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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파 인물 유득공(柳得恭)이 서기 1784년에 {발해고(渤海考)}를 썼는데, 그가 서문 속에 말했다.
일본의 침략 시기에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가 유득공 등의 주장을 계속 발전시켜서 조선사의 발해사를 조선사 밖으로 배척한 것이 김부식의 잘못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1960년대 이후에 북한측에서는 이 학설이 한결 확대되어서 통일된 관점을 이루어, 재판(再版)된 {조선통사}에는 발해를 조선의 역사 가운데에 써넣어서 이 하나의 학설을 역사 교과서 형식으로 고정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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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론(발해-신라)은 근거 없다(중국-왕건군)
남북국시대론의 오류 시정
왕진쿤(王健群) 정진헌 옮김
1. 남북국시대론의 형성과 발전
발해국(渤海國)은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 대조영(大祚榮)이 당(唐)에 의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된 기초 위에서 우리 나라의 동북부와 조선반도의 북부에 건립한 왕국이다. 신라국은 진한 변한의 기초 위에 건립된 왕국인데, 뒤에 다시 백제 전부와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점유하여 조선반도의 남부를 통일했다. 7세기말에서 920년대까지 발해와 신라는 동시에 존재했고 똑같이 당의 번국(蕃國)이었는데, 그러나 그들은 민족, 강역, 역사전통상으로 모두가 각자 존재했고, 서로 관련이 없는 두 개의 국가며, 사서(史書)에도 종래에 모두 이렇게 기재되었다.
조선 이조후기 실학파 가운데 일부가 민족 의식, 국가 관념을 강렬히 구사하며 거리낌없이 사실(史實)을 왜곡하고 새 학설을 억지로 만들어서, 발해는 신라의 북국이니 마땅히 발해사를 조선사 속에 써넣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의 억측으로 천 년의 사실을 고쳤으니 이것이 '남북국시대론'의 시초다.
실학파 인물 유득공(柳得恭)이 서기 1784년에 {발해고(渤海考)}를 썼는데, 그가 서문 속에 말했다.
고려는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가 부진했음을 알겠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있었으니 고구려다. 부여씨가 서남에 있었으니 백제요, 박 . 석 . 김씨가 동남쪽에 있었으니 신라다. 이것이 삼국이니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만 하는데 고려가 이를 지었으니 옳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게 되자 김씨는 그 남쪽을 갖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에서 이를 짓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무릇 대씨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차지한 땅은 어떤 땅인가? 곧 고구려의 땅인데, 그 동 . 서 . 북쪽을 물리쳐서 넓혔을 뿐이다. 무릇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함에 이르러 왕씨가 통일하여 차지했으니 고려다. 남쪽으로는 김씨의 땅을 소유한 즉 모두 차지했으나 북쪽으로 대씨의 땅을 가졌는데 전부는 아니어서, 어떤 것은 여진으로 들어갔고, 어느 것은 거란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고려를 위한 계책은 마땅히 발해사를 빨리 지어 들고 가서 여진을 꾸짖기를, "어째서 나에게 발해의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곧 고구려의 땅이다."라고 하고, 장군 한 명한테 가서 거두게 했으면 토문(土門) 이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또 이를 가지고서 거란을 나무라기를, "왜 나에게 발해의 땅을 안 돌려주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라고 하고, 장군 한 사람이 가서 거두었으면 압록 이서를 가질 수 있었다. 끝내 발해사를 짓지 않아서 토문 이북과 압록 이서가 누구의 땅이 되었는지 몰랐으니, 여진을 꾸짖으려고 해도 할 말이 없었고 거란을 혼내고자 해도 말할 수가 없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된 것은 발해의 땅을 못 얻었기 때문이다.......
유득공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잘못 알았다. 그래서 {발해고}에 발해국은 당연히 조선사 체계 속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인정했다. 이것이 '남북국시대론'자가 맨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다. 실학자의 한 사람인 홍석주(洪奭周)는 그의 {발해세가(渤海世家)}에서 발해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고구려와 서로 이어졌다고 여겼으니, 그도 발해를 조선사의 체계 속에 넣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 논점은 이조후기 몇몇 실학자의 발해 역사관이 되었다.
일본의 침략 시기에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가 유득공 등의 주장을 계속 발전시켜서 조선사의 발해사를 조선사 밖으로 배척한 것이 김부식의 잘못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선사학계의 몇 사람이 계속해서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했는데,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유득공 등의 관점이고, 오직 유득공 신채호 등의 기초 위에 몇 가지 이유를 다시 찾은 것에 지나지 않아서 조금 보충하여 한 걸음 더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들 모두도 신채호와 한가지로 조선역사에 대하여 거대한 공헌이 있는 고려시대의 역사가인 김부식을 심하게 비난했다. 이유도 완전히 같아서 그가 '남북국시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대전 뒤에 '남북국시대론'을 밝힌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국에는 이용범(李龍範)과 이우성(李佑成)이 있고, 북한에는 박시형(朴時亨)과 주영헌(朱榮憲) 등이 있다.
1960년대 이후에 북한측에서는 이 학설이 한결 확대되어서 통일된 관점을 이루어, 재판(再版)된 {조선통사}에는 발해를 조선의 역사 가운데에 써넣어서 이 하나의 학설을 역사 교과서 형식으로 고정시켜왔다.
이상으로 겨우 '남북국시대론'의 형성과 발전에 관해서 한 번 요약 개괄했는데, '남북국시대론'이란 글을 쓴 사람이 아직 한둘이 더 있으나 내용이 비슷하므로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음을 용서하라.
2. 남북국시대론의 논점과 논거
남북국시대론자의 논점은 완전히 일치한 즉,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요 발해의 역사는 마땅히 조선역사 속에 써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남북국시대론자가 견지하는 논거도 대동소이하다.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와 이우성의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와 최치원(崔致遠)]은 남북국시대론자의 모든 논거를 개괄했다. 귀납하면 아래의 다섯 가지와 같다.
(1) 발해는 고구려 고지를 차지하여 존재했다. 그러므로 발해는 당연히 조선사 체계 속에 나열해야 한다.
(2) {구당서(舊唐書)}발해전(渤海傳)에 '발해말갈 대조영이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한 것은 발해는 고구려 사람이 세웠음을 증명한다. {신당서(新唐書)}발해전에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귀부한 것으로 성은 대씨다'라고 했는데, 그러나 이는 {신당서}의 지은이가 위조했다. {오대회요(五代會要)}의 설명과 {구당서}는 일치한다. {오대회요}에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고 하는데 대개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했다. 이 말에 대한 박시형 선생의 해석은 '처음에 당이 발해를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는 고구려의 별종이다'란 것이다. {오대회요}의 원문을 잘못 해석하여서 자신의 논점에 부합시키려고 했다.
(3) 일본의 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권10에 발해의 제2대 국왕인 대무예(大武藝)가 일본의 성무천황(聖武天皇)에게 보낸 국서(國書)를 기재한 가운데에 아래와 같이 썼다.
고구려의 거처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졌다.
같은 책 권20에는 발해의 제3대 국왕 대흠무(大欽武)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
같은 책의 권32에 대흠무가 일본의 왕에게 보낸 국서 가운데에 일찍이 '천손(天孫)'으로 자칭했는데, 주몽(朱蒙)은 원래 천제(天帝)의 아들이므로 천손이란 한 마디는 의심할 것도 없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의 왕공 귀족이 고구려 국왕을 천손으로 삼아서 스스로 자랑으로 여겼는데, 발해의 왕이 이런 특별한 영광을 나누어 누렸으니 또한 고구려 왕실 혈통 출신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이 모두가 발해는 고구려 사람이 세운 것이고, 발해는 당연히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4) 조선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북국(北國)'에 사신을 보냈다는 두 개의 기사가 있고, 지리지(地理志)에는 '북조(北朝)'라고 쓴 것이 한 곳이 있는데, 모두가 발해를 가리킨다.
또 신라 말기에 신라 사신과 발해 사신이 함께 당 조정에 조하(朝賀)하는데, 자리를 배열함에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의 위에 있게끔 요구했지만, 당의 황제가 허락하지 않고 여전히 신라 사신을 윗자리에 있게 했다. 이 때문에 신라 국왕이 일찍이 문신 최치원을 시켜 감사의 표문을 써서 당에 상주(上奏)하게 했다. 이 표문은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속에 보존되어 오는데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신라가 당시에 발해를 '북국' 또는 '북조'라고 불렀음을 설명하는데, 이것이 남북국시대의 유력한 증거다.
그밖에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 신라가 일찍이 대조영에게 5품 대아찬(大阿餐)의 질(秩)을 주었다고 했는데, 일찍이 대조영이 한 번 신라에 귀복(歸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가 이렇게 한 것은 대조영에 대한 책봉이 통과되기를 희망한 것이고, 하루아침에 전 국토를 통일하기를 기도한 것이다. 그런데 5품 대아찬이란 관질(官秩)은 신라 왕족 신분의 진골 귀족에 해당한다. 위에 서술한 사실은 신라인이 대조영은 고구려인이라고 인식했음을 드러낸다. 신라는 말갈인에 대해서 이렇게 쓸 수가 없었다.
(5) 발해 존속 기간에 일본인 스가와라미찌마즈(菅原道眞)가 편찬한 {유취국사(類聚國史)} 속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었다.
[발해국]은 주(州) 현(縣) 관(館) 역(驛)이 없고 곳곳에 촌리(村里)가 있는데 모두가 말갈 부락(部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은데 모두가 토인을 촌장(村長)으로 삼았다. 대촌(大村)은 도독(都督), 다음은 자사(刺史) 그 아래는 백성(百姓) 모두가 수령(首領)이라고 한다.
'토인'은 고구려인이다. 도독 . 자사 . 수령 등 지방관은 모두 고구려 사람이다. 후세 조선의 '양반(兩班)'과 같은데, 중앙 관직은 말할 것도 없이 지방 관직조차도 모두 그들이 독차지했다는 것은 고구려 사람이 발해국을 통치했음을 증명한다.
위에서 말한 논거들을 제외하고 또 무엇인가 하면, '대씨는 고구려 왕실의 고씨와 한가지로 모두가 높고 크다는 뜻을 가졌고, 고구려어의 대음(代音)이며, 고(高)와 대(大) 두 글자는 실재로 상통한다'는 것인데, 대씨가 바로 고구려 왕실의 후예라고 인정하는 등 오히려 황당무계한 얘기요, 또한 논쟁할 필요가 없으므로 귀납하지 않는다.
3. 남북국시대론의 논거는 사실 왜곡.
'남북국시대론'은 후기의 학자가 억측하여 만든 학설인데, 그 논거가 어떤 것은 사료에 대한 잘못된 이해고, 어떤 것은 사실에 대해 왜곡을 가한 것이며, 또 어떤 것은 곧 후기의 민족 관계로 천여 년 전의 각 민족 국가에 민족 감정을 강하게 더해서 이렇게 필연적으로 착오를 빚었다. 문제를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남북국시대론'자가 가진 각종의 논거를 분석하여 그 잘못된 점을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다.
(1) 발해는 고구려의 고지(故地)를 점유하여 존재했으니 마땅히 조선사 가운데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합리성이 없다. 현도 . 낙랑 . 요동이 어찌 중국의 고지가 아니겠는가? 달리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대에 민족의 흥망과 강역의 변천은 언제나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말갈족이 흥기하여 고구려의 고지에 발해왕국이 건립되어서 역사는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으며 고구려의 역사와는 연계되지 않았다.
남북국시대론자는 이 한 가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리하여 민족 문제에 있어서 대대적으로 논란을 펴서, 발해를 강제로 고구려 계통으로 획입(劃入)하고, 또한 고구려 . 신라 . 백제가 동족(同族)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즉 발해를 조선사 체계로 편입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말갈과 일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예맥(穢貊) . 신라 . 백제와도 일족이 아니다.
신라와 백제는 원래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에 속하고, 예맥은 한반도 중부의 동쪽 지역에 있었으며, 고구려는 곧 동옥저 왼쪽 가까이 거주한 부여(扶余) 별종(별종 문제는 아래에서 논의한다)이었는데, 그 뒤에 강대해져서 국가를 세우고 현도 . 낙랑 . 요동을 점유했다. 그것과 신라는 민족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 관계에 대한 설명 모두가 각각 별도여서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
근세의 학자는 부여와 예가 연계되어서 한 곳에 있었다고 혼동했다.
부여는 숙신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건립된 정권이다. 그것은 숙신 계통의 왕국이고, 예와 한과도 족속의 인연이 없다. 중국의 정사(正史)에는 부여와 예를 따로 전(傳)을 만들었다. 중국의 고대 전적(典籍)에도 부여에 대해서 예나 맥이라고 일컫지 않았다. 기사 가운데에 때때로 그것들을 병렬했는데, 이는 바로 그것들이 하나의 민족이 아님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북으로 오환 . 부여와 이웃하고, 동으로는 예맥 . 조선 . 진번의 재부를 통괄했다.({사기}화식렬전)
흉노를 이기지 못했고, 부여 . 예맥이 다시 일어나니 이것이 큰 근심이다.({한서}왕망전)
건안 원년 겨울 12월. 고구려 . 마한 . 예맥이 현도성을 포위했다.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주 . 군과 더불어서 힘을 합쳐 토벌하였다.({후한서}안제기)
연강 원년.......예맥 . 부여선우......각각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삼국지}위서 문제기)
이 기사들은 근본적으로 부여와 예맥이 족속에 있어서 어떤 연계가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오해를 일으킨 원인으로서 주요한 것은 {삼국지}위서 부여전의 기사다. 옮겨 쓴다.
나라 안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에 도망쳐온 사람들이......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각종의 옥이 있는데 여러 대를 물려온 물건이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긴다. 노인들이 '선대에서 내려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도장의 글자는 '예왕지인'이라고 했다. 나라 안에 옛 성이 있는데 '예성이라고 한다. 대체로 원래 예맥의 땅이다. 그러나 부여왕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스스로 도망쳐온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 문단의 기사는 문제가 있으니 전문(傳聞)과 추측의 말을 사서에 기입한 것은 역사서술법에 어긋난다. 다만 수사(修史)한 것이 오직 추측이고 결코 긍정한 적이 없는데, 후세의 사람이 이로써 부여가 예맥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일본인 이케우치히로시(池內宏)가 불내예(不耐濊)의 사실이 부여전 속에 남입(濫入)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합리적이다.
위에 기술한 바를 종합하면, 부여든지 일찍이 신복(臣服)한 부여의 구려(句驪)든지 모두가 한과 예와는 연원이 터럭만큼도 없다. 호태왕비문의 기록에 호태왕이 남쪽으로 백제를 쳐서 남녀를 빼앗았는데, 그가 약탈해 온 사람을 일컬어 '내가 빼앗아온 한과 예'라고 하여 고구려는 이미 한도 예도 아니라고 증명했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 자신의 얘기여서 아무튼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시 조선반도에서 고구려 . 신라 . 백제 셋은 각자 존재한 국가고, 민족이 같지 않으며 서로 싸웠다. 660년대에 백제와 고구려가 잇달아 멸망되었고, 신라가 백제의 전 영토와 고구려의 일부를 영유했고, 다만 민족만이 결코 통일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신라 말기에 또 후삼국시대가 나타났고, 반세기나 지난 930년대가 되어서야 왕건이 세운 고려가 조선반도의 남부를 통일했고, 민족이 겨우 융합하기 시작하여 점차 단일 민족의 길로 달려갔다. 후기의 민족 정황으로 전기의 민족 관계를 개괄하는 것은 잘못이다. '신라가 자기의 동족 국가인 고구려와 싸웠다'(박시형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를 보라)고 하는 것은 역사 사실을 위배한 것이다.
12세기 중엽 고려 인종 때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했고, 고려가 영유한 토지는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 세 국가가 존재한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하고 고려 역사 속에 들여놓았는데, 이것은 틀렸다고 할 비난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발해는 이미 고려의 판도 안에 있지 않았고, 민족도 신라 . 고려와 동족이 아닌데, 꼭 발해를 조선사 체계 속에 편입하려고 하여서 김부식이 남북국시대를 쓰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니 이는 조금도 합리적이지 않다.
신라 말기에 궁예가 신라에 반항하여 고구려 정권을 중건하였으니 겨우 그가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불릴 만하다. 궁예가 군사를 일으키고 제도를 갖추는데 신라 후백제와 전투한 몇십 년 동안에 끝끝내 발해와 정치상 군사상의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았고, 그도 일찍이 발해의 왕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래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말할 것 없이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할 수 없다.
(2) {구당서}발해전에 '발해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했다. 남북국시대론자는 '고려별종(高麗別種)'은 고구려라고 하고, 발해는 고구려 사람이 세운 국가라고 인정한다. {신당서}발해전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귀부한 것인데 성은 대씨다'라고 했는데, 다만 {구당서}에 비하여 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논지를 가진 사람의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해서 곧바로 조금도 근거가 없이 {신당서}발해전이 위조되었다고 한다. {오대회요(五代會要)}에 '발해는 원래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대개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했다. 남북국시대론자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처음에 당나라는 발해를 말갈이라고 일컬었는데, 실제로는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하였고, 이로써 {신당서}의 기사에 반대했다. 이들 해석하는 사람이 중국어문법을 모르는지 아니면 고의로 곡해했는지 정말 모르겠다.
실제로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의 표현법은 완전히 일치하고, 다만 상술한 입론자는 '별종'이란 두 글자를 충분히 알지 못했을 뿐이다. '별종'이란 두 자는 중국 사서에 자주 보일 만큼 적지 않은데, 모두가 종족이 같지 않으나 서로 예속된 것을 가리킨다. '고구려의 별종이다'는 고구려족이 아니라는 것뿐만 아니라 일찍이 고구려에 예속(의부)한 것임을 말한다. 세 개의 사서에 기록된 바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니 불공평하게 구분하는 것은 정말 필요하지 않다. 만약 이 사람이 해석한 어떤 것과 같다면, 대조영은 곧 고구려 사람인데, 어떤 사서라도 반드시 '대조영은 고구려 사람이다'라고 직서(直書)하지 절대로 '고구려 별종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구당서}신라전에 '이정기(李正己)는 고구려 사람이다'라고 했으니, 기재하는 법은 특별히 명확했다.
세 개의 사서를 비교한 결과 {신당서}와 {오대회요}를 대조하면 훨씬 더 확실할 것이다. {구당서}는 대조영이 고구려 사람이 아니고 다만 일찍이 고구려에 의부했다고만 했다. 그래서 {신당서}와 {오대회요}는 곧 대조영은 말갈인인데 일찍이 고구려에 의부했다고 분명히 설명했을 뿐이다.
(3) {속일본기(續日本紀)}권10 대무예의 국서에 '고구려의 거처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졌다'란 기록은 발해가 고구려 고지(故地)를 영유했고 또 부여의 문화를 구유(具有)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히 옳다. 다만 이 두 구절이 발해 대씨가 곧 고구려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법은 없고, 마찬가지로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설명하는 법도 없다.
남북국시대론자가 많이 인용하는 {속일본기}권22에 기록된 '고구려 국왕 대흠무가 말합니다'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대흠무가 국서 속에서 자신을 일컬은 것이다. 이미 발해 국왕 모두가 자기를 고구려 국왕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떤 논거와도 비교 못할 만큼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래서 이 조문은 남북국시대론자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바가 되었고, 남북국설에 대해서 의논을 더욱 분분하게 했다. 문제를 명백히 하려고 우리들이 관련 기사를 아래와 같이 뽑아 써도 무방할 것이다.
[천평보자 2년 9월] 정해. 오노노미다마모(小野朝臣田守) 등이 발해에서 왔다. 발해 대사......양승경 이하 스물 세 사람이 다마모를 따라와서 내조(來朝)하니 곧 월전국(越前國)에 안치했다.({속일본기}권21)
[12월] 임술. 발해사 양승경 등이 입경했다.
[천평보자] 3년 봄 정월 무진. 초하루에 태극전에 가서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문무백관과 고구려 번객 등이 각각 의례에 따라 배하(拜賀)했다.(같은 책, 권22)
경오(정월 3일). 황제가 헌(軒)에 오시니, 고구려 사신 양승경 등이 방물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고구려 국왕 대흠무는 말합니다. 온누리를 밝게 살피신 일본의 경명황제께서 승하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대단히 흠모하여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보국장군인 양승경과 귀덕장군인 양태사 등을 차출하여 표문과 공물을 가지고 가서 입조하게 했습니다"고 했다. 말씀하시기를, "고구려 국왕이 선왕께서 승하하셨음을 전해 듣고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양승경 등으로 하여금 와서 위문하게 했다. 들으니 슬퍼하고 흠모함이 더욱 깊다. 다만 세월이 이미 바뀌어서 나라 안이 평안하다. 그러므로 그 예로써 대하지 못한다. 그리고 옛 마음을 잊지 못하여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니 정성이 지극하므로 매우 가상하다."
이 글들을 보면 어긋나고 잘못되어서 실제 증거로 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내 소견을 아래에 약술한다.
첫째, 천평보자 2년 9월 정해에 양승경을 발해 사신이라고 했고, 같은 해 12월 임술에 잇달아 '발해사 양승경 등이 입경했다'고 말했으며, 칠일 뒤인 천평보자 3년 정월 초하루에 갑자기 '고구려 번객'으로 개칭했는데, 이는 수사자의 기술 혼란이라고 할 수 있을 뿐 달리 해석할 수는 없다. 당시에 바다 멀리 떨어져서 사실을 잘 모르는 일본 사람이 발해를 고구려와 혼동했으므로 이런 혼란이 있었다. 때때로 한 기사 중에 발해 . 고구려가 함께 나오므로 오히려 이런 종류의 혼란을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수사자가 고구려와 발해를 혼동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발해 사람이 스스로 고구려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둘째, '고구려 국왕 대흠무는 말합니다.......'는 국서가 아니고 사신의 주언(奏言)이다. 국서와 주언은 {속일본기}의 기사 중에 엄격한 구별이 있다. 발해왕이 글을 보내 온 것을 사신이 '그 국왕이 글을 올렸다', '그 국왕의 왕계(王啓)를 올렸다'라고 했다. 일본에서 회답하면 곧 '새서(璽書)' 또는 '그 국왕에게 글을 내려줬다'고 했다. 발해 사신의 얘기는 곧 '주언' 또는 '주칭(奏稱)'이라고 했다.
효겸여제(孝謙女帝)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 5월 을축(乙丑)에 발해 사신 모시몽(慕施蒙) 등이 배알하면서 다만 '발해 국왕은 말합니다......'라고만 주칭하니, 이에 효겸여제가 새서하는 속에 발해를 꾸짖어 '어째서 올해의 조하에도 상표문(上表文)이 없는가'라고 했다. 위에서 인용한 양승경 등의 주언과 모시몽 등의 주칭은 서로 같아서 바로 사신이 말한 것이지 대흠무가 자칭한 것이 아니다. 실제는 같은 모양으로 수사자가 혼동한 것이지 양승경이 원래 얘기한 것이 아니다. 일개 사신이 감히 국왕의 말을 함부로 고치겠는가? 그럴 리는 절대로 없다.
셋째, 발해 사신 양승경 등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 마침 효겸천황이 양위하고 순인천황(淳仁天皇)이 등극하였다. 이것은 곧 국가의 큰 경사인데, 발해 사신은 새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지 않고 오히려 국상을 조문하니 예에 맞지 않다.
주언 속에 '황제께서 승하하셨다'고 말한 것은 2년 반 이전에 사망한 성무천황을 가리키는 것 같다. 첫째는 두 군주가 건재하고, 둘째는 전전의 군주가 죽었고 또 2년 남짓 지났는데, 이때에 국상을 조문했다니 조의와 체제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가령 발해 사신이 바다 멀리 떨어져서 소식이 불통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양승경 등이 일본에 도착한 지 이미 3개 월 남짓 되었는데도 정황을 알지 못하고서 이 주언을 올렸다는 것인데 그러면 더욱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나는 이 글은 후세의 사관이 사책(史冊)에 남입했다고 이해한다.
일본 최초의 가네자와본(金澤本) {속일본기}에는 이 글이 없다. 그러니 '고구려 국왕 대흠무가 말합니다'는 이와 같이 전혀 발해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것을 증거로 삼았으니 똑같이 성립될 수가 없다.
발해 국왕이 천손이라고 자칭했다는 얘기에 이르러 그것은 다만 천자보다 한 등급 작아 감히 잠월하지 않고,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란 출자(出自)'와 어울리는 칭호라는데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을 설명할 뿐이다.
(4) {삼국사기}신라본기 중에 일찍이 발해를 '북국'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라가 발해를 자신의 '북국'이라고 인식했음을 증명하고, 또 신라도 발해를 '북조'라고 일컬었다고 설명한다. 이 모두가 글자만 보고 대강 뜻을 짐작한 것이고, 터무니없이 날조한 결과며,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같다고 볼 수 없게 한다.
여기서 먼저 밝히자면, '북조'는 결코 발해를 가리키지 않는다. 원문은 {삼국사기}지리지에 나오는데, 국내성(國內城) 조문의 아래에 김부식이 안어(按語)를 첨부하기를, '즉 이 성은 또한 북조의 경내에 있는데, 다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 '북조'는 금국을 가리키므로 '북국'과 동렬이 아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발해를 북국이라고 한 것이 두 곳 있다.
(원성왕 1년) 3월. 일길찬 백어로 북국에 사행하게 했다.
(헌덕왕 4년) 가을 9월. 길찬 숭정을 북국에 사행하게 했다.
'북국'은 일반적으로 북방 제후의 나라를 가리킨다. {북사(北史)}위기(魏紀)에 '위(魏)의 선조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로부터 나왔다. 황제의 아들은 창의(昌意)요, 창의의 어린 아들을 북국에 봉했다.'는 것이 곧 그 예인데, 어느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일컫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북조'는 곧 북쪽에 있는 조정을 가리킨다. {오대사(五代史)}진고조황후이씨전(晉高祖皇后李氏傳)에 '옛날 선제(先帝)께서 태원(太原)에서 일어나셨을 적에 아들 한 명을 가려내어 머물러 지키게끔 하시고자 북조의 황제를 꾀했는데, 황제는 우리에게 속했고, 후진(後晋)이 거란에게 칭신(稱臣)했으므로 거란을 북조라고 한다'고 했다. '朝'란 신속(臣屬)의 관계를 나타낸다. 고려 인종 4년(1126) 금국에 칭신했으므로 금국을 북조라고 일컬었다. 존경을 나타내고자 국명을 직서할 수가 없었다. 금국은 태조 이래로 곧 '여진 .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표명했다. 마찬가지로 금왕조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발해 국명을 쓰지 않았고, 다만 발해와 더불어 또한 신속 관계가 없어서 이에 '북국'이라고 상대적으로 개칭했다. 이 설을 따르면 '북국'은 발해에 대한 고려조의 칭호지 발해에 대한 신라의 칭호는 아니다.
'북국'의 또 다른 출처는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다.
당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에 신라 발해 모두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하(朝賀)했다. 옛날의 사례를 살펴보면, 발해 사신의 자리는 모두 신라 사신의 아래에 있었다. 이번 조하에는 발해 사신이 자기 나라가 강성하고 신라의 국세가 쇠미하므로 소장(訴狀)을 올려서 자기의 자리를 마땅히 신라 사신의 위에 배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당의 소종이 결정하기를 '국명의 선후는 강약을 비교하여 칭하지 않고, 관제(官制)의 등위(等威)는 올해에 성쇠로써 고치니, 마땅히 옛 관례를 따라야 하니 모두 잘 알아서 공포하라'고 했다. 이에 발해 사신의 자리는 계속해서 신라 사신의 아래였다. 이 일로 신라 국왕이 문신 최치원에게 감사하는 표문(表文)을 쓰게 해서 소종에게 올렸는데, 황제가 영민하고 결단성이 있으며 처리가 정확함을 칭송하고 아울러 발해가 당연히 하위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이 표문을 나중에 {최문창후전집}에 넣고 제목을 [사불허북국거상표]라고 했다.
이 표문은 현재 남북국시대론자의 주요한 근거의 하나가 된다. 첫째는 표문의 제목에 발해를 북국이라고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표문 속에 발해가 당연히 하위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에 처음 발해가 건국될 때에 신라가 일찍이 대조영에게 5품 대아찬의 관질(官秩)을 주었다고 했는데, 이것으로 발해는 반드시 신라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당연히 성립할 수 없다.
이 감사의 표문을 상정할 때에는 제목이 있을 수 없다. 표문의 제목은 나중에 전집을 편수할 적에 보태어진 것이다. 전집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지은이가 죽은 뒤에 뒷사람에 의하여 정리 편집된 것이다. 신라가 멸망될 때에 최치원은 아직 생존했었고, 고려 현종 때가 되어서 문창후로 추증되었다. {최문창후전집}으로 칭했음은 책이 완성된 것은 현종 때보다 빠를 수가 없었음을 밝혀준다. 이러면 표문 제목 속의 '북국'도 똑같이 고려시대의 칭호라고 인정할 수 있다.
대조영이 5품의 대아찬이란 관질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자면, 그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대조영이 접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두 알 수가 없다. 신라 사료 중에 여태껏 발해가 번(蕃)이라고 한 기록은 없다. 설령 그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조영이 처음으로 정권을 세울 당시에 이웃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신라와 통호(通好)했다면, 신라는 일찍이 한 번 대조영에게 대아찬의 허직(虛職)을 주었는데 오래지 않아 대조영은 곧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봉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신라와의 관계를 결속했는데 신라가 이 일을 다시 제기하였으니, 그 뜻은 발해가 원래 소번(小蕃)였으므로 당연히 아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뿐이지 도리어 무엇을 밝힐 수 있는가? 그래서 신라는 일찍이 대씨에게 대아찬의 관질을 주었으니 곧 발해는 의당 신라에 속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지나쳤다. 신라 국왕과 고려 국왕 모두가 일찍이 이웃 나라로부터 봉작을 받았다는데, 또한 장차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한 가지만을 가리키고 그 나머지는 헤아리지 않는가? 표문 중에 몇몇 중요한 기사가 있는데, 어째서 유독 보고도 보지 못하는가? [사불허북국거상표]에 명확히 써놓았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무리란 고구려가 아직 멸망되지 않았을 때에 원래 더부살이 부락의 말갈 족속으로 그 사람이 참으로 많았는데 이것이 속말 소번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신라 사람이 쓴 것이고, 신라를 대표하는 문서다. 그것은 발해가 속말말갈인의 국가요, 건국하기 전에 일찍이 고구려에 의부했다고 한다. 이것과 {구당서} . {신당서}의 기사가 완전히 일치한다. 신라 사람이 어찌 일찍이 발해를 자기의 북국이라고 보았는가? 그리고 어디에 무슨 남북국시대가 있는가?
(5) 남북국시대론자는 일본 사서 {유취국사} 속의 발해와 관련된 사료를 해석하는데 잘못된 억단이 많다. '토인(土人)'은 즉 해당 지역에 사는 백성인데, 어떤 사람은 원래의 부락민이라고 하며, 이밖에는 다른 해석이 전혀 없고, '토인'은 곧 '고구려 사람'이라고 강경히 말하는데 어떤 사전(辭典)이나 전적(典籍)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백성이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은데 모두가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라는 문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것은 반드시 당시의 역사 정황에 근거해서 분석을 진행해야 한다.
{신당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왕사(王師)가 평양을 차지했는데, [백산부(白山部)]는 그 무리의 대다수가 당으로 들어 왔고, 골돌(汨 ) 안거골(安車骨) 등은 모두 흩어져 달아나 숨어서 듣지 못했다"고 했다. {구당서}발해전에 '대조영은 용맹하고 용병을 잘했는데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귀부했다'고 했다. 말갈 부락민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짐을 겪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 모두가 원래의 부락을 잃어버렸으므로 새 부락으로 투항해갔다. 새 부락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곧 그곳의 토인보다도 투항해온 사람이 더 많은 국면을 이루었다. 돌아온 사람이 원래 부락의 명칭을 잃어버렸고, 다만 말갈이라고 통칭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지역의 원주민(토인)은 곧 원래 부락민의 명칭을 여전히 지녔다. 부락 추장은 세습이어서, 그 지역의 거주민보다 돌아온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아도 그 지역 부락의 추장이 여전히 수령(首領)이었다. 이것이 바로 '모두가 토인을 촌장으로 삼았다'고 한 원인이다. 일본 사람이 자기의 견문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비록 전모를 다 볼 수는 없었으나, 다만 기록한 것은 사실에 속하는데, 오직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을 뿐이다. 토인은 곧 원주민이고, 마찬가지로 말갈의 한 갈래에 속하며, 결코 무슨 고구려 사람은 아니다. {유취국사}를 편찬한 스가와라미찌마즈(菅原道眞)와 이 정황을 진술한 재당학승(在唐學僧) 에이츄(永忠) 모두가 한학(漢學)이 매우 깊었고, 그들은 고구려의 정황에 대해서도 밝았는데, 동일한 자료 속에 고구려 멸망의 상황을 기술했다. 그들이 고구려 사람을 토인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만약 촌장 모두가 고구려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어째서 직접 "모두가 고구려 사람을 촌장으로 삼았다."라고 쓰지 않았을까?
이상 논의한 바는 지면이 제한되어 철저히 할 수가 없었고, 다만 남북국시대론자가 지닌 논거를 겨냥했으며, 사실에 의거해서 대략 분석하여 그 잘못을 가려낼 뿐이다. 나 자신의 학식이 한계가 있어서 논의한 바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박식하신 여러분께서 가르쳐줘야 한다.
작자 직장: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책임 편집: 田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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