 자신들이 가장 성스럽다고 자부하는 이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황천은 곧 하늘이고, 사해는 그 아래의 모든 것, 즉 천하(天下)이다. 고구려 사람들에게 그들의 태왕은 곧 천손(天孫)이었고 그들의 중심이었다. 중국 천자(天子)를 자신들의 중심이라 여기지는 않았단 말이다.

 

중국 사람들은 왜 모른단 말인가. 천하는 그들만이 중심이 되라고 정해놓은 것이 아니란 걸. 이 둥근 지구의를 돌려서 어디가 나오느냐에 따라, 중국뿐 아니라 일본도 인도도 티벳도, 심지어 우리도, 천하의 중심이 될수가 있는걸 말이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중국만의 천하가 있고, 일본에게는 일본 나름의 천하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우리의 천하가 있는 걸 말이다.

 

중국인들이 그들의 천하를 지키고 싶다면, 우리를 우리로서 인정하고 우리가 가진 천하를 건드리지 않는 것, 저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오랑캐를 오랑캐로 놔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구태여 멀쩡한 남의 천하를 자기 천하로 만들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최고라 믿으며 저들의 천하에 안주하느라 저런 추한 꼴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니다. 저들이 오랑캐라 불러도 좋다. 어차피 우리는 오랑캐다. 동방 오랑캐. 오랑캐니까 저들처럼 시시콜콜한 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한곳에 머물러 사는 지루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삶은 중국인들처럼 그 땅에 붙박이처럼 머물러 사는 농경민족의 삶이 아니라,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저 세상의 끝을 향해, 끝없이 움직이며 죽을 때까지 영원토록 달려나가는 기마민족의 삶이다.

 

광개토태왕이 그러했듯, 고구려인들이 그러했듯, 하나의 세계에 머무르지 말고 어디론가는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그것이 고구려인들이 살았던 삶, 그 삶에서 물려받아 우리 핏줄 깊숙이 간직한 유전자 알알이 하나 속에 잠들어 있는 진취적이고도 당당한 대륙적 기질을 되살려내어 광개토태왕이 만들고자 했던 '우리의 천하'를 만드는 길이 아닐까.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망할 것이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톤유쿠크 비문>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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