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발해 건국집단과 주체민족의 족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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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자 및 건국집단의 족속과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해서는 발해의 귀속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발해사 연구 논저에서 매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이에 대한 중국학계의 동향을 검토한 연구들이 계속 나왔다.註 0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이를 거론하는 것은 발해의 귀속 문제를 논하면서 비껴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인데, 기존 연구에서 다루어진 문제들은 최소한의 언급만 하기로 하겠다.
발해의 건국집단 및 주체민족의 족속에 대해서는 대체로 고구려설, 말갈설, 발해민족설로 견해가 나뉘고, 말갈설은 다시 속말말갈설과 백산말갈설로 나뉜다. 중국학자들 대부분은 말갈설, 그 중에서도 속말말갈설을 지지하고, 일부가 발해국의 건립 및 발전과 더불어 점차 발해족이 형성되어 이들이 주체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註 080 근년 들어 발해가 다민족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속말말갈인이 주체였다는 전제하에 다민족구성을 말하고 있다. 다민족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속말말갈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발해 건국과정과 그 후 발전과정에서의 고구려인의 참여와 역할을 부정해야 하거나 최소화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고, 이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로서의 당조의 ‘중화민족’관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고구려 및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지금 고구려와 발해의 연관성을 애써 부정할 것까진 없다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점에서 샤오홍/초홍(肖红/肖紅)의 주장은 주목된다. 그에 의하면, 발해 선인(先人)의 족속에 관해 학계에 말갈설과 고려설 양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발해건국자가 말갈인인가 고려인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갈과 고려가 중국에 예속했는가 아닌가에 있다는 것이며, 만약 고려인 역시 중국민족이라면 설령 발해건국자가 고려인이라도 발해가 중국에 귀속된다는 결론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註 081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말갈인인가 고구려인인가의 논쟁은 주로 『신당서』 발해전의 “발해, 본속말갈부고려자, 성대씨)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와 『구당서』 발해말갈전의 “발해속말대조영자. 본고려별종야(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이 두 기사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 중국학자들은 대부분 『신당서』 기사에 의거하여 대조영은 속말말갈인이라고 주장한다. 『구당서』의 ‘고려별종(高麗別種)’에 대해서는 발해의 족속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가 있는데, 특히 이것이 고구려설의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학자들은 ‘고려별종’과 고구려의 관계를 부정하려는데 힘을 쏟고 있다.
장비보/장벽파(张碧波/張碧波)는 ‘별종’이란 중국고대 사가(史家)가 민족원류·민족관계를 기술할 때 창조한 특유의 관념이라고 주장하였다. 별종은 본종족과 다르다는 것, ‘고려별종’은 발해가 고구려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정치세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화민족 다원일체구조의 형성과정에서, 그리고 민족문화의 충돌·교류·융화의 복잡한 과정에서, 민족의 천사(遷徙)는 부단히 진행되었고, 민족과 민족의 분열과 통일, 겸병과 귀부(歸附)의 정황은 매우 복잡하였는데, 『신당서』는 이 복잡한 정황을 인식하고서, “발해본속말말갈부고려자, 성대씨(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고 명확히 기록하였다는 것이다.註 082
* 천사(遷徙) : 움직여 옮김
* 겸병 : 둘 이상의 것을 하나로 합치어 가짐
리젠차이/이건개(李健才)는 ‘고려별종’이란 장기 이래로 고구려 관할 경내에 거주하며 고구려에 의부(依附)하거나 신속(臣屬)했던 백산말갈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유사』에 대조영이 ‘고려구장(高麗舊將)’이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와 백제인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당조에서 관직을 맡았지만 한인(漢人)이 아니라 고려인이고 백제인인 것과 같은 맥락으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註 083
마이홍/마일홍(马一虹/馬一虹)은 ‘별종’이란 그 함의가 모호한 단어로, 고대사가들이 역사상 연계가 밀접하고 관계가 복잡한 각 종족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습관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즉, 활동구역이 가깝거나 같고 습관도 가까운 두 종족이 뒤섞여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채택된 일종의 모호한 구별방식이라는 것이다.註 084
왕청궈/왕성국(王成国/王成國)은 ‘고려별종’을 고구려의 별부(別部)로 이해하였다. 걸걸중상(乞乞仲象)·대조영(大祚榮) 부자를 수령으로 하는 속말말갈은 일찍이 고구려에 의부하였고, 그들이 거족적으로 요서의 營州로 이주하기 전에 속말말갈은 백산말갈과 마찬가지로 그 활동지역이 고구려에 의해 점령되었을 뿐 아니라 고구려의 별부(別部) 신분으로 장기간 고구려의 각 부와 함께 생활하고 전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의 찬자는 속말말갈을 고구려의 별부(별종)라고 사서에 써넣었다는 것이다.註 085
‘고려별종’에 대해 장쇼펑/강수븡(姜守鵬)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별종(別種)’은 이미 정해진 함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별종(別種)’은 ‘별족(別族)’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족이라는 의미로, ‘동종’이 아님은 물론이고 동종의 후예나 동종의 분파·방계도 아니라고 하고, 동종의 후예나 분파·방계는 ‘분종(分種)’이지 ‘별종(別種)’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별종이란 별부(別部)와 같다. 정치상으로는 서로 통속되어 있지만, 종족상으로는 열에 아홉이 서로 다른 부락이다”라는 저이량/주일량(周一良)의 견해에 동조한다고 하였다.註 086 그에 의하면, 문제는 다른 종족의 일족이 왜 모종족의 ‘별종’으로 칭해지고 기타 종족의 ‘별종’으로 칭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문헌에서 어떤 종족이 모종족의 ‘별종’으로 칭해지는 경우 양자의 관계를 보면, 우선 모종족의 별종과 모종족은 하나의 종족이 아니고, 다음으로 모종족의 별종으로 칭해지는 종족은 일찍이 모종족에 정복되었거나 신복하였거나 모종족의 고지에서 생활하여 생활상·습속상 모종족과 얼마간 같은 점이 있기 때문에 모종족의 ‘별종’으로 칭해졌다. 당연히 역사 발전과정에서 모종족의 ‘별종’이 장기간의 융합으로 인해 최후에는 모종족과 융합되어 일체가 되거나 융합되어 새로운 종족으로 되기도 하지만, 결과를 가지고 그 초기 모종족의 별종으로 칭해질 때 모종족과는 다른 종족에 속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장쇼펑(姜守鵬)은 이러한 ‘별종’의 이해에 따라 “발해속말대조영자, 볼고구려별종야)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를 해석하면, 발해국의 건립자 대조영은 말갈인이고, 일찍이 고려의 통치에 예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를 고려별종으로 칭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다.註 087
류이/류의(刘毅/劉毅)는 신·구당서의 편찬과정을 분석하여 전체적으로 『신당서』가 『구당서』보다 우수한 사서라는 것을 통해, 대조영의 족속에 대한 신·구당서의 양 기사 중 『신당서』의 기사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당서』는 『구당서』의 많은 문제점을 개정하여 사실상 『구당서』의 개정판이나 다름없다고 하고, 특히 발해사와 관련하여 『신당서』는 『구당서』가 참고하지 않은 새로운 사료들, 그 중에서도 발해에 출사하여 1년 남짓 체류하면서 발해를 직접 견문하고 그 족원, 정치, 경제, 문화, 사회풍속에 관해 정확한 기록을 남긴 장젠장/장건장(张建章/張建章)의 『발해국지(渤海國志)』를 참고하였다는 점에서, 내용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편찬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기초한 『구당서』보다 훨씬 뛰어난 사서라고 평가하였다.註 088
‘고려별종’에 대한 이상의 해석이나 주장은 기본적으로 신·구당서의 양 기사에 차이나 모순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양당서의 기사에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구당서』의 기사에서 ‘고려별종(高麗別種)’을 어떻게 해석하든 앞에서 “발해속말대조영자(渤海靺鞨大祚榮者)”라고 하여 대조영이 말갈임을 선언하고 있으니, 사실상 신·구당서의 내용은 모순되지 않으며,註 089 『신당서』의 “속말말갈부고려자(粟末靺鞨附高麗者)”는 실제로 『구당서』의 ‘고려별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註 090 더더구나 『구당서』는 발해말갈과 고려를 각각 「북적전(北狄傳)」과 「동이전(東夷傳)」에 넣고 있어, 그 편찬자가 대조영이 속한 말갈족을 고려족과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註 091
왕청리/왕승례(王承礼/王承禮)는, 발해 건국자 대조영과 그 집단은 속말말갈인이고, 발해는 속말말갈인이 일부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건립한 민족정권이며 이밖에 한족과 부여족 등의 민족도 포함되어 있는 다민족국가인데, 대조영은 고구려인이다, 발해국은 고구려인이 건립한 국가이다, 발해국의 통치민족 내지 주체민족은 고구려인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다, 발해와 신라는 서로 조선역사상의 남북국시대를 구성하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어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서(이 가운데 고구려 계승국설 및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왕승례의 견해는 후술함), 중국·일본·조선의 고대문헌을 고찰한 결과 대조영 및 그 집단은 속말말갈인이고 발해국의 주체민족은 말갈인이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註 092
웨이궈종/위국충(魏国忠/魏國忠)·하오칭윈/학경운(郝庆云/郝慶云)은 이른바 ‘동분(東奔)’ 대오의 주체 및 주도세력을 분석하여 발해국의 건국집단이 속말말갈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696년 거란이 일으킨 ‘영주(營州)의 난’ 이전에 그곳에는 이미 6만 명 정도의 말갈인이 있어 잠재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주의 난’에 휘말려들었다가 당조에 의해 반란이 평정된 후, 대조영의 지휘하에 698년 ‘동분(東奔)’하여 자주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 동분(東奔) 대오의 주체와 주도세력이 속말말갈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동분(東奔)’ 대오는
①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대조영(大祚榮) 부자가 거느린 집단으로, 바로 이전에 고려에 의부(依附)한 적이 있었던 말갈(『구당서』의 ‘고려별종/高麗別種’),
② 걸사비우(乞士比羽) 사후 그 여중(餘衆)의 절대 부분(『신당서』의 “조영즉병비우지중/祚榮卽幷比羽之衆”),
③ 영주 일대의 고려 여중(餘種), 즉 고려유민(신·구당서의 조영"합고려말갈지중이거해고"/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④ 이밖에 그 지역의 한인(漢人)·해인(奚人) 및 거란인 등, 네 개의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동분(東奔) 대오의 총수는 대략 6~7만 정도였는데, 이 중 말갈인이 최소 5만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고려유민이었지만 그 수는 말갈인보다 훨씬 적었으며, 한인·해인·거란인의 수는 더욱 적었다. 대오의 주체 및 주도세력의 족속을 보면 말갈인이 전체의 7~8할을 점하였는데, 영수인 대조영 일가도 말갈인이었고, 그 휘하 핵심인물도 대부분 속말말갈인이었다. 동분(東奔) 대오의 주체 및 주도세력은 말갈인, 확실히 말하자면 속말말갈인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註 093
* 동분(東奔) : 동쪽으로 뛰다
* 여중(餘衆) : 나머지 군중
웨이궈종/위국충(魏国忠/魏國忠)·궈수메이/곽소미(郭素美)도 대조영의 동분(東奔)을 전후하여 영주(營州) 일대 말갈인의 영수 및 이들 ‘동분(東奔)’자(者)를 거느린 우두머리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걸사비우(乞士比羽)와 걸걸중상(乞乞仲象)이 통솔한 부중(部衆)이 어떤 집단이었는가를 분석한 결과, 발해국의 주체민족은 말갈(정확히 말해 속말말갈)일 수밖에 없고 고구려족이나 고구려유민이 절대 아니며, 발해국은 말갈인의 국가이고 절대 고구려인의 국가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도 ‘동분’대오 집단을 넷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내용은 위에서 살펴본 웨이궈종(魏国忠/魏國忠)·하우칭윈(郝庆云/郝慶云)과 대동소이하다.
다음으로 ‘동분(東奔)’ 대오의 영도집단을 분석하였다. 대조영 일가 및 그 소부(所部)의 주요 성원이 핵심이었고, 원래 乞士比羽 휘하에 있었던 수령들도 중요 인물이었다. 고구려 유민이 천문령(天門嶺) 동쪽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감안하면, 고구려유민 상층인사 일부도 지도층 가운데 들어가 있었겠지만 그 수나 지위 모두 말갈인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상의 분석에 의하면, ‘동분’ 대오의 주체 및 주도세력은 말갈인, 정확히 말해 속말말갈인이었다. 말갈인이 ‘동분’ 대오의 주체와 주도세력이었다면, 그들이 대씨 건국집단의 주체나 주도세력이 되었을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후 200여 년 간 발해 왕실은 시종 대씨였고, 지금까지 알려진 380명의 발해인 중 117명이 발해 대씨이며, 이들이 왕정에서 시종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보면, 통치민족과 주체민족으로서 속말말갈의 지위는 시종 변하지 않았다. 반면 고씨(高氏) 관원 중 최고 문관직은 중앙의 경우 ‘소경(少卿)’, 지방의 경우 ‘주자사(州刺史)’이고, 무관직은 산위(散位)로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실직으로는 낭장(郎將)일 뿐으로, 귀족 혹은 ‘주도’ 지위와는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이들을 발해국의 주체민족이나 주도세력으로 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웨이궈종(魏国忠/魏國忠)과 궈수메이(郭素美)는 발해국이 말갈인의 국가이고 주체민족이 말갈이라는 것은 중국, 일본, 신라의 많은 문헌고적과 고고자료에 의해서 충분히 검증된다고 하였다. 첫째, 중국측 자료로는
① 당대의 문헌자료인 『당육전』과 장구령(張九齡)의 「칙신라왕김흥광서(勅新羅王金興光書)」에 ‘발해말갈’, 『통전』에 ‘말갈’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
② 714년 세워진 당 흥려사 최흔(唐 鴻臚卿 崔忻)의 「홍려정란석각(鴻臚井欄石刻)」에 나오는 그의 관명이 ‘칙지절선로말갈사(勅持節宣勞靺羯使)’라는 점,
③ 『구당서』·『당회요』·『오대회요』·『책부원구』·『신당서』 등 오대와 송대에 편찬된 사서에 모두 발해를 ‘발해말갈’ 혹은 ‘말갈’이라 칭했다는 점을 들었다.
둘째, 일본측 자료로는
① 『속일본기』의 “견도도진경진사종칠위제군안남등육인우말갈국(遣渡島津輕津司從七位諸君鞍男等六人于靺鞨國)”과, 『유취국사(類聚國史)』의 “기국연무이십리(其國延袤二十里), 무주현관역(無州縣館驛, 처처유촌리(處處有村里), 개말갈부락(皆靺鞨部落)”에서 ‘말갈’이라 칭하였다는 점,
② 762년 세워진 「타가성석비(多賀/たが城石碑)」의 “타가성(多賀城) … 거말갈국계삼천리(去靺鞨國界三千里)”에 ‘말갈’이 나온다는 점을 들었다.
셋째, 신라측 자료로는 최치원(崔致遠)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명백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선택된 어휘로 ‘발해지원류(渤海之源流)’가 ‘말갈지속(靺鞨之屬)’에서 나왔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註 094
리젠차이/이건재(李健才)는 발해의 건국자가 속말말갈이 아니라 백산말갈이라고 주장하였다.註 095 그는 고려 북부의 말갈 각부(各部), 특히 백산말갈과 속말말갈의 지리적 위치 및 그들과 고려와의 관계, 그리고 발해왕국의 창건자와 건도지(建都地)를 살펴볼 때, 발해왕국은 고려인이 아니라 말갈인이, 말갈인 중에서도 속말말갈인이 아니라 백산말갈인이 창건하였음이 분명하고, 『구당서』의 ‘고려별종(高麗別種)’이란 “소부우고려(素附于高麗)”한 백산말갈인을 가리키지 “매구고려(每寇高麗)”한 속말말갈인을 가리키지 않으며 더더구나 고려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구당서』의 “발해말갈대조영자(渤海靺鞨大祚榮者), 본고려별종야(本高麗別種也)”는 대조영의 족속을 언급한 것이고, 『신당서』의 “발해(渤海), 본속말말갈(本粟末靺鞨), 부고려자(附高麗者), 성대씨(姓大氏)”는 발해왕국을 창건한 족속을 언급한 것이라며, 『신당서』의 기사는, 발해왕국이 속말말갈과 고려에 의부한 자(=고려별종/高麗別種=고려에 의부했던 백산말갈), 이 양대 말갈부락집단에 의해 창건되었고 그 영도자의 성은 대씨라고 이해해야 하며, 이렇게 이해해야만 역사사실과도 부합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속말말갈은 고려에 의부하거나 신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註 096
장비보/장벽파(张碧波/張碧波)는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의부했다는 ‘의부(依附)’설,註 097 발해 건국집단이 백산말갈이었다는 ‘백산(白山)’설,註 098 걸걸중상(乞乞仲象)·걸사비우(乞士比羽) 집단이 거란의 영주(營州) 반란에 참여했다는 ‘반란’설註 099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발해 건국사는 신라·일본 등의 사료의 영향을 받아 양당서 발해전과 발해말갈전의 기술에 모순이 조성되었고, 아울러 발해 건국사 연구에 의부설·백산설·반란설 등의 오류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발해사 연구에서 명확히 정리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는 그 건국사라고 하면서, 발해말갈의 족속, 대조영의 출신, 발해말갈과 고구려의 관계,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여중(族衆)이 영주 반란에 참가했는가, 무측천(武則天)은 왜 걸걸중상·걸사비우를 진국공(震國公)·허국공(許國公)에 책봉하였는가, 대조영은 왜 “진국왕(震國王)이라 자칭(자호진국왕/自號震國王)”했는가, 당조는 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는가 등은 모두 발해건국사의 핵심문제이며 쟁론이 되고 있는 문제라고 하였다.
그는 고구려와 관계(신부/臣附)를 맺고 아울러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백제를 침공한 것은 말갈족속 가운데 백산부이고,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속(臣屬)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속말말갈은 수 문제 개황(隋 文帝 開皇) 연간에 전 족속이 수조(隋朝)에 내부(內附)하고 영주에 거처하며 1세기 동안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아 말갈족사상 유일하게 발전하고 강대해질 수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진국(震國)-발해국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속말말갈이 일찍이 고구려에 의부하여 그 ‘별종(別種)’이 되었다고 보는 ‘의부(依附)’설은 오류라고 하고, 이러한 관념은 최치원(崔致遠)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나오는 “발해지원류야(渤海之源流也), 구려말갈지시(句麗未滅之時), 본위우췌부락(本爲疣贅部落)”에서 최초로 유래하였고, 『구당서』의 ‘부고려자(附高麗者)’, 『신당서』의 ‘고려별종(高麗別種)’은 바로 여기에 근본하고 있으며, 이로써 중국사학에 일대 오류가 조성되었고, 북송대에는 서긍(徐兢)처럼 고구려·발해·왕씨고려를 하나의 역사계열로 간주하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는데, 최치원을 대표로 하는 신라인이 발해말갈을 “본위(고구려)우췌부락/本爲(高句麗)疣贅部落”으로 인식한 것은 발해와의 ‘정장(爭長)’ 사건과 신라인의 발해관이 그 배경에 깔려있다고 주장하였다(신라인의 발해관에 대해서는 후술함).
* 신부(臣附) : 신하로 복종
장비보/장벽파(张碧波/張碧波)는 ‘백산(白山)’설을 주장한 리젠차이/이건재(李健才)에 대해 이상과 같은 신·구당서의 발해전과 발해말갈전의 모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신당서』의 기사를 잘못 구독(앞의 리젠차이/李健才 부분 참조)하였는데, 그것은 구문형식에도 맞지 않고 원의(原意)에도 맞지 않은 오독·오판에 속한다고 비판하였다. 걸걸중상·걸사비우 등이 거란의 영주(營州)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반란’설에 대해, 장비보(張碧波)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이진충(李盡忠)의 위협과 유혹을 피하고 족중(族衆)을 보호하기 위해 곧바로 ‘동주(東走)’하여 ‘자고(自固)’하였고 결코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무측천(武則天)은 이들이 반란에 참가하길 거절하고 ‘동주(東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당조의 반란 평정에 도움이 되었다는 데 기뻐하여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는데, 걸사비우가 ‘불수명(不受命)’함으로써 속말말갈은 일대 위기에 봉착하였다. 무측천(武則天)은 그들을 거란의 ‘여당(餘黨)’, 당조에 대한 ‘반인(反人)’으로 보고, 이해고(李楷固)를 파견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대조영은 고려·말갈의 무리를 규합해서 이해고(李楷固)에 항거하여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써 건국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註 100 장비보(張碧波)는 대조영이 왜 “진국왕(震國王)이라 자칭”했는가, 당조가 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는가도 발해건국사의 핵심문제이며 쟁론이 되고 있는 문제라고 지적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 자고(自固) : 스스로 튼튼하게 하다
* 불수명(不受命) : 명을 받지 않다
* 여당(餘黨) : 잔당
샤오홍/초홍(肖红/肖紅)은, 발해국이 당황조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것은 중국학자의 공동 견해이지만, 수백 년에 걸친 발해의 발전과정 중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고, 국외학자의 경우 구체적인 사실(史實)에 대한 다른 인식들을 이용하여 중국학자와 완전히 다른 결론을 얻고 있기 때문에 발해왕국과 당황조의 관계의 변화과정을 살펴 발해국의 귀속성격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역사상 특정 정권이 당시의 중국 중앙황조에 귀속했는가 여부는 중국의 전통강역 안에 있었는가 밖에 있었는가와 각각의 경우 중국 중앙황조와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에 따라 결정되는데, 발해왕국은 그 대부분의 영토가 중국 전통강역 안에 있었으므로 중국지방정권에 속했음은 틀림없지만, 수백 년 동안 중앙황조와의 관계가 누차 변했고 따라서 그 귀속 정도와 성격도 누차 변했다는 것이다. 그는
① 발해건국 전 발해 선인(先人)과 당황조의 관계,
② 발해국 건국 과정에서 당황조와의 관계,
③ 발해 전기 당황조와의 관계,
④ 발해 후기 당황조와의 관계
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발해국 200년의 역사에서 보면, 발해는 시종 주로 중국 전통강역 내에 위치하였고, 시종 당에 조공하고 당의 관할을 받았으며, 줄곧 당의 번속이고 지방정권이었다. 따라서 발해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의 일부분이었다.註 101
주
註) 079 노태돈, 「발해국의 주민구성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고려별종(高麗別種)’과 ‘발해족(渤海族)’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윤휘탁, 「근현대 중국의 고구려·발해 인식」(『광복 59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7주년 기념, 제18회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엄-한국근대사와 고구려·발해인식』, 2004년 8월 13일), 30~35쪽;임상선, 「중국의 발해·고구려사 왜곡의 내용과 문제점」(『고구려연구재단 제1차 국내학술회의-중국의 ‘동북공정’, 그 실체와 허구성』, 2004년 10월 26일), 137~155쪽.
註) 080 발해민족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로 쑨진지/손진기(孙进己/孫進己)가 있다(「발해민족적형성발전과정(渤海民族的形成發展過程)」, 『북방문물(北方文物)』 1994-2). 그의 발해민족설에 대해서는 노태돈, 「발해국의 주민구성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고려별종(高麗別種)’과 ‘발해족(渤海族)’을 둘러싼 논의를 중심으로-」와 임상선, 「중국의 발해·고구려사 왜곡의 내용과 문제점」에 자세히 소개, 논평되었으므로 고찰에서 제외하였다.
註) 081 샤오홍/소홍(肖红/肖紅), 「종발해국화중앙황조관계적연변간발해국적귀속성질(從渤海國和中央皇朝關係的演變看渤海國的歸屬性質)」(『북방문물(北方文物)』 2004-1).
註) 082 장비보(張碧波), 「발해대씨고(渤海大氏考)」『학습여탐색(學習與探索)』 1998-5).
註) 083 리젠차이(李健才), 「당대발해국왕적창건자시백산말갈인(唐代渤海王國的創建者是白山靺鞨人)」(『민족연구/民族硏究』 2000-6).
註) 084 마이홍/마일홍(马一虹/馬一虹), 「당봉대조영발해군왕호고(唐封大祚榮“渤海郡王”號考)-겸급당조대발해여고구려관계적확인(兼及唐朝對渤海與高句麗關係的確認)」(『북방문물(北方文物)』 2002-2).
註) 085 왕청궈(王成國), 「발해는 고구려계승 국가인가?(渤海是繼承高句麗的國家嗎?)」(『사회과학전선(社會科學戰線)』 2001-6).
註) 086 저이량(周一良), 『논우문주지종족(論宇文周之種族)』(『역사어언연구소집간(歷史語言硏究所集刊)』 1939, 제7본/第7本 제4분/第4分).
註) 087 장쇼펑(姜守鵬), 「재담발해적족송문제(再談渤海國的族屬問題)」(『사회과학전선(社會科學戰線)』 2001-3).
註) 088 류이(劉毅), 「발해국족원고(渤海國族源考)-이중국·일본·조선사료의거(以中國·日本·朝鮮史料爲据)」(『일본연구(日本硏究)』 1998-4).
註) 089 웨이궈종(魏國忠)·하오칭윈(郝慶云), 「발해건국전사사고(渤海建國前史事考)」(『학습여탐색(學習與探索)』 2001-1).
註) 090 웨이궈종(魏國忠)·궈수메이(郭素美), 「논발해주체민족적족속문제(論渤海主體民族的族屬問題)」(『사회과학전선(社會科學戰線)』 2001-3).
註) 091 왕청리(王承禮), 『중국동북적발해여동북아(中國東北的渤海國與東北亞)』, 39~41쪽;장쇼펑(姜守鵬), 「재담발해국적족속문제(再談渤海國的族屬問題)」(『사회과학전선(社會科學戰線)』 2001-3).
註) 092 왕청리(王承禮), 『중국동북적발해국여동북아(中國東北的渤海國與東北亞)』, 38~48쪽.
註) 093 웨이궈종(魏國忠)·하오칭윈(郝慶云), 「발해건국전사사고(渤海建國前史事考)」(『학습여탐색(學習與探索)』 2001-1).
註) 094 웨이궈종(魏國忠)·궈수메이(郭素美), 「논발해주체민족적족속문제(論渤海主體民族的族屬問題)」(『사회과학전선(社會科學戰線)』 2001-3);궈수메이(郭素美), 「발해국역사적귀속(渤海國歷史的歸屬)」(『북방논총(北方論叢)』 2002-2).
註) 095 동완룬/동만륜(董万仑/董萬崙)도 발해의 주요 건국자는 백산말갈이라고 하였고(『동북사강요(東北史綱要)』, 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154쪽), 웨이궈종(魏國忠)·하오칭윈(郝慶云)도 건국집단의 주체민족이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수의 백산부인(白山部人)도 있었다고 지적하였다(「발해건국전사사고(渤海建國前史事考)」, 『학습여탐색(學習與探索)』 2000-1).
註) 096 리젠차이(李健才), 「당대발해왕국적창건자시백산말갈인(唐代渤海王國的創建者是白山靺鞨人)」(『민족연구(民族硏究)』 2000-6).
註) 097 웨이궈종(魏國忠)·하오칭윈(郝慶云)·궈수메이(郭素美)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그 내용은 앞에서 소개하였다.
註) 098 바로 앞에서 소개한 리젠차이(李健才)의 주장을 가리킨다.
註) 099 웨이궈종(魏國忠)·하오칭윈(郝慶云)·궈수메이(郭素美)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그 내용은 앞에서 소개하였다.
註) 100 장비보(張碧波), 「중심발해건국사(重審渤海建國史)-겸평"의부"설·백산"설·"반란"설(兼評“依附”說·“白山”說·“叛亂”說」(『民族硏究』 2001-5). 장비보/장벽파는 이렇게 하여 발해국이 건립된 다음 발해국내의 속말부를 비롯한 말갈 제부(諸部), 기자조선·위만조선의 유인(遺人), 예맥·옥저·고구려의 유민이 모두 발해인이라 자칭하였고, 이들 다민족이 융합하여 속말말갈을 주체로 한 발해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관우발해왕실고구려의식적고변(關于渤海王室高句麗意識的考辨), 『북방논총(北方論叢)』 2002-1).
註) 101 샤오홍(肖紅), 「종발해국화중앙황조관계적연변간발해국적귀속성질(從渤海國和中央皇朝關係的演變看渤海國的歸屬性質)」(『북방문물(北方文物)』 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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