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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편 한국사 > 고대 > 10권 발해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3)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
노태돈
대조영집단이 徙居(사거)되어 있던 영주지역은 大凌河 (대릉하)상류로 비교적 건조한 지대였다. 이 지역은 5세기 이래 중국세력의 동북 관문이요, 동북아시아 여러 종족들의 교역 중심지였다. 7세기 이후 당제국에 흡수되어진 종족들로 구성된 羈靡州(기미주)가 다수 이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고구려 멸망 후 많은 고구려인과 말갈족이 이 지역에 옮겨져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의 영주지역에서의 거주 양태는 아마도 그들이 이곳에 옮겨오게 된 동기에 따라 일부는 집단적으로 예속된 기미주로 편제되었고, 일부는 영주 성내나 성 옆에 거주하며 편호되어 영주도독부의 직접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대조영집단은 기미주 형태로 편제되어 집단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021)
영주지역은 이른바 異族的 氣風(이족적 기풍)이 강한 곳이어서 한문화의 압력이 덜 하였고, 주위에는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지닌 종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이곳에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인들이 그들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들은 기미주형태로 집단적으로 예속되었으므로 자체의 조직과 결속력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멀리 떨어진 이국 땅에서 幽居生活(유거생활)을 하는 피복속민으로서의 동일한 처지로 인하여, 문화적·역사적 친연관계에 있는 고구려인과 말갈족 사이에는 상호 이해와 화합으로 진전된 동류의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전란과 이주에 따라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는 세월이 흐를수록 어느 정도 회복되어 갔을 것이다. 특히 戶口(호구)의 증식이라는 면에서 그러하였을 것이다. 696년 5월 거란족의 수령 李盡忠(이진충)이 돌궐의 후원을 받으며 봉기하여 당의 영주를 엄습하고 스스로 無上可汗(무상가한)이라 칭하며 당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영주지역 일대는 큰 혼란에 빠졌고, 일부 이종족 집단들은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탈해 나갔다. 당황한 唐(당) 조정은 영주지역에 설치하였던 기미주들을 대거 장성 이남지역으로 옮겨 이에 대처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족의 동향은 일정하지 못하였다. 일부는 계속 이 지역에 남아있거나 당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그래서 영주가 다시 당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며 당의 군병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유민으로서 유명한 李正己(이정기) 집안은 그 대표적 예이다. 다른 일부는 이탈하였으니, 대조영집단과 말갈족의 乞四比羽(걸사비우)집단은 東走(동주)를 택하였다. 이 때 거란은 남으로 하북성지역으로 진격하는 등 당에 대한 공격에 주력하고 있었고 당은 이를 저지하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이들 집단의 동주는 상대적으로 용이하였다. 그런데 이 때 대조영집단이 영주를 벗어나 바로 동만주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것은 아니다. 중간에 어느 곳에서 일정 기간 머물며 주변지역을 경략하면서 자체의 힘을 배양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한편 이진충이 이끈 거란군은 신속히 북중국의 하북지역으로 남진하였다. 그 해 9월 이진충이 죽자 孫萬榮(손만영)이 무리를 이끌고 당군을 격파하며 크게 세력을 떨쳤다. 수세에 몰린 당은 돌궐에 물자를 제공하며 서로 밀약을 맺어 거란을 양면에서 협공하는 방책을 도모하였고, 돌궐이 이에 응하여 거란의 배후를 기습하였다. 이에 정세는 크게 역전되었다. 거란은 본거지를 돌궐에게 유린당하였고 거란의 동맹군이었던 奚族(해족)이 돌궐에 투항하였다. 당군의 방어망이 강화되자 거란군은 궁지에 몰려 마침내 당군에 격파되어 697년 6월 진압되었다. 이 무렵 거란 장수였던 李楷固(이해고)·駱武整(낙무정) 등이 당에 항복하였다.022)
당은 영주지방을 벗어나 동쪽으로 달아나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대조영집단과 걸사비우집단에 대한 회유의 손길을 뻗쳐, 대조영의 아버지라는 乞乞仲象(걸걸중상)에게 震國公(진국공)을, 걸사비우에게는 許國公(허국공)의 작위를 주면서, 다시 이들 집단을 당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이를 거부하자 당은 거란 항장 출신의 이해고를 장수로 한 토벌군을 보내어 공격해왔다. 이 무렵 걸걸중상이 병사하고 대조영이 그 집단의 수장이 되었다. 이해고가 이끈 당군의 공격에 맞서 말갈족의 걸사비우집단이 먼저 교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걸사비우가 전사하였다. 대조영은 당군의 예봉을 피하여 일단 더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걸사비우집단의 잔여세력들을 규합하였다. 당군이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이를 天門嶺(천문령)에서 맞아 싸워 대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동진하여 동만주 牧丹江(목단강) 유역에 자리잡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당은 천문령전투 이후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였다. 이는 영주지방을 돌궐이 유린하여 북중국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고 요동지역에 대한 보급도 해로에 의존해야 할 형편이어서, 대조영집단에 대한 더 이상의 공격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023) 당은 699년 요동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安東都督府(안동도독부)로 격하시킨 뒤, 보장왕의 아들 高德武(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아 이 지역 고구려유민을 통치하게 하였다.024) 이어서 700년대초 다시 안동도독부를 도호부로 격상시켰으나 幽州(유주)지역으로 그 치소를 옮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025) 당의 동북아 방면에 대한 정책은 소극적인 방어 위주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은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과정과 관련하여 그 동안 논란이 있어왔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할 것이 있다. 먼저 대조영집단이 영주에서 탈주하여 일시 정착한 지역이 어느 곳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천문령전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조영집단과 이해고의 당군이 싸웠던 지점인 천문령은 북류 송화강의 지류인 揮發河(휘발하)와 渾河(혼하)의 분수령 지대인 哈達嶺(합달령)으로 여겨진다.026) 자연 천문령전투 이전에는 대조영집단은 그 서쪽의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근래 대조영집단의 일차 정착지를 瀋陽(심양)으로 비정하거나,027) 太子河(태자하)유역으로 여기는 설이028) 제기되었다. 그 주요 논거로 발해 멸망 후 발해인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제안한 遼(요)의 耶律羽之(야율우지)가 태자하유역을 발해인의 ‘고향’이라고 표현한 기사와,029)≪五代會要≫(오대회요)에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走保遼東 分王高麗故地’하였다는 기사를 들고 있다.030) 당시 영주와 요동의 안동도호부의 치소인 新城(신성 지금의 撫順/무순/푸순)간의 교통로는 세 갈래가 있었다. 우선 영주-燕郡(연군)-懷遠(회원)-通定鎭(통정진, 지금의 신민현 高台山/고대산)-신성으로 이어지는 北道(북도)와, 영주-연군-회원-險瀆(험독)-요동성(遼陽)-蓋牟(개모, 지금의 蘇家屯/소가둔)-신성으로 이어지는 中道(중도), 그리고 영주-연군-汝羅守捉(여라수착)-遼隊(요대)-요동성-개모-신성의 南道(남도)가 있었다.031) 그런데 696년 가을 거란군이 안동도호부성을 공격해오자, 안동도호 裵玄珪(배현규)가 이를 저지하였으며,032) 이듬해 초 요동주도독 高仇須(고구수)에 의해 거란의 공격군은 격파되었다.033) 이어 그 해 5월 고구려유민인 高文(고문)·高慈(고자) 부자가 당군을 이끌고 거란군과 싸우다 요동의 磨米城(마미성)에서 전사하였다.034) 또한 같은 해에 당의 中郞將 薛訥(중랑장 설눌)이 이끄는 5만의 병단이 해로로 요동에 파견되었다.035) 실제 5만이 아닐지라도 이 때 상당한 병력을 투입하여 요동지역의 당군을 보강한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렇듯 신성과 요동성에 당군이 버티고 있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대조영집단이 태자하유역으로 가서 그 곳에 자리잡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요동성은 바로 태자하 하류유역에 있다. 그리고 거란군과 당군이 영주에서 요동에 이르는 街道(가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대조영집단이 바로 그 길을 택하여 동주하였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대조영집단이 태자하유역에 있었다면 당연히 안동도호부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인데도, 대조영 등에 대한 공격이 서쪽에서 온 이해고의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볼 때도 그러하다. 천문령전투 이전에 대조영과 걸사비우집단은 당과 거란의 전투 와중에서 비켜서서, 영주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가도의 북쪽 요서지역 어느 곳에 머물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오대회요≫의 기사는 東走(동주)과정에서의 구체적인 사실을 시기별로 서술하였다기보다는, 발해의 건국과정에 대한 개괄적 언급을 한 것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굳이≪오대회요≫의 기록처럼 대조영집단이 요동에 왔다고 볼 경우에는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개원·창도 방면 쪽의 요동 북부지역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036)
다음은 발해의 건국 연대에 관한 논란이다.≪舊唐書≫(구당서)에서는 발해가 聖曆(성력)(698∼700) 연간에 건국하였다고 하였다. 발해가 존립하고 있을 당시에 편찬된 일본의≪類聚國史≫(유취국사)에서는 698년에 건국하였다고 하여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037)≪유취국사≫의 이 기사는 발해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여겨지며, 발해 조정의 공식적 견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 때 건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698년에 대조영집단이 목단강유역의 東牟山(동모산)지역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천문령전투가 있었던 시기가 그보다 앞선 것이었다는 점이 확실하여야 한다. 천문령전투는 거란 장수였던 이해고가 당에 항복한 697년 6월 이후부터 ‘거란 餘黨(여당)’을 토벌하고 장안에 개선한 700년 6월038) 사이에 있었다. 이해고는 대조영집단과의 천문령전투에서는 패배하였고 거란 여당 토벌전에서는 승리하여 700년 개선하였던 셈이 된다. 그러면 이 두 전투는 별개의 작전으로, 이해고는 두 차례 출정하였던 것일까. 이는 시간적으로나 거란 항장 출신이었던 이해고의 처지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거란 여당에 대한 토벌전의 일환으로 대조영집단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비록 천문령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걸사비우집단을 격파하였고 그 밖의 거란 잔당들에 대한 작전에서 성공하였기 때문에 개선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039) 대조영과 걸사비우집단도 이진충의 난 때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주하였으므로 당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거란 餘黨(여당)’이라고 간주하였을 수 있다. 그리고 이해고의 대조영집단에 대한 추격전은 영주 방면 등 요서지역의 거란족들에 대한 토벌전을 행한 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영주 방면은 거란족의 본거지와 접해 있고 장성 이남의 당의 본토와 요동을 잇는 길목이다. 이 지역을 먼저 평정하지 않고 멀리 요동지역에까지 대조영집단을 추격해갔다는 것은 역시 전략상으로 무리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해고는 요서지역의 거란 여당들을 토벌·회유한 뒤에 그 여세를 몰아 대조영과 걸사비우집단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천문령전투는 670년 6월에서 그리 멀지않은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러면 천문령전투 이전인 66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아마도 대조영이 이 때 ‘震國公(진국공)’ 걸걸중상에 이어 집단의 통수권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걸사비우의 전사 후 그 집단까지 아울러 東走(동주)하였던 무리들 전체의 통수권자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발해 건국 후 대조영이 震(振)國王(진국공)을 칭했던 것도040) 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해국의 실질적 건국은 목단강유역에 자리잡은 뒤인 700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발해의 초기 도읍지인 ‘舊國(구국)’의 위치문제이다. 이 구국에 대하여 그 동안 돈화현의 평지성인 傲東城(오동성)으로 비정해 왔으나, 오동성은 성의 짜임새나 그 곳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발해의 도성으로 보기 어려우며 목단강 상류쪽의 永勝(영승)유적이 초기 도읍지로 여겨진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041) 대조영집단이 처음 자리잡았던 ‘東牟山’(동모산)은 지금의 敦化市 賢儒鄕 城山子村(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촌)의 성산자산성으로 보고 있다. 이 산성은 목단강의 지류인 대석하를 끼고 있는 해발 600m의 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奧婁河(오루하)를 방어용으로 하고 성을 쌓아 스스로를 지켰다”는≪신당서≫발해전의 기사와 부합한다. 이 산성의 동편의 평지에 영승유적이 있다. 이 영승유적과 성산자산성 및 발해 초기의 귀족들의 무덤들이 있는 육정산고분군이 하나의 組(조)를 이루고 있다. 성산자산성은 비상시의 방어처이지만 일단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평상시의 거주지는 아니었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행해지지 않았지만 영승유적이 초기 도읍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盧泰敦>
021) 盧泰敦, 앞의 글(1981a).
022) 이진충의 난의 전개과정은 宋基豪,<大祚榮의 出自와 渤海의 건국과정>(≪아시아文化≫7, 翰林大, 1991) 참조.
023) ≪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024) ≪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高麗.
025) 津田左右吉,<安東都護府考>(≪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026) 潭其驤 主編,≪中國歷史地圖集≫(釋文匯編 東北卷, 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126∼127쪽.
027) 楊保隆,<新舊唐書渤海傳考辨>(≪學習與探索≫19842).
028) 宋基豪, 앞의 글.
林相先,<渤海 建國 參與集團의 硏究>(≪國史館論叢≫42, 國史編纂委員會, 1993).
029) ≪遼史≫권 75, 列傳 5, 耶律羽之.
030) ≪五代會要≫권 30, 渤海.
031) 王綿厚·李健才,≪東北古代交通≫(1990), 138∼152쪽.
032) ≪舊唐書≫권 59, 列傳 9, 許欽寂.
≪資治通鑑≫권 205, 唐紀 21, 則天武后 萬歲通天 원년 9월.
033) ≪陳白玉文集≫권 4, 爲建安王破賊表.
034) <高慈墓誌銘>(≪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韓國古代社會硏究所), 511쪽.
035) ≪陳白玉文集≫권 10, 爲建安王與遼東書.
036) 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一潮閣, 1995), 65쪽.
037) ≪類聚國史≫권 193, 殊俗部 渤海 上.
038) ≪舊唐書≫권 89, 列傳 39, 狄人傑.
039) 池內宏,<渤海の建國者について>(≪東洋學報≫51, 1914 ;≪滿鮮史硏究≫中世篇 1, 岡書院, 1993).
松井等,<契丹勃興史>(≪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1, 1915).
盧泰敦, 앞의 글(1981b).
040) ≪舊唐書≫권 199 下, 列傳 149 下, 北狄 渤海靺鞨.
041) 방학봉,<발해 초기의 수도에 대한 몇가지 문제>(≪발해사연구≫1, 1991).
―――,<발해수도의 변화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발해사연구≫3, 1992).
리강 저·방학봉 역,<발해 수도 오동성에 대한 의문>(≪발해사연구≫2, 1991).
宋基豪, 앞의 책, 80∼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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