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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만나는 고구려] <3> 불꽃뚫음무늬금동관

[동아일보] 기사입력 2005.05.04. 오후 4:14 최종수정 2005.05.04. 오후 4:14 


평양 청암리토성 부근에서 나온 불꽃뚫음무늬 금동관. 위로 치솟아 타오르는 불꽃무늬는 고구려인의 진취적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진 제공 고려대박물관


‘삼국지(三國志)’나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은 머리에 절풍(折風·고깔 모양의 쓰개)을 썼다. 또 벼슬을 가진 사람(사인·士人)은 새의 깃털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고 했다.


지금까지 출토된 고구려 장식품 가운데 관(冠)은 그 예가 많지 않다. 그중 백미가 바로 평양 청암리 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4, 5세기경의 불꽃뚫음무늬 금동관이다.


띠 모양의 테두리 윗줄에는 인동초무늬를, 아랫줄에는 구슬무늬를 새겼고, 그 사이에 7개의 나뭇잎 장식을 넣었다. 테두리 위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나 바람에 세차게 날리는 구름 같은 무늬를 새긴 9개의 세움 장식(입식·立飾)으로 표현돼 있다. 이는 우리 눈에 익은 백제 무령왕의 금관 장식과 유사하다.


세움 장식 가운데는 가장자리를 불꽃무늬 대신 가위로 오려낸 다음 비틀어 꼬아 장식한 종류도 있다. 이는 고구려 장신구만의 특징적 기법이다. 맨 아래쪽 좌우에는 마치 옷고름과 비슷한 드리개를 별도로 만들어 길게 늘어뜨렸다.


이 금동관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이 썼던 실용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의 금동관이 신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4세기 말∼5세기 초 신라 무덤에서 나타나는 황금문화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그 기원은 고구려였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고구려 금동관의 특징적 요소인 금동판을 뚫어 무늬를 만드는 투조(透彫) 기법이나 촘촘히 오려 꼬는 방식 등은 신라 금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도움말 주신 분=이한상(李漢祥) 동양대 교수, 최장열(崔章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참고 북한 자료=조선유적유물도감 제4권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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