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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남북국시대론(발해-신라)은 근거 없다 - 왕진쿤(중국)  http://tadream.tistory.com/6803

왕건군의 [남북국시대 비판]을 분석 비판한다
王健群 ['南北國時代論'糾謬]에 대한 分析과 批判
鄭鎭憲


1. 머 리 말

발해(698∼926) 연구는 사료의 결핍으로 매우 어렵다. 더구나 발해인이 손수 남긴 사료가 아주 적어서 현재 많은 연구자와 업적이 있지만 그 내용과 질은 크게 진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발해 연구와 관련된 다른 문제로는 발해사의 귀속을 들 수가 있다. 현재 발해의 영역 일부를 소유한 나라마다 발해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각 다르게 주장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지방 봉건 정권의 하나라고 하여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러시아에서는 말갈족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시대를 이루었으므로 한국사의 체제로 편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한국과 중국이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과연 발해사는 어느 나라의 역사일까? 

그런데 발해 관련 학설은 한국의 남북국시대론이 맨 먼저 나왔다. 조선 정조 9년(1784)에 북학자 유득공(1748∼1807)이 {발해고(渤海考)}(1784)의 서문에서 삼국시대 다음에 남북국시대가 이어졌다고 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된 뒤에 북쪽에는 발해 그리고 남쪽에는 신라, 즉 백제의 전지역과 고구려 영토의 남부를 차지한 이른바 통일신라가 양립한 시기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이 주장이 나온 뒤로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재까지 여러 연구자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방증 자료와 해석이 덧붙여진 것이 바로 남북국시대론이다. 

최근에 발해사의 귀속에 관심을 가진 중국에서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강조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 조직적으로 간단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자신들만의 논리와 주장을 펴왔다. 특히 여러 소수 민족을 포함한 현재 중국의 정책과 발해사의 귀속 문제가 연관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그들의 연구 내용은 오직 비판을 위한 비판과 감정적 해석 그리고 큰 줄거리와 관계가 없는 지엽적이고 국소적인 항목의 잘잘못을 지적하는데 열중해왔다. 결국 그들은 전근대의 역사가인 유득공과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들까지도 공박한다. 이는 그 옛 시대에 중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발해사의 귀속을 명백히 언급한 바가 없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그 업적과 주장이 너무 많고 명백한데서 오는 불안감에서 드러났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중진학자로서 고구려 광개토경호태왕의 비문과 관련된 많은 연구 업적을 낸 왕진쿤(王健群)의 연구 논문인 ['南北國時代論'糾謬]를 객관적으로 분석 . 비판하고자 한다. 고구려 연구자가 발해사의 귀속을 언급한 것도 흥미로운데, 더구나 발해의 귀속, 즉 고구려 계승 문제와 직결된 남북국시대론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고 했으니 그 결과가 참 궁금하다. 

또한 남북국시대론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왕진쿤의 논문에 대해서 진실 여부를 가리는 것이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가 치밀하게 남북국시대론의 기본 요소들을 공박한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그 진위만큼은 명확히 가를 필요는 있다.


2. ['南北國時代論'糾謬]의 얼개

먼저 왕진쿤의 논문이 어떤 얼개로 되었는지 살펴보자. 
이 글은 모두 세 개의 소제목으로 되었는데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북국시대론의 형성과 발전.
   2. 남북국시대론의 논점과 논거.
   3. 남북국시대론의 논거는 사실 왜곡.

이 중에서 '1. 남북국시대론의 형성과 발전'은 논문의 머리말에 해당된다. 간략하게 발해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서 남북국시대론이 언제 누구에게서 비롯되어 현재 어떤 상태인가를 정리했다. 이로써 중국의 연구자들이 남북국시대론을 어떻게 알고 있고, 무엇을 주안점으로 삼으며,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다소 알 수 있다.
 
다음으로 '2. 남북국시대론의 논점과 논거'를 보면, 모두 다섯 가지의 큰 논거를 들고는 이것들이 곧 남북국시대론자들의 논점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여기서 그는 주로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와 이우성의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이란 두 논문을 살펴서 위의 다섯 가지 논거를 간추렸다고 했다.

마지막의 '3. 남북국시대론의 논거는 사실 왜곡'은 본론이자 결론 부분이다. 남북국시대론의 논거를 사료를 찾아 그 당시의 상황과 본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마지막에는 아주 간단히 '다만 남북국시대론자가 지닌 논거를 겨냥했으며, 사실에 의거해서 대략 분석하여 그 잘못을 가려낼 뿐이다'라고 했다. 잘못을 가려냈으니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말투다. 그러나 발해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의 연구자 대부분이 남북국시대론을 견지하고, 그가 열거한 남북국시대론의 논거들은 모든 남북국시대론자에게 공통된 것이라면, 이것은 그리 평이한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남북국시대론과 전후(前後) 한국의 발해 연구자 모두와 한국사 체계 전반을 허위와 날조와 왜곡으로 낙착시키는 위협적인 표현이다.   

왕진쿤의 논리 전개의 한 특징을 보면, 어떤 용어나 사실을 소개할 적에 그는 자신의 견해나 인식을 미리 두괄식으로 강력한 문투로 정의하고서 그에 관한 증거를 부연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인식이나 견해를 생각하게 하고 그에 따른 예증을 밟아가서 종국에는 그의 견해와 인식에 수긍하게 한다. 물론 독자가 자신의 견해를 확립했으면 흔들리지 않겠지만, 논지의 초점이 된 사항에 관해서 아무 식견이 없는 경우에는 자연히 비판을 고려하지도 못한 채 수긍하기 십상이다. 앞으로 이점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남북국시대론의 형성과 발전'의 검토

이것은 논문의 머리말에 해당된다. 첫 문단에 발해에 대한 그의 견해를 간단히 밝혔다. 이는 중국의 발해 연구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결론 부분에 써야 좋겠는데 불쑥 논문의 맨 첫머리에 나와서 손대기에 망설여진다. 그래서 이 글의 끝에서 자세히 언급하려고 한다.

그는 '남북국시대론'의 시말에 관해서 정리하는데도 앞서 지적한 방식을 썼다. 맨 처음에 '남북국시대론'의 시초를 언급하고, '이조후기 실학파 가운데 일부가 민족 의식과 국가 관념을 강렬히 구사하여 거리낌없이 사실을 왜곡하고 새 학설을 만들어서, 발해는 신라의 북국이니 마땅히 발해사를 조선사 속에 써넣어야 한다고 했다.'라고 했다.
 
실학자들이 강렬한 민족 의식과 국가 관념을 가졌다고 한 점이 의문이다. 물론 실학의 특성 가운데가 하나가 민족성이라고 한다. 실학을 처음 본격적으로 연구한 때가 일제강점기다. 민족 존폐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민족 정신을 강조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 때여서 자연히 실학자들의 저술에서 민족성을 강조할 것들을 찾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근대 국민국가 시대의 민족 의식이나 국가 관념과 부합한다고 보는 것은 모순이다. 국가와 민족을 최우선으로 섬기는 그런 의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들어서 역사를 왜곡하고 새로 학설을 만든 것이 바로 '남북국시대론'이라고 했다. 그가 남북국시대론을 주창한 실학자를 선진적인 인물로 칭송할 리는 없으니, 그 자신이 근대 국민국가 시대 이래의 민족과 국가 관념에 얽매어서 이렇게 부적절한 언급을 했다고 본다. 과거의 중국 조선 일본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앞세워 이런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더구나 그는 '발해는 신라의 북국이니 발해사를 조선사 속에 써야 마땅하다'고 한 것을 강조했다. 이것은 이우성의 말이다. 그러나 근원은 유득공의 언급이다. 그러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예로서 그는 남북국시대론의 시초로서 {발해고}에 실린 유득공의 서문을 소개했다. 그 어디를 봐도 발해가 신라의 북국이란 표현은 없다. 다만 삼국을 들고서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의 상황, 즉 지금까지 이른바 통일신라로 불린 시대를 언급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는 그 남쪽을 갖고 대씨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에서 이를 짓지 않았으니 잘못이다.'고 했을 뿐이다. 삼국의 판도 안에 발해와 신라가 각각 남과 북으로 양립된 상태를 지적하고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을 '발해는 신라의 북국'이라고 해석한 것은 틀렸다. 크게 보아 그 의미는 차이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 종래 있었던 신라와 그 북쪽의 발해를 북국이라고 했다면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북쪽의 발해, 즉 북국이란 뜻이 되어서 그 의미가 무척 협소해진다.
 
그러나 유득공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정립의 판도가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변화에 따라서 발해와 신라로 양립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라고 통칭해서 그 전 시대의 삼국시대와 대비한 것이다. 만약 이런 역사 흐름을 반박하고 거부하려면 '남북국'이란 말보다 먼저 '삼국'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삼국'이 조선사가 아님을 밝혀야만 그 뒤를 잇는 '남북국' 특히 그 중의 발해가 조선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진쿤은 유득공의 서문에 대해서 끈질기게 반박한다. '유득공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잘못 알았다. 그래서 발해국은 조선사 체계 속에 들여와야 한다고 인정했다.'라고 지적했다. 유득공의 서문을 보면, '무릇 대씨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차지한 땅은 어떤 땅인가? 곧 고구려 땅인데 그 동쪽 서쪽 북쪽을 물리쳐서 넓혔을 뿐이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지연과 혈연으로 발해는 고구려를 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대한 고구려가 내부 혼란에 의해서 무너진 뒤에 고구려 영역에서 그와 연결된 어느 누가 나라를 일으켰는가? 발해가 유일하다. 이렇게 분명한 역사에 의거해서 발해는 곧 고구려라고 잘못 알아서 결국 발해를 조선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한 것이 옳은가? 더구나 앞서 왕진쿤은 '7세기말에서 920년대까지 발해와 신라는 동시에 존재했고 똑같이 당의 번국이었으나 그들은 민족 강역 역사전통상으로 모두가 각각 존재했고 서로 관련이 없는 두 개의 국가며 사서에도 종래에 모두 이렇게 기재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발해와 신라가 무관한 존재임을 그는 민족 강역 그리고 역사전통상의 요소를 들어서 말했다. 그러면 민족상 고구려와 발해는 어떤가? 또 강역 즉 영토상 그리고 역사전통상의 고구려와 발해는 어떤가? 신라와 발해, 거란과 발해, 당과 발해 중 어느 무엇보다도 밀접하지 않은가? 그러면 유득공이 언급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이 백 수십 년 전의 옛날의 역사가가 민족과 강역을 들어서 그 친소 관계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고, 현재의 사가는 괜찮다는 것인가? 오히려 전근대의 사가가 현재의 사가가 포착한 기준이나 근거를 미리 언급했다면 그 탁월성은 이미 드러난 것이 아닌가?

왕진쿤은 유득공의 주장을 이은 것으로 {발해세가(渤海世家)}를 쓴 홍석주(洪奭周)를 들었다. 그는 홍석주가 발해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고구려와 서로 이어졌다고 여겼으니 발해사를 조선사의 체계에 넣은 것이라고 봤다.

나는 일찍이 발해의 강역을 생각했는데, 남으로는 신라와 닿았으니 단군 기자 위만 그리고 고구려의 고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발해의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은 어떤 일인가!

이 가운데 계승이라고 언급한 것은 없다. 다만 발해의 영역을 보니 과거의 단군 기자 위만조선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가 많이 있었다는 뜻이다. {발해세가}에는 계승이란 표현은 없다. 속말말갈을 언급하면서도 '언제나 고구려에 귀부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고구려의 별종이라고도 한다'고만 했다.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연(地緣)으로 연원을 찾아보면 고조선까지 올라간다고 밝혔을 뿐이다. 이것을 계승 운운하면 홍석주의 본의를 오인할 위험이 있다.

그는 유득공과 홍석주의 논점이 실학자 몇 사람의 역사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을 열거하면 성해응 한치윤 한진서 정약용 이규경 그리고 김정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공통으로 유득공의 남북국시대론을 수용했다면 단순히 보아 넘길 것은 아닐 성싶다. 김정호는 '삼한의 여러 나라가 통합하여 삼국이 되었으니 곧 신라 가야 백제다. 그 뒤에 가야가 망하고 고구려가 남으로 옮겼으니 또 삼국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로 오십 년이 되자 발해가 또한 고구려의 영토를 이어받아서 신라와 남북국을 이루었다. 이백여 년이지나 고려 태조가 하나로 합했다. 그러나 도련포 청새관 압록강 밖은 여진과 거란이 떼어 갔다.'고 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지만 삼한 삼국 그리고 남북국을 거쳐 고려의 불완전한 통일로 역사가 이어졌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적어도 삼국시대 다음에 남북국시대가 대두되었다는 사실만큼은 그 시대에 모두가 공지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 다음의 일제강점기에는 국가 흥망과 민족 말살의 식민통치라는 예종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새로운 모색으로서 과거 역사를 분석 비판하는 기조가 일어났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신채호는 정통과 중화를 중시하는 유학사상을 국시로 한 조선에 대한 거부감으로 반유교적이고 반조선적인 사실들을 찾았다. 그 가운데서 영토의 축소와 민족의 쇠잔이 시작된 시점과 그 장본인을 고려 중엽의 김부식으로 봤다. 그의 이런 주장이 아주 간명히 나타났다.

嗚乎라, 我國이 鴨綠 以西를 棄하여 敵國에 讓함이 何時로 自하였느뇨. 曰, 金文烈이 三國史記를 編纂하던 時로 自함이라 하노라. 何故오. 曰, 渤海大氏의 傳來하던 血統을 推하면 卽 我檀君의 子孫이며, 統禦한 人民을 問하면 卽 我 扶餘의 種族이요, 其 據有한 疆土는 卽 高句麗의 舊物이니, 大氏를 我國史에 不著하면 當何人을 著하며, 大氏를 我國史에 不著하면 當何國史에 著하리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채호도 유득공과 마찬가지로 발해는 곧 한국사인데 그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김부식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끝에 그 원인을 정통과 윤통을 구별하는 유학사상에 젖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 부분은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유학적 소양이 깊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로도 유득공에게서 비롯된 남북국시대론이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용범 이우성 박시형과 주영헌 등을 들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로는 하나의 학설에 지나지 않은 것을 교과서 형식으로 고정했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이전의 남북국시대론자들의 견해와 엇비슷하므로 낱낱이 열거하지 않겠다고 했다.


4. '남북국시대론의 논점과 논거'의 검토

남북국시대론자의 일치된 논점에 대해서 왕진쿤은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요 발해의 역사는 마땅히 조선 역사 속에 써넣어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그들의 논거도 대동소이한데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와 이우성의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에 개괄되었다고 밝히고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간추렸다.

(1) 발해는 고구려 땅을 차지하여 존재했으므로 발해는 당연히 한국사 체계 속에 나열해야 한다.
(2) {구당서(舊唐書)}발해전(渤海傳)과 {오대회요(五代會要)}의 기사는 사실과 맞으나 {신당서(新唐書)}발해전(渤海傳)은 잘못되었다.
(3)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실린 발해 국왕들이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표출된 '고구려의 구거(高麗之舊居)' '부여의 유속(扶余之遺俗)' '고구려 왕(高麗王)' 그리고 '천손(天孫)' 이란 것이 곧 발해는 고구려 사람이 세웠음을 증명한다.
(4)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오는 '북국(北國)' '北朝(북조)'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북국' 등이 바로 남북국시대가 존재했다는 증거다.
(5) {유취국사(類聚國史)}의 내용으로 소수의 고구려 사람이 다수의 말갈인을 거느리고서 발해를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두 논문을 살펴서 박시형과 이우성의 의도를 참고하자.

박시형은 발해사 연구의 중요한 출발점은 발해국의 창건자를 확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그는 발해를 세운 것이 고구려 사람인지 말갈인인지를 밝히는 것이 발해를 연구하는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선정했다. 한마디로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자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발해 연구가 시작된 뒤로 지금까지 이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아직도 많은 논란을 야기한다. 특히 대조영을 속말말갈(粟末靺鞨) 사람이라고 한 {신당서}발해전이 그런 혼란을 불러 일으킨 근거라고 지적하고서, 그것이 1차사료가 아니고 2차사료임을 확인한 것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다. 그는 그밖에 여러 사서, 특히 발해가 존립했을 때의 사서나 발해인이 직접 말한 내용을 담은 사료를 종횡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그 전의 고구려와 그 뒤의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발해국의 수도는 말갈족 중 속말말갈인들의 거주 지역 내에 있기는 하였지마는 말갈인들은 고구려인의 령도를 받은 종족들이었다. 바꾸어 발하면 발해는 원 고구려인의 국가였다. 다만 이 관계에서 원 고구려와 발해의 차이를 말한다면 발해에서는 주민 중에서 말갈인들이 원 고구려 시기보다 량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였다는 그것 뿐이었다.

박시형은 발해인들 자신이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칭했다고 밝힌 뒤에, 발해 이외의 나라에서 발해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살폈다. 먼저 신라의 경우에 북국과 북조가 나온 사료를 소개하고 남북조 또는 남북국의 개념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최치원열전에 나온 표현을 결정적인 자료로 제공했다. 또 대조영의 출자와 업적이 소개된 {삼국유사(三國遺事)}말갈발해(靺鞨渤海)의 기사를 소개했다. 박시형은 이를 반증한 사료로서 {구당서}발해전이 정확하며, 그보다 120년 뒤에 나온 {신당서}는 송기(宋祈)가 자의로 조작한 기사라고 결론지었다.

다음으로 박시형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잘못 썼다고 했다. 김부식이 발해를 의도적으로 제외하려고 했으나 그 가운데 발해 관련기사의 일부가 남았는데, 북국 북조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했다. 또한 그런 추세가 계속되어서 {삼국유사} {동국사략} {고려사} {동국통감} {동사강목}도 발해의 기원에 대해서는 {신당서}발해전의 기사를 답습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박시형은 역사 과정에서 발해를 어떻게 봤는지를 나열했다. 고려 태조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서희의 담판, 유득공의 {발해고} 자서 그리고 한진서 정약용 신채호의 인식과 주장을 소개했다. 그리고 결론으로서 발해는 그 주민 영역 주권의 일체면에서 다 고구려의 후계자인 동시에 또 문화적 면에서도 틀림없이 그의 훌륭한 계승 발전자였다고 했다.

이우성의 논문을 보자. 맨 처음에 남북국시대란 신라와 발해의 남북 대립의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봐서 삼국시대의 종결로 그 기록이 끝나야 한다고 했다. 요컨대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본 것이다. 그리고 발해와 신라가 공존했던 시대는 남북국사로 다루어야 하는데 김부식이 그렇게 안 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제의 만선사관에 의해서 발해는 만주사로 구분되었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발해 연구의 주요 문제인 대조영의 출자와 발해 국민 구성을 거론하고, 말갈족은 고구려 국민의 일부라고 여겨서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고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이니까 따라서 발해는 우리 민족인 것이다'라고 했다. 특히 역사권과 문화권이 같았음을 첨부하고는 끝에 남북국시대는 고려로 이어졌다고 했다.


5. '남북국시대론의 논거는 사실 왜곡'의 분석 . 비판

앞서 제시한 다섯 가지의 남북국시대론의 논거에 대해서 왕진쿤은 차례차례 반론을 폈다. 그 진위를 살펴보자.

1) 발해의 고구려 고지 점유가 조선사 편입 요건이 아니다

왕진쿤은 첫머리에 남북국시대론의 핵심 결론인 '발해사는 한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강력히 부정했다. 그 논거로, 첫째 강역의 변천을 강조했다. 이것은 '고구려 . 백제의 멸망과 함께 남쪽에서 신라에 의한 반도통일이 이룩되고 북쪽에서는 고구려 옛땅에 발해의 건국이 성취되어'라는 이우성의 말과 유득공의 '무릇 대씨란 누군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 가진 땅은 어떤 땅인가? 곧 고구려 땅이다. 그런데 동쪽 서쪽 북쪽을 물리쳐서 넓혔을 뿐이다.'라는 내용에 대한 반박이다. 왕진쿤은 '현도 . 낙랑 . 요동이 어찌 중국의 고지가 아니겠는가? 달리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라고 반문했다. 즉 남북국시대론자의 논리에 따라서 영토상의 연고를 따지자면 고구려 고지가 그 이전의 한사군시대에는 중국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사군 이전의 고조선도 고려해야 한다. 고조선 이전의 어떤 역사 기록이 현존하지 않으므로 그 이전을 말할 수는 없다. 결국 고조선 귀속의 결과가 고구려 땅을 점유한 발해의 귀속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조선이 결코 중국사로 편제될 수는 없다. 아무튼 현도나 낙랑을 말하던 그는 갑자기 '말갈족이 흥기하여 발해왕궁이 건립되었다'고 하면서 족속 문제로 말을 바꿨다.    

둘째로 고구려는 말갈뿐만 아니라 예맥 . 신라 그리고 백제와도 일족이 아니라고 했다. 왕진쿤은 '민족 문제에 있어서 대대적으로 논란을 펴서, 발해를 강제로 고구려 계통으로 획입하고, 또한 고구려 . 신라 . 백제가 동족이라고 하였는데' 라고 남북국시대론의 주요소인 고구려와 발해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것은 '대씨란 누군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란 유득공의 말과, '발해국의 창건자가 고구려인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말갈인들인가 하는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7∼8세기 경에 말갈인들은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 있었고 또 일정한 력사도 가진 종족이었는데, 그 일부분은 기왕에 고구려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고, 또 일부는 독립하여 있었거나 당나라에 예속된 것도 있었다.......이 종족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불과 30년 후에 대조영이 한 번 의기를 들자 기왕의 고구려 전 영역 주민들이 일시에 호응하여 그야말로 질풍신뢰와 같이 일대 강국을 건설할 수 있는 그러한 처지에는 정치 경제 문화 어느 면으로 보던지 사실 있지 못하였다.'고 하며, '신라가 발해를 자기들과는 인연이 먼 말갈인의 나라인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동족 고구려인이 세웠으며 또 어느 때에는 반드시 통일되고야 말 근친의 나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박시형의 해석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고구려가 말갈과 일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예맥 . 신라 . 백제와도 일족이 아니라고 못박고 그 근거들을 제시했다. 첫째 신라와 백제는 원래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에 속하고, 둘째 예맥은 한반도 중부의 동쪽에 있었으며, 셋째 고구려는 동옥저 왼쪽 가까이 거주한 부여 별종으로 그 뒤에 강대해져서 현도 . 낙랑 . 요동을 점유했다고 구분했다. 

신라와 백제는 한반도 남부의 한족에 속한다고 한 부분이 상식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백제는 신라보다 고구려에 가깝다고 본다. {삼국사기}의 백제 시조인 온조왕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 시조인 추모(鄒牟)와의 관계 그리고 남하한 이유까지 자세히 소개되었다. 이것은 한국 사료로서 믿을 수 없다고 하자. 그가 신임하는 {신당서}발해전을 보자.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라고 첫머리에 쓰였다. 또 같은 책의 신라를 찾아보면 '신라는 변한의 후예다'라고 했다. 왕진쿤의 얘기라면 '백제는 □한의 후예다'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는 아마 {북사(北史)}의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란 기사와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었다'란 것을 보고서 이렇게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송서(宋書)} {위서(魏書)} {주서(周書)}등을 보면 그렇지 않다. 특히 {주서}를 보면 다른 사서에 백제를 한의 일부로 기록한 연유를 알 수 있다. '백제란 그 선대가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부여의 별종이다(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마한의 속국이란 내용은 {삼국사기}의 백제 온조왕대의 기사들을 보면 수긍할 수 있다. 

마한에 사신을 보내 천도하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경을 정했으니 북쪽은 패하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 서쪽은 큰 바다에 다다르고, 동쪽은 주양에 이르렀다.

국왕께서 웅천책을 만드셨다. 마한의 왕이 사신을 시켜 '왕이 옛날에 강을 건넜을 때에 발디딜 자리가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일백 리의 땅을 떼어줘서 안착하게 했다.'고 꾸짖었다.

국왕께서 말씀하셨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우 아래가 딴 마음이 있으니 그 세력이 오래 갈 수가 없다. 이윽고 다른 것에 병합되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경우와 같게 된다.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테니 쳐들어가 빼앗아서 나중에 일어날 곤란을 면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이 밖에도 백제와 마한의 관계로 보여주는 기사는 많다. 결국은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고 만다. 이렇게 뚜렷한 자료가 있는데도 신라와 백제를 같은 한족으로 본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다음으로 거론한 한반도 중부의 동쪽에 있었다는 예맥은 종래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많고 확실한 결론이 없으므로 말하지 않겠다.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오는 고구려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란 것은 인정했다. 그런데 그는  별종을 "종족이 같지 않으나 서로 예속된 것을 가리킨다."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별종이다'라는 경우는 '고구려족이 아니라는 것뿐만 아니라 일찍이 고구려에 예속한 것임을 말한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별종(別種)'의 '별(別)'을 현재 주로 사용되는 '다르다(異)'는 뜻으로 본 것 같다. 그러나 '나뉘다(分解)'란 뜻도 있다. 원래 어떤 종족이 있었는데 오랜 기간이 지나자 인구압박과 환경변화 등의 요인이 발생하여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종족이 나타났다고 하자. 근근히 명맥을 유지한 원래의 종족에 비해서 새로 출현한 여러 종족을 뭐라고 하는가? 물론 그 종족 고유의 이름을 부르겠지만, 그 연원이나 내면을 설명할 적에는 원래 종족의 별종이라고 할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의 경우에 본명이 있는데 그의 생김새나 언행의 특징들을 강조해서 별명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데 별명이 곧 그 사람이 아닌데 예속된 경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가? 실제로 별종이 사용된 예는 참 많은데 모두가 근본은 같은데 겉으로 드러난 바가 다른 경우에 사용한다. 고대 사회의 발전 과정을 추론한 이와 관련된 얘기를 들어보자.

씨족은 어떠한 종족에 있어서도 두 개 이하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에, 한 조의 씨족으로부터 연합체가 진화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인디언의 경험에 관한 사실로부터 이론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씨족은 그 동족이 증가되면, 둘로 갈라진다. 이것은 다시 세분되고, 얼마 있다가 두서너 개의 부족으로 통일된다. 이러한 부족은 한 종족을 구성하고, 이 동족은 동일한 사투리를 사용한다. 오랜 동안에 걸쳐 이 종족은 分裂作用에 의하여 여럿으로 나누어지고, 그것이 다시 연합체로 통일된다. 이러한 연합체는 종족과 부족을 거쳐 한 조의 씨족으로부터 발달한 것이다.

씨족(氏族)에서 부족, 종족 그리고 종족연합체로 분화 발전하는 과정은 충분히 상정(想定)할 수가 있다. 그럴 경우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사람의 무리를 본원종(本源種:the main stock)이라고 하면 시간이 경과한 뒤에 분화되어 나온 것을 별종(the branch stock)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면 왕진쿤의 별종에 대한 개념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는 부여에 관해서 '부여는 숙신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건립된 정권이다. 그것은 숙신계통의 왕국이고, 예와 한과도 족속의 인연이 없다'고 설명했다. 부여를 정권이라고 했다가 바로 왕국이라고 했다. 정권과 왕국에 대한 그의 개념이 어떤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으나 같다고 보기로 하자. 그러면 숙신족이 살았던 지역에서 건립된 부여는 숙신 계통의 왕국이란 뜻이다. 앞에서 그는 강역의 공유로 고구려와 발해를 똑같은 한국으로 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했다. 그런데 영역의 공유성으로 부여를 숙신계통의 왕국 운운하는 것은 모순이다. 더구나 '숙신계통'이란 모호한 용어를 썼는데 어떤 의미를 내포했는지 의문이다.

그는 부여와 예가 연계되지 않았다고 강변하였다. 그 증거로 부여와 예가 중국의 정사에 따로 전(傳)이 있고 기사 속에서 병렬되었음을 들었다. 이것은 부여와 맥의 후예인 고구려의 연계성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의 기사를 열거하고 광개토경호태왕비문의 '내가 빼앗아온 한과 예'라는 기사를 들었다. 특히 비문의 내용은 당시의 사람이 직접 언급한 것이라서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상고시대의 오환 부여 예맥 조선 진번 마한 부여 고구려 한 예 등에 관해서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여 정밀한 연구를 진행해야 그 상호 연관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소개한 기사들만을 보아도 위에서 말한 것들이 중국의 한(漢)이나 위(魏)와는 대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광개토경호태왕이 '내가 빼앗아온 한과 예'라는 표현을 들어서 고구려는 한도 예도 아님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 별개의 국가고 민족이 같지 않았으며 서로 싸웠다고 보충했다. 주의할 것은 '서로 싸웠다'는 구절이다. 서로 전쟁하고 인민을 사로잡은 것이 동족(同族) 여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는 또한 이른바 삼국통일을 영토의 일부만이 통일되고 민족은 통일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서 후삼국을 거쳐 930년대가 되어서야 고려에 의하여 조선반도 남부를 통일해서 민족 융합이 시작되어 단일민족이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한국사에서 민족을 얘기하려면 고려 이후에 한정해야 하고, 통일을 거론하려면 고려 이후에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뒷시대의 민족 상황으로 앞 시대의 민족 관계를 개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단언하고, 박시형이 '신라가 자기의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싸웠다'고 한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민족이란 결코 근대 민족국가(nation)의 민족은 아니라고 본다. 아마 종족보다는 크고 근대의 민족보다는 작은 준민족체 정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면 통일신라를 제1차 민족 융합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박시형의 언급도 그와 큰 차이는 없는 셈이다. 

엄밀히 말해서 현대의 민족 정황으로 과거의 여러 준민족체나 종족들을 규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대의 민족과 그 문화 및 사회를 보려면 과거의 여러 종족과 준민족체들과의 이합집산의 과정 및 소밀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 즉 현대 한국 민족과 그 문화의 구성 요소를 찾는다면 백제 신라 부여 등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시형처럼 동족을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고구려와 신라는 인종과 언어 등으로는 매우 가까운 처지였는지 몰라도 전혀 다른 종족적 배경과 성장 과정 및 고대 국가(state)였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왕진쿤이 고려 이후의 민족 융합을 거론한 것은 잘못이다. 그런 민족 융합은 그 이전부터 미미하나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한사군이 쇠퇴하고 삼국이 정립되면서 큰 축을 이루었고, 첫째로 불완전하나마 대규모의 융합을 보인 것이 이른바 신라통일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서 영토의 일부는 통합되었는데 '민족만은 결코 통일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왕진쿤 자신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2)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의 발해 기사는 같다

왕진쿤은 발해에 관한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의 기사를 비교해서 대조영의 고구려인 여부를 논박했다. 이것은 주로 박시형의 주장에 대한 진위를 가리는 작업이다. 과연 누가 합리적인지 세 개의 사료를 비교해보자.

㉮발해 대조영은 원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발해는 원래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대개 고구려의 별종이다. 
㉰발해는 원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귀부한 것인데 성은 대씨다.

㉮에서는 '발해' '대조영' '고구려' '별종'이 나왔고, ㉯에서는 '발해' '말갈' '고구려' '별종'이 있다. ㉰에는 '발해' '속말' '말갈' '고구려' '귀부' '대씨'를 추릴 수 있다. ㉮ ㉯ ㉰ 셋의 공통 요소는 '발해'와 '고구려'다. ㉮와 ㉯의 공통  부분은 '고구려' '별종'이다. ㉯와 ㉰의 공통부분은 '말갈'이다. 그리고 ㉰와 ㉮의 공통 부분은 '대'다.

㉮와 ㉯의 공통 부분인 '고구려' '별종'은 ㉮와 ㉯ 두 사료의 표현대로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합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 ㉯ ㉰ 셋의 공통 부분은 '발해'와 '고구려'다. 그러면 이 세 자료는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발해는 고구려와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봐야 한다.

㉰에는 '고구려의 별종'이란 것은 아예 없고, 대신에 '고구려에 귀부'했다고 되었다. 앞에서 별종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왕진쿤의 개념이 불합리함을 지적했다. 그런데 ㉮와 ㉯의 공통인 '고구려의 별종'의 의미를 더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이 ㉰라면 '별종'이란 '귀부'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에는 없는 것이 ㉯와 ㉰에 공통으로 있다. 바로 '말갈'이다. ㉯에는 단순히 '말갈'이라고만 했는데, ㉰에는 그 앞에 '속말'이란 것이 첨부되었다. 그러면 자연히 ㉯를 보충한 것이 ㉰라고 보아야 한다. 말갈은 말갈인데 자세히 말해서 '속말말갈'이란 것이다. 그러면 ㉮와 ㉯의 공통점인 '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에 언급된 '조영'과 연결된다. 이는 곧 대조영의 대씨인 것이다.

이렇게 도출된 '대조영의 발해' '속말말갈' 그리고 '고구려로의 귀부한 별종'을 합하면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일찍이 고구려에 귀부한 고구려의 별종으로 된다.
사료를 판별하는데 어떤 증거가 없으면 일단은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어떤 것과 관련된 사료가 여럿이면 연대의 선후나 그 양 그리고 문체 등을 기준으로 정밀도를 구별할 수는 있어도, 뚜렷한 증거도 없이 지은이가 어땠으니 그 사료도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해서 폄하하는 일은 옳지 않다. 그 모두를 잘 비교 분석해서 진수만을 모아 보충하여 해석하면 사실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시형이 {구당서}를 통해서 고구려인 대조영과 말갈인 걸사비우가 협력해서 동주(東走)하여 따로 있다가 말갈은 당에게 격파되고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인은 승리하여 고구려와 말갈 모두를 통합하여 발해를 창건했다고 해석한 것은 새로운 암시를 던져주는 탁견이라고 본다.

{오대회요}에 대해서는 그 상세함을 추려내고는 장건장의 {발해국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 것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당서}에 대해서는 상당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갈의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대조영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부분과 이해고(李諧固)의 참패를 적당히 묘사한 점을 찾아낸 것은 그의 혜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들이다. 그 중 옛날 고구려에 복속되여 있던 성 대씨라는 자가 고구려 멸망 후에 말갈의 무리를 인솔하고 읍루 땅 동모산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다.'라고 해석하고는 앞서 소개한 결점을 밝혀서 위조 운운하며 그 가치를 낮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첫머리에 정리한 것처럼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왕진쿤은 박시형의 잘못을 지적하고는 대조영이 고구려 사람이라면 이정기(李正己)처럼 했을 것이라며 반증을 들었다. 이정기와 이백 수십 년이 계속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비교하여 고구려 사람이라고 직서(直書)하지 않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무리다. 글쎄 발해가 곧장 망해서 그 영토와 주민이 모두 당의 손아귀에 놓였다면 그랬을 지도 모른다. 비교 불능의 것을 비교한 것 같다.

박시형과 마찬가지로 왕진쿤도 중요한 대목을 보고서 지나친 것 같다. 그것은 '고구려의 별종'과 '고구려에 의부'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별종의 뜻 안에 포함된 것으로 '의부'를 고려한다면, 원래는 속말말갈인인데 일찌감치 대규모로 성장한 고구려에 의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가 멸망되고 당에 의해서 영주로 사민을 당할 때에는 원래 속말말갈였던 대조영의 무리는 고구려는 고구려인데 약간 다른 점이 있는 '고구려의 별종'으로 불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위의 세 가지 사료 모두가 어느 하나가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는 보족적인 자료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전횡했던 보장왕 때에 당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대제국이었다. 서쪽의 당과 동쪽의 고구려가 서로 팽팽히 맞선 두 제국이었는데, 고구려가 내분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규모의 고구려를 생각하면 속말말갈이건 무슨 종족이건 귀부나 기미(驥靡)의 형태로 고구려에 예속되었다가 다소 고구려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귀부나 별종의 의미를 선명히 포착할 수 있다.

3) '復高句麗之舊居'가 고구려 계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실린 발해국왕 대흠무(大欽茂)가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의 첫머리에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구가 있다.

고구려의 거처를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졌다.

이에 대해서 왕진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나 발해 대씨가 고구려 사람이고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자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고구려 국왕' 운운하는 기사도 소개하고 해석을 덧붙였다. 이 부분은 박시형이 '다음 758년 발해 3대 왕 문왕 대흥21년에 왕은 일본 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자기를 직접 <고려 국왕 대흠무>라고 칭하였다'고 한 것을 반박한 것이다. 박시형은 논문의 초반부에서 발해국의 창건자가 고구려인임을 밝히려고 이에 관해서 발해인 자신이 언급한 기사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주로 진러우푸(金毓慮)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篇)}에서 이 기사를 참고했다고 했다. 

왕진쿤은 이것이 국서가 아니고 주언(奏言)임을 밝히고, 주언은 사신이 말한 것이지 발해 국왕의 표현이 아님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발해 국왕'이 '고구려 국왕'으로 바뀌게 된 것은 {속일본기}의 수사자(修史者)가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또 다른 예증으로 그 책에 실린 '발해사 양승경'이 '고구려 번객'으로 이기(異記)된 것과 양승경 등이 쥰인(淳仁)왕이 즉위했을 때에 방문했는데도 오히려 그 전의 왕의 사망을 조문하는 글을 올린 점 등을 들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이 모든 것이 발해 사람 자신이 '고구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어디가지나 수사자의 잘못에서 빚어졌다고 한다. 특히 맨끝에 발해 국왕이 천손(天孫)이라고 지칭한 것은 고구려와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왕진쿤이 국서가 아니라 사신의 주언이라고 설명한 것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사자가 혼동했다는 점아 의문이다. 수사자는 왜 발해와 발해 국왕을 고구려와 고구려 국왕으로 혼동했을까? 수사자가 혼동을 일으킬 만큼 발해와 고구려를 동일체로 인식했음을 반영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면 한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 수사자가 혼동을 일으킨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속일본기}가 797년에 완성되었으니 그 시점은 분명히 발해가 상존했던 때다. 그 때에 일본의 수사자가 발해를 고구려로 혼동했다면, 그것은 수사자 한 사람만의 착각이나 혼동으로 볼 수 없고, 그 당시의 전반적인 현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발해를 고구려로 여겼을까? 그것은 곧 고구려와 발해를 거의 동일시했음을 나타냈다고 본다. 발해 국왕이 자신을 고구려 국왕이라고 안 했더라도 발해는 곧 고구려 또는 고구려와 발해는 아주 밀착되었음을 주위에서 인식했음을 알려 준 셈이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여기에 발해와 당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해는 어디까지나 그 전대의 고구려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 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왕진쿤이 국서가 아니고 주언이라고 생각해서 수사자가 발해와 고구려를 혼동했다고 밝혀주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발해는 고구려와 아주 밀착된 것으로 생각했음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발해가 상존했을 적에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는 마치 현재 중국에서 조선과 한국의 관계가 밀접해서 한국을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가?

4) '북국'과 '북조'는 발해가 아니다

'북국'과 '북조'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단어다. 그 중에서 북조는 지리지에 나온다. 고구려 지리를 개관하여 그 도읍의 천이(遷移)와 치폐(置廢)를 언급되었는데, 그 중에서 국내성에 관한 기사를 소개하고 부연 설명했다. 여기서 나온 북조는 곧 김부식 등이 고려의 북쪽에 있는 금나라를 지칭했다는 왕진쿤의 말이 맞다. 그러므로 박시형이 '또 지리지에서는 옛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은 17개역을 상거하고 있는데 전자는 고구려 멸망후에는 <북조> 즉 발해 경내로 들어갔다고 기록하였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런데 왕진쿤은 {오대사(五代史)}진고조황후이씨전(晋高祖皇后李氏傳)의 기사를 통해서 '조(朝)'라고 하는 것은 신속(臣屬)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했다. 

다음으로 왕진쿤은 북국을 언급한 두 개의 사료를 소개하고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북방 제후의 나라를 가리킨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써 {북사(北史)}위기(魏紀)의 기사를 들었다. 그리고는 금나라 태조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표명했으므로 그 왕조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고 발해와는 신속의 관계가 아니므로 북국이라고 표현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북국은 발해를 가리키는데 신라가 아니라 고려에서 부른 칭호란 것이다. 그래서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를 남북국이라고 하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진쿤이 북조와 북국의 의미를 용례를 들어서 판별한 것은 예리하고 적절한 분석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남북국시대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신라에서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다는 박시형의 말을 부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유득공이 언급한 남북국 자체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다. 유득공은 남쪽에 신라가 있고 그 북쪽에 발해가 있는 상황을 통털어 남북국시대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왕진쿤은 금나라 태조의 '여진 .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는 표현은 지당한 것으로 치부했는데, 그러면 발해와 그 다음의 금이 깊은 연계성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왕진쿤의 논리로 본다면 금과 발해도 별도의 민족이요 국가로 봐야 한다. 이것은 왕진쿤의 논지가 모순임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만약 발해와 금의 관계를 인정한다면, 그 이전 시대인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도 똑같이 봐야 한다. 그런데도 굳이 고구려와 발해의 관계는 부인하면서 발해와 금의 관계는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큰 착오에 지나지 않다.

왕진쿤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의 북국도 고려시대의 칭호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그 글이 실린 {최문창후전집(崔文昌候金集)}이 고려 현종(1009∼1031)때에 이루어졌음을 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 표문(表文)의 제목에 나오는 북국은 고려시대에 붙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고려에서 발해를 북국이라고 호칭한 것은 그의 언급대로 금나라와 연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박시형이 신라의 발해 인식 운운하는 것을 부정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역시 유득공 이후의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거를 더 확실히 잡아준 결과가 되었다. 특히 그는 표문에서 고구려에 의부한 속말갈갈이란 기사를 소개했는데, 이 점이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남북국시대론의 확증을 얻고자 예증을 들어서 천착한 박시형의 오류를 다소 바로잡았지만, 결과적으로 남북국시대론의 골자인 고구려와 발해의 연계성을 실증한 것이다. 

5) {유취국사(魏聚國史)}의 '토인(土人)'은 고구려인이 아니다

왕진쿤은 '그 백성이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은데 모두가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라는 {유취국사}의 문구를 남북국시대론자가 '토인은 곧 고구려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했다고 했다. 그는 원주민이란 의미의 '토인'은 곧 말갈의 한 갈래지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이를 방증하려고 고구려가 멸망된 뒤에 말갈이 이합집산하는 과정을 나름대로 가정했다. 즉 고구려에 의부한 말갈은 고구려가 멸망되자 말갈 부족의 일부는 당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흩어졌다고 했다. 그 흩어진 말갈들이 어느 부락으로 투항했을 때에 전입된 그들을 포함해서 말갈이라고 통칭했을 것이다. 그 부락의 추장은 세습이므로 여전히 원주민 즉 토인이 추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고 했고, 토인은 역시 말갈의 한 갈래지 고구려 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도 박시형이 발해국의 인구 구성을 언급한 것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유취국사}의 이 기사는 그 당시의 발해 상황을 알려주는 그 때에 작성된 것이어서 발해 연구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 사료를 통해서 발해는 대다수 말갈인과 소수의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봤고, 이것이 발해가 요에게 변변한 저항도 못한 채 갑자기 멸망된 주요인으로 판단했다. 종래에는 대개 박시형의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그의 논지에도 여러 가지 미심쩍은 것이 있다. 특히 토인은 곧 고구려사람이라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확정한 점이 그렇다. 이 점을 놓치지 않고 토인은 곧 원주민이란 의미에 근거해서 왕진쿤처럼 가정에 가정으로 연상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첫째, 사료의 맨 첫 구절에 '발해국은 주(州) 현(縣) 관(館) 역(驛)이 없다고 했는데. '5경(京) 15부(府) 62주(州)'라고 한 기사를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그는 사료 그대로를 인정하는데, 과연 발해에는 주 현 둥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말갈 부락이다'라는 표현대로 되었을까? 둘째, '백성(百姓)'이라는 의미를 국민 정도로 해석해도 좋은가? 고대의 백성이 단순히 인민(人民)으로 표기한 것과 의미가 같을 수는 없다. 셋째, 그의 말대로 모두가 말갈부락이라면 굳이 말갈은 많고 토인은 적다고 구분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기사에는 말갈과 토인을 구분하고, 토인을 촌장으로 삼는다고 했다. 넷째, 토인이 촌장이 되는데 그 촌의 규모로 도독(都督) 자사(刺史) 그리고 수령(首領)이라고 했다. 그는 말갈인이 도독 자사 수령 모두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발해에 고구려 유민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인가?

이 점들을 고려하면 토인이 곧 말갈이라는 왕진쿤의 주장은 합리성이 결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별다른 근거 없이 토인은 곧 고구려인 이라고 보고서 발해의 주민 구성을 언급한 박시형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본다. 이 사료는 발해 전체를 골고루 살펴서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은 일본과 발해를 오고가는 길목의 정황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정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그 곳은 일본도가 있었던 발해의 동부에 해당된다. 그 곳은 나중의 금과 청이 일어난 이른바 여진의 본거지였을 것이다.


6. 맺 음 말

발해에 대한 왕진쿤의 정의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이라고 한 곳은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고 앞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므로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당에 의해 대조영이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기초 위에서 건립한 왕국이라고 한 점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영주 즉 지금의 챠오양(朝陽)에서 거란의 이진충의 반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대조영이 그를 따르는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동으로 탈출했다. 무후의 명을 받고서 이해고가 추격했다. 결국은 동모산에서 패퇴시킴으로서 그 일대의 가장 강력한 실권자가 되어서 건국한 것이다. 그런 시작과 더불어 무주공산의 그곳에 흩어졌던 고구려의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다. 이런 상황이 당에 전해져서 급기야 당 조정에서 최흔을 보내어 그 실력을 인정하되 곧바로 당의 형식적인 편제에 들게 했다. 이것이 바로 왕진쿤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기초 운운한 것이다.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봉이 곧 발해 건국의 기초요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당의 혼란을 틈타서 자력으로 당군을 물리치고 건국한 것이다. 그러면 책봉은 발해 건국과 성장의 결과로서 당의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다. 그런데 이 책봉이 발해 건국의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논문의 첫머리에 강조한 것은 그의 발해 인식이 사실과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왕진쿤은 신라에 대해서는 책봉 따위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진한과 변한에서 발전되었다고 언급했다. 그 다음에 신라의 통일을 말했는데, 한반도의 남부를 통일한 것으로 결정했다. 특히 고구려의 영토의 일부를 점유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7세기말에서 920년대까지는 발해와 신라는 동시에 존재했고, 둘 다 당의 번국(蕃國)이라고 했다. 여기까지 보면 발해와 신라는 적어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영토의 양분과 연계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 어떤 결론이 나올 듯한데, 그는 말을 뒤집어서 발해와 신라는 민족 . 강역 . 역사전통상 각자 존재했고, 연관이 없는 두 개의 국가로서 사서(史書)에도 그렇게 기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 첫째는 민족이다. 발해와 신라의 연관성을 고려하는데 민족을 거론하는 것이 옳은가? 세계사에서 국민국가 이후의 민족의 개념으로 발해와 신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왕진쿤이 여기에 쓴 민족은 어떤 의미인가? 준민족체의 의미인가? 아니면 종족이나 부족의 의미인가? 여기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19세기 이후의 민족이 아니고 준민족체도 아니며 종족보다는 더 큰 무리로 정의하고 일단은 발해족이라고 하자. 그러면 신라와 발해는 연관성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 전의 고구려와 신라도 관련이 없다. 더 확대하면 한나라와 당나라도 무관하다. 근세의 명나라와 청나라도 아무런 연관이 없다. 더구나 청나라 내부의 한족과 만주족은 더더구나 관련이 없다. 그러면 현재의 중국과 당 . 송 . 명 . 청도 연관성이 있을 수가 없다. 과거에 병존했거나 전후로 설립된 어떤 국가도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둘째, 강역상 연관이 없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동시에 존재했던 발해와 신라는 영토상 연관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왕진쿤의 언급대로 고구려의 영토를 그 일부는 신라가 나머지는 발해가 차지했다. 이것이 연관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고 하면서 자동적으로 강역상 연관이 없다고 하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아마 옛날의 어느 한 국가의 영토를 나중에 두 나라가 나누어 차지해야만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면 당이 망한 뒤에 그 판도를 요와 북송이 나중에 다시 금과 남송이 점유했는데, 이런 경우에 연관성이 있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가? 한족 출신의 왕실이 거느리는 송과 거란족의 요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옛날에 한 국가의 영토를 이렇게 연관이 없는 두 나라가 차지할 수 있는데, 이 점을 무시하고서 영토상의 연관성 유무로 발해와 신라의 관련을 판별한 것도 유치한 발상의 결과다.

셋째, 역사전통상으로 발해는 신라와 연관성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그가 말한 대로 신라는 진한과 변한으로 그 역사 전통의 맥이 이어진다. 그러나 발해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발해는 그 당시에 신생국으로서 그 역사전통이 그 전의 어느 것과도 연결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보낸 발해국왕 대흠무의 국서에 나온 '고구려의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는 언급은 그 역사전통의 근원을 발해인 스스로가 밝혔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시간의 흐름을 보면 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져온 것이 이제는 발해로 연결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면 부여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등 상고시대의 소국들은 각각 독자적인 나라였으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결국 고구려 . 백제 . 신라로 확대 구분된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국지}에도 이들을 동이전에 별도로 묶은 것이다. 그러면 그 뒤를 이은 발해와 신라가 양존했던 시기에 각자 발전을 꾀하면서 서로 반목 질시하거나 때때로 관련을 맺었어도, 그 뒤의 역사 흐름을 보면 결국 현대의 한국사회와 문화를 이루는 양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함을 알 수가 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역사전통상 발해와 신라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한 것은 단견에 지나지 않다.

왕진쿤은 자신의 견해, 즉 발해와 신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나라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종래의 사서들에도 모두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여러 연구자와 사서들로 진실이 확증될 확률은 많지만 반드시 다 진실이 될 리는 없다. 더구나 여러 사서 속에 발해와 신라는 각각 기재했으나 그 둘이 그 어떤 나라의 일부라거나 더 나아가서 중국의 어느 나라와는 깊은 연관이 있는데 그 둘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의 사실들을 기록한 뒤에 발해와 신라를 따로 모아서 서술했다. 이로써 발해와 신라는 서로 친근하나 결코 당과 연계성이 없다는 것을 파악할 수가 있다.

왕진쿤은 논문의 첫머리에 겉으로는 매우 보편 타당한 듯한 표현으로 발해와 신라를 엄격히 별도의 나라로 구분했다. 그러나 그 내부를 보면 중국의 역대 어느 나라보다도 발해와 신라는 삼국시대를 잇는 그 다음 시대, 즉 남북국시대를 이루는 두 개의 주요 구성 요소라고 강조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점은 왕진쿤 혼자만이 안고 있는 모순이라고 보지 않는다. 고구려와 발해를 연구하는 중국학자 대부분은 근대까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의 역사 연구, 특히 광개토경호태왕비문의 연구에서 남다른 업적을 쌓은 왕진쿤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후임자로서의 발해의 존재를 부인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발해의 고구려 계승이 논지의 중심이 아님을 알고는 발해와 신라의 개별성을 강조했는데, 결국은 삼국의 후계자가 발해와 신라 양자라는 남북국시대론을 거부하기는커녕 명백한 사실이라고 부언한 셈이다.
 
이처럼 한두 가지를 빼면 얼토당토않은 분석과 논리로서 남북국시대론을 공박한 것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남북국시대란 한국사 전체를 염두에 두고보면 필연적인 시대 설정인 것은 그가 인정한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공존했을 때를 삼국시대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끝으로 왕진쿤은 왜 이렇게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를 고려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남북국시대론자인 유득공을 비롯해서 이를 반박한 왕진쿤까지 {삼국사기}의 본질을 오인했다고 본다.

먼저 이우성의 견해를 보자. 

그는 '남북국시대는 다름아닌 신라 . 발해의 남북대립시대를 말한다'라고 했다. 한국의 역사 판도에 북쪽에는 발해가 그리고 남쪽에는 신라가 양립(兩立)했으니 이를 포괄해서 남북국시대라고 한다는 것은 지당하다. 그런데 그는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며 삼국시대란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정립기를 가리키는 것임이 자명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삼국시대란 솥발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존재했던 역사 시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역사 신라의 역사 백제의 역사를 다루었지만 삼국이 공존했던 시기만의 역사를 썼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삼국사기}를 쓴 취지가 실린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도 '삼국시대'란 표현은 나올 수도 나오지도 않았다. 다만 '해동삼국(海東三國)'이라고 하고서 신라 고구려 백제가 나라를 세워 셋이 마주했다고 했다. 거기에 그 정립(鼎立) 시기만 다룬다는 말은 전혀 없다. 

또 그 연표의 서문에도 이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존속 연대가 서로 다름을 밝혔다. 그리고 잡지를 보면 삼국에 대해서 각각 제사(祭祀) 악(樂) 복색(服色)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지리(地理) 직관(職官)을 썼는데, 이중에 복색 지리 직관은 신라 고구려 백제로 구분했으며, 나머지 항목은 고구려와 백제의 자료가 없어서 쓰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래도 고기(古記)나 중국 사서에 나타난 것이 있으면 고구려 백제를 구분해서 기재했다. 열전에는 김유신에서부터 견훤까지 모두 50개 항목에 51명의 사람을 소개했다. 여기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로 구분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어느 사람인지는 기사의 첫머리에서 밝혔기 때문에 혼동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각국의 본기를 보면 반드시 아병(我兵) 아군(我軍) 등으로 써서 백제는 백제 사관이 고구려는 고구려 사관이 쓴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중국의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에 대한 역사를 진수(陳壽)가 지었는데, 나중에 배송지(裵松之)가 주석을 붙였고, 북송시대에 비로소 위서 촉서 오서가 따로 있었던 것을 합본해서 {삼국지}라고 한 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우성은 계속해서 '따라서 {삼국사기}는 삼국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해서 삼국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끝나야 할 것이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발해는 다루지 않고 이백 수십 년간 신라만 다루었다고 비난했다.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 등이 그렇게 긴 기간의 신라 역사만을 다룬 원인을 한번쯤은 생각했어야 했다. 김부식이 유학적 소양이 많아 정통론에 매몰되고 모화사상에 빠졌으며 신라 우월주의에 젖었으므로 이른바 통일신라만을 기재했다는 신채호의 강렬한 비난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근원은 유득공이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쪽을 소유했으니 발해다. 이것을 남북국이라고 하니 남북국사가 있어야 마땅한데 고려에서 이것을 안 지었으니 잘못이다'고 한 데에 있다. 이 모두가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남북국시대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왕진쿤도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인식하여 '12세기 중엽 고려 인종 때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했고, 고려가 영유한 토지는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 세 국가가 존재한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하고 고려 역사 속에 들여놓았는데, 이것은 틀렸다고 할 비난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고려에서 {삼국사기}를 찬술한 동기를 그 나름대로 밝히고 역시 삼국시대를 내세웠다. 그리고 남북국시대론자들이 김부식을 비난한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 특히 전혀 무관한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하려고 김부식을 비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본 남북국시대론자도 틀렸지만, '발해는 이미 고려의 판도 안에 있지 않았고, 민족도 신라 . 고려와 동족이 아닌데'라고 지연과 혈연 양면에서 발해가 한국사와 무관함을 얘기하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현대의 역사가가 200여 년 전의 전근대 역사가의 논리를 좇은 셈이다. 게다가 그는 발해 대신에 궁예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들었는데, 이는 그 북쪽에 있는 발해를 한국사에서 제외하려는 욕심이 앞서서 역사를 너무 협소하게 천착한 결과다. 더구나 그는 궁예가 발해와 아무런 관계를 안 맺은 점을 들어서 발해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박시형이 고구려와 신라에 대해서 동족 운운하는 것은 역사 사실의 위배고, 자신은 이렇게 해도 무방하다는 격이 되니 독단이 지나치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가 정연하지 않고 예증도 합리적이지 않은데,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라고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한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그도 인정했다. 

그러면 그의 말대로 삼국시대의 영토와 사람들이 양립된 발해와 신라를 포괄해서 남북국시대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간명한 사실이 혼동된 까닭은 바로 {삼국사기}를 삼국시대사로 본 데에 있다. 이점은 남북국시대론자들이나 왕진쿤 모두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 [고구려연구] 9집, 2000, 에서 실린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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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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