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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앞부분 명칭과 건국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발해국은 제국이다 : 성립 과정, 발해제국의 고구려 유민 통합 http://tadream.tistory.com/7299
발해국은 제국이다 : 제국으로서의 면모, 발해국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다 http://tadream.tistory.com/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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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국은 제국이다
서병국(대진대학교 사학과)
발해국은 제국이다 : 성립 과정, 발해제국의 고구려 유민 통합 http://tadream.tistory.com/7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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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에 그 옛 땅에 세워진 나라, 이 나라는 지금까지 발해란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중국 학자에 따르면 공식 국호가 진국(振國·震國)이고 별칭이 발해이며, 발해국은 자주국이 아니라 당나라의 지방 정부(속국)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남북한의 발해사 학자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고 있으나 중국 학자들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남북한에서 발해사 연구와 관련하여 주력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의 구명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남북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발해국의 공식 국호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남한에서는 공식 국호가 진국이며 발해는 별칭이었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북한에서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은 대중상(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세운 소국인 진국이 발전한 것이며,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가 고려후국(高麗侯國)(평안도의 서부와 요동 지역)이고 백두산의 남북 지역에도 고구려의 정치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한 북한의 발해사 연구자들은 1990년대에 새로운 관점의 발해사를 내놓았는데, 특기할 것은 대조영의 발해국(698년)을 ‘발해제국’, 소국을 ‘후국(侯國)’이라고 구분 지은 것이다. 이 소국이 황제국보다 먼저 건국되었음을 우리의 옛 문헌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등 소국의 건국을 새롭게 조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발해황제국’(발해제국)이란 명칭은 발해국이 당나라의 지방 정부였다는 중국 학자들의 관점에 쐐기를 박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필자는 북한 학자들의 새로운 발해사 연구 결과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필자의 연구와 접목시키려 한다.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 투쟁 결과 평안북도의 서부 지역과 요동 지역에 고려국(발해국의 성립 후 후국이 되었기에 고려후국이라 함)이 세워졌으며, 또한 백두산의 남북 지역에도 고구려 유민들의 세력이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이들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 투쟁은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특히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과 백두산 주변 및 영주 지방에서 가장 완강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소국이 형성되어 그 영역과 세력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갔다.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의하면 대조영이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고 한다. 성력은 측천무후의 통치 연호의 하나이며 그 시기는 698년 1월~700년 6월에 해당된다. 『구당서』는 발해국의 건국 연대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권193)에는 문무천황(文武天皇) 2년(698)에 대조영이 처음 발해국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세워진 발해국은 소국이 아니고 황제국이라고 보는 것이 북한 학자의 주장이다.
발해제국의 성립 과정
발해제국의 성립 과정은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소국의 성장 과정 그 자체이다. 발해국 성립 이전의 소국의 성립에 대해 『삼국유사』(권1, 말갈발해)에 인용된 『삼국사』에는 “의봉(儀鳳) 3년(678) 고(구)려의 유민들이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발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책부원구(冊府元龜)』(권998)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678년보다 한 해 앞선 의봉 2년(677) 2월 당나라는 투항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요동에 파견하여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을 무마시키는 동시에, 요동으로 쫓겨 온 안동도호부가 유명무실해지자 보장왕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통치케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의도와는 달리 보장왕은 압록강 이북 지방에서 반당 투쟁을 전개하는 고구려 유민과 연계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공주퉟州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들은 계속 투쟁하여 마침내 큰 세력을 이루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을 비롯하여 『삼국유사』의 「말갈발해전」에 인용된 『삼국사』에서 보듯이 의봉 3년(678) 고구려 유민들이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고구려의 재건을 꾀하는 정치 세력이 이때 성립되었음을 말한다.
『삼국사』의 편찬자가 발해국의 건국 시기를 앞당긴 것은 발해국의 건국 연대를 늦게 잡을 수 없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678년에 세워졌다는 그 발해국은 어떤 나라일까? 이는 발해제국의 성립(698)에 앞서 세워진 소국을 말하며, 대조영이 세운 발해제국과 혈연상 관련이 있는 이른바 전조(前朝)라 하겠다.
제국인 발해국의 선행 국가, 즉 전조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으나, 『삼국사』의 기사는 고구려 유민의 새로운 왕조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구려 유민들의 국권 회복에 있어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下)를 보면,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성(南城)에 의거하여 측천무후 갑신년(684)에 나라를 열었는데 발해라 이름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698년에 대조영에 의해 세워진 발해제국보다 먼저 세워진 소국의 건국을 뜻하는 듯하다.
이 『제왕운기』의 기사는 발해국보다 먼저 세워진 진국에 관한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의 기사와 통한다. 『협계태씨족보』(권1, 先祖世系)를 보면 “사성(嗣聖) 13년(696)에 중상(仲象)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震國)이라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으며, 같은 책 「왕세략사(王世略史)」에는 발해국의 존립 기간을 “1공公·14왕王 231년”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것은 ① 발해제국보다 먼저 세워진 나라를 진국이라 하였으며, ② 건국 연대를 696년으로 보아 발해국의 통치 기간을 3년을 더한 231년으로 잡았을 뿐 아니라 ③ 발해국의 통치를 1공·14왕으로 구분 지은 것이다.
걸걸중상이 세운 나라를 진국이라고 한다는 것은 『협계태씨족보』 외에 『신당서』(권219 下, 발해전)에서도 보인다. 당나라가 걸걸중상에게 주었다는 진국공이란 작위는 알고 보면 당나라가 준 것이 아니고 걸걸중상이 자칭한 소국왕으로서의 칭호이다. 걸걸중상이 재위한 기간을 보면 『협계태씨족보』와 『신당서』가 서로 다르지만 그 기간은 매우 짧다. 아무튼 이 두 책은 발해제국 이전에 진국이란 소국이 세워져 있었음을 똑같이 인정하였다.
『제왕운기』에는 고구려의 멸망 후 16년, 즉 발해제국이 세워지기 14년 전(684)에 진국이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협계태씨족보』에는 걸걸중상이 사성 13년에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성 13년이 696년이므로 이대로 보면 진국의 존립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발해제국은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에 세워진 만큼 발해국(진국)은 고구려 멸망 후 16년이 지나 세워졌으며 발해제국보다 14년 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 13년의 근거는 무엇일까. 발해제국의 전신인 진국이 684년(사성 1)에 세워졌다는 『제왕운기』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 보니 684년 이후 14년 되는 해를 계산해보면 697년이 된다. 그러면 사성 14년인데 잘못하여 사성 13년으로 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무튼 『협계태씨족보』와 『제왕운기』에 발해제국 이전에 진국이 있었다는 기사는 내용상 일치하며, 『제왕운기』에 실린 진국(발해)의 684년 건국설은 인정받을 만하다.
지금까지 발해국의 존립 기간을 228년으로 알고 있었으나 『협계태씨족보』에 실린 걸걸중상의 재위 3년을 합하면 231년이 된다. 그러나 『제왕운기』와 『협계태씨족보』의 두 기사를 종합하면 684년부터 14년간은 걸걸중상이 다스리는 소국의 시기이며, 698년부터 228년간은 대조영을 비롯한 여러 황제의 통치 기간이다. 이 두 통치 기간을 합하면 242년간이 된다.
『일본후기日本後記』, 『구당서』, 『신당서』에서도 진국과 분리하여 발해제국의 건국을 698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헌에는 걸걸중상의 진국 건국 사실이 빠져 있으며, 이를 대조영과 결부시킨 것은 걸걸중상과 대조영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96년 대조영이 영주 반란에 가담하고 나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698년 동모산에 발해국을 세웠다는 『신당서』의 기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동모산에 진국의 수도를 잡은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제국을 세우려 하였으나 아직 그럴 만한 조건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일부분만 차지한 상태이고 서쪽에는 당나라의 침략 세력이 상존하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소국의 영역으로부터 영주 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고구려 유민들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제국의 수립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을 세우려면 고구려 유민의 세력을 흡수하여 영토를 넓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진국왕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들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당나라의 침략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영주 지방에 별동대 비슷한 것을 은밀히 파견한 듯하다. 영주에 밀파된 대조영 등은 696년 그곳에 살고 있던 거란인, 말갈인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거란인들의 반당 투쟁을 신호로 하여 확대되었다. 당나라로부터 영주거란송막도독(營州契丹松漠都督)이란 벼슬을 받은 거란인 이진충은 귀성주자사 손만영 등과 함께 영주성을 함락시켰으며,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인 다음 자신이 최고 군주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무상칸(無上汗)이라고 칭하였다.
이때 고구려 사람들도 말갈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서쪽에서 거란인들의 왕성한 투쟁으로 고구려와 말갈인들의 반당 투쟁은 성과를 거두었다. 영주 지방에서 급격히 발생한 정세 변화로 고구려군의 동쪽 진출은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돌궐군과 해족奚族, 습족習族의 힘을 빌려 거란군을 제압한 당나라는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인들의 투쟁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당나라군의 지휘관은 과거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 출신의 장수 이해고였다. 이해고는 첫 번째 싸움에서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군을 격파하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고구려군을 추격하였다.
흩어진 말갈군을 규합한 대조영은 당나라의 추격군을 천문령으로 유인하여 기습, 섬멸하였다. 또한 걸걸중상은 직접 그곳으로 가서 아들 대조영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이해고만이 살아 돌아갔다. 이것이 이른바 ‘천문령 전투’이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구려 유민군은 송화강 상류인 휘발하(輝發河)를 건너 부이령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동모산(오동성 부근)으로 향하였는데 도중에 걸걸중상이 병사하고 말았다. 대조영이 이끄는 군대가 진국의 수도(舊國)에 이르자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 사람들이 대열에 가담하였다.
동모산과 그 인근에 40만 대군이 집결하자 대조영은 발해국을 세우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해제국을 내외에 선포하자 평안도의 서부 지방과 요동 지방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고려국이 후국(侯國)으로 발해제국에 편입되었다.
발해제국은 698년에 선포되었으나 고구려 유민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벌인 투쟁은 그 이전부터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678년 소국에 준하는 정치 세력이 형성된 데 이어 684년에는 진국이 소국으로서 수립되었다. 모두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웠기에 보통 ‘발해’라고 불린다. 『제왕운기』에서 진국을 발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발해제국의 고구려 유민 통합
발해가 제국이 된 것은 대조영의 집권 초기부터였다. 중국의 문헌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발해국이 당나라의 제도를 배운다 해서 해동성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와 일본이 당나라의 제도를 배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나라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다. 발해국의 ‘해동성국’이란 미칭(美稱)에는 문화적 발전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군사적 발전이 주로 포함되어 있다. 발해국은 국초부터 동방(해동)의 강대국으로 위용을 드러냈기에 당나라 등 이웃 나라에 해동성국으로 알려진 것이다.
해동성국의 탄생은 대조영이 동모산 일대에 세워진 진국을 확대하여 발해제국을 선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구당서』(권199 下, 발해말갈)에 “만세통천 연간 거란의 추장 이진충이 당나라를 반대하여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영은 말갈 사람 걸사비우와 함께 각기 망명자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가 험한 지세에 의거하여 견고해졌다. …… 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桂婁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라는 기사는 대조영이 영주에서 당나라를 반대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까지 이끌고 동모산에 당도하여 제국을 선포한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대조영이 계루(읍루)의 옛 땅, 즉 동모산 일대에 발해국을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그의 밑으로 다투어 모여들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서북 지역과 요동 지방에 세워진 고구려 유민의 나라가 스스로 발해제국의 후국으로 들어왔으며, 한반도 동북 지방의 정치 세력들도 역시 자진하여 발해제국에 속하였다.
발해국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옛 고구려의 땅을 대부분 차지하였다. 『신당서』(권219, 발해전)는 이와 관련하여 “조영이 비우의 무리까지 규합하여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진국이라 하였으며 사신을 돌궐에 파견하였다. 그 지방은 5천 리였다”라고 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발해국은 건국 초에 5천 리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구당서』(발해말갈)에는 2천 리로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2천 리의 영역이 초기의 것이며 5천 리는 강성기의 영역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2천 리와 5천 리는 다른 시기의 영역 표시가 아니고 같은 초기의 영역을 달리 표현한 듯하다. 『신당서』가 맞으며 『구당서』의 기사는 부정확하게 표시한 것으로 본다.
『구당서』는 발해국의 종족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서술하였으나 초기의 영역 표시는 신빙할 만한 자료를 인용하지 않은 데서 오류가 빚어진 듯하다. 『구당서』의 「발해말갈전」이 발해국의 지방 제도를 거의 언급하지 못한 것을 보더라도 발해국의 역사·지리 문제에서는 믿을 만한 자료를 참조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당서』 「발해전」은 발해국 건국 초기의 영토 팽창에 관하여 부여·옥저·변한·조선·해북제국(海北諸國)을 모두 차지하였다고 했다. 부여와 옥저를 차지하였다는 것은 부여 지방과 지금의 함경도 지방이 발해국 초기부터 영역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이란 단군조선의 수도 평양을 중심지로 한 인근 지역을 차지한 고려후국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변한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해북제국이 발해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풀이하면 해북제국은 바다 북쪽의 여러 나라라고도 할 수 있고, 북쪽 바다에 가까운 여러 나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바다는 어디에 있는 바다일까. 아마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부근에 있는 홀한해(忽汗海,경박호)이거나 여기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흥개호(興凱湖)일 것이다. 아무튼 해북의 여러 나라란 흑수말갈과 이에 속한 부족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흑수말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흑수말갈은 때로 남·북 흑수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당나라 때의 재상 가탐(賈耽)의 『도리기(圖里記)』를 보면 “(상경용천부는) 성이 홀한해에 임해 있고 그 서남 30리 떨어진 곳에는 옛 숙신성(肅愼城)이 있다. 그 북쪽은 덕리진(德理鎭)에서 남흑수말갈에 이르는 데 천 리가 된다”라는 기사가 있다.
위 기사에 의하면 상경에서 멀리 떨어진 덕리진에서 천 리를 가면 남흑수에 이르며 그 북쪽에 북흑수말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리진은 지금의 하바로프스크에서 천 리 또는 그 이상 남쪽으로 떨어진 곳을 말하며 상경에서 남흑수말갈로 가는 요지였다. 이로써 대조영은 초기에 하바로프스크 지방 남흑수말갈까지 병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발해국은 고구려가 차지하지 못한 북쪽 지역을 많이 개척하였으나 남쪽에서는 고구려 땅을 모두 통합하지 못하였다. 즉 고구려의 판도였던 불열(拂涅), 철리(鐵利), 월희(越喜), 우루(虞婁) 등 일부 지역과 한반도의 중부 일부 지역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지역은 발해국 영토에서 10분의 1 정도였다. 따라서 발해국은 건국 초기에 영토의 중심 지역과 말갈계의 거주 지역을 거의 통합하였다.
발해국이 건국 초기 고구려가 차지하지 못한 흑수말갈 지역과 고구려 영토의 중심 지역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국 건국 이전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진국과 고려국이 정치적 기반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조영 휘하의 유민 세력이 동모산 일대에 쉽게 모일 수 있었던 것도 요동반도에서 고구려 유민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공고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고려국은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진해서 발해국의 후국이 된 듯하다. 요동반도의 남부 지역과 한반도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려국(고려후국)이 발해국에 편입됨으로써 발해국의 영역은 서남쪽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러면 고려국은 언제 발해국의 후국이 되었을까. 보통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극도로 혼란에 빠졌던 시기라고 보고 있으나, 북한은 713년 당나라의 발해 책봉시 최흔(崔炘)이 고려국을 발해국과 구별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발해 건국 초기로 그 시기를 보고 있다. 안사의 난 훨씬 이전부터 후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발해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 동남부 지역(강원도의 동해안)은 발해국의 영역 확장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 시 이 지역은 당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고 고구려의 통치 기구가 그대로 유지된 듯하다. 이 지역에 정치 세력이 있었음은 『삼국유사』(권3, 栢栗寺)에 “국선(國仙)인 부례랑(夫禮郞)이 693년(신라 효소왕 2) 화랑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 강원도 통천)으로 놀이를 나갔다가 북명(北冥,원산 일대)에서 포로로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이야기를 그 부모에게 하는 가운데,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짐승 기르는 일을 하게 되어 대조라니(大鳥羅尼) 들판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라는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발해제국이 세워지기 전 그 동남부 지역에 정치 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도구라는 한 정치 집단에 속해 있었을 것이며 그 세력은 발해국의 동부 지역 또는 강원도의 동예 지역에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세력은 발해국이 건국 초기부터 이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부례랑에게 포로 생활을 시킨 적적狄賊은 말갈이 아니고 동예 지역의 정치 세력 집단이었다. 678년 고구려의 유민들이 태백산 아래 모여들어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기 한 해 앞서 고구려왕으로 파견된 보장왕은 말갈과 내통하였다고 해서 소환된 일이 있었는데, 이 말갈은 진짜 말갈이 아니라 고구려의 한 저항 세력임이 분명하다.
10년 이상 이웃한 발해제국의 서부 지역에 고려후국이 있었던 만큼 동남부 지역에도 정치 세력 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지역이 쉽게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발해국이 처음부터 이 지역들에 대해 군사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조영의 정치·군사적 역량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아보자. 이와 관련하여 18세기의 실학자 홍석주(洪奭周)는 『발해세가(渤海世家)』라는 저서에서 “조영은 드디어 비우의 무리 및 고구려·말갈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40만이나 되었으며 스스로 진국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내용은 『오대회요(五代會要)』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전해진다.
40만이라는 대군은 영주에서 동모산으로 진출한 대조영의 부대를 포함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병력까지를 일컫는다. 이러한 대부대를 지휘한 대조영이 용감하고 용병술이 뛰어났다는 『구당서』(발해말갈)의 기사는 믿을 만하다.
대조영이 동모산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옛 고구려 유민들뿐만 아니라 고려후국 또는 동남 지역의 기존 정치 세력들도 자신들보다 우세한 발해국에 자진하여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대조영이 용감하고 용병술이 탁월하지 않았다면 고구려 유민들과 기존 정치 세력들은 선뜻 발해국에 통합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발해국이 건국 초기에 영역을 급속하게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조영의 건국 세력이 매우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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