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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성
북쪽 변경을 살펴 군현을 두다 ( 748년 08월 ) - 한국사DB
한국사DB > 삼국사기 > 권 제9신라본기 > 제9 경덕왕(景德王)
아찬 정절(貞節)註 001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점검하여 살피게 하고,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註 002 등 14개의 군과 현을 두었다.註 003
註) 002 대곡성(大谷城) :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地理)4 고구려(高句麗)조에 한산주(漢山州)에 소속된 군현으로 대곡군(大谷郡)이 보인다. 고구려 때 다지홀(多知忽)로 불렸으며, 신라에서 여기에 대곡군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영풍군(永豐郡)으로 개칭하였다. 대곡군은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북한의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으로 비정된다. 성덕왕(聖德王) 34년(735)에 당으로부터 패강(浿江), 곧 대동강 이남의 땅을 할양받은 후 이때 군현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지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선덕왕(宣德王) 3년(782) 대곡성을 중심으로 패강진(浿江鎭)이라는 군진을 설치하였다.
[고구려사 명장면 123] 무너지는 고구려 (4) 마지막 나당연합 - 매경
이에 앞서 신라군이 아직 북상하기도 전인 6월 무렵에 고구려 남부전선의 요충지였던 대곡성과 3경의 하나인 한성(漢城)이 당군에 항복하였기에, 남부전선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남부전선의 최후 항전인 사천원 전투라도 있어서 고구려 마지막 자존심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다만 백제 황산벌 전투는 계백의 충정과 5천 결사대의 장렬한 최후로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구려의 사천원 전투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서 더욱 비장하게 느껴진다.
패강진 설치의 역사적 의미 - 경인일보
748년(경덕왕 7) 대곡성(평산군) 등 14개 군현을 설치하고, 762년 멸악산맥에 인접한 오곡성 등 6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각각 태수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을 계속 전개하여 헌덕왕대에 취성군(황주)과 그에 속하였던 토산현(상원), 당암현(중화), 송현현(송현)을 더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 기록된 28개 군과 49개 현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모두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북방개척은 발해의 남진을 저지하고 패강 이남 지역을 군현으로 편제하여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는 방향에서 진행하였던 바 당연히 군현 설치와 더불어 이 지역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적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당시까지 한산주에 설치된 군사 조직들은 모두 한강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 개척한 지역을 북방세력으로부터 방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신라의 중앙정부는 781년 사신을 파견하여 패강 이남 군현의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782년(선덕왕 3) 왕이 직접 한산주를 순행하고 이 지역 백성들을 패강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패강지역에 새로운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782년 대곡성에 진을 설치하는 것으로 구체화되고, 드디어 패강진을 설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치된 군현은 모두 한(산)주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패강 이남지역까지 한산주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평주 (平州) - 민족문화대백과
황해도 평산지역의 옛 지명.
고구려의 다지홀(多知忽)이었는데 뒤에 대곡군(大谷郡)으로 고쳤다. 747년(경덕왕 6)대곡성(大谷城)을 설치하였고 757년영풍군(永豊郡)으로 바꾸면서 진서(鎭瑞)ㆍ단계(檀溪)를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한주(漢州)에 예속시켰다.
패강진 (浿江鎭) - 민족문화대백과
신라통일기(新羅統一期) 서북지방에 설치한 군진(軍鎭).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한 뒤 패강(浿江: 예성강 혹은 대동강) 유역의 고구려 옛 땅을 점유하고 있었다.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이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받게 되면서 이 지방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748년(경덕왕 7)에는 예성강(禮成江) 이북에 대곡성(大谷城) 이하 14군현(郡縣)을 두었고, 762년에는 오곡성(五谷城) 이하 6성을 수축하여 태수(太守)를 두었다. 이 지역에 군현 설치 후 다시 6성을 설치한 것은 발해(渤海)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패강진전 (浿江鎭典) - 민족문화대백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관서.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설치한 군진(軍鎭)인 패강진의 관리를 맡았다. 패강진의 본영은 예성강을 끼고 있는 황해도 평산(平山)으로 추정되고 있다.
패강진전의 군관조직은 최고책임자로 두상대감(頭上大監)을 두고 그 밑에 대곡성두상(大谷城頭上)을 두었으며, 다시 그 아래에 대감(大監)·두상제감(頭上弟監)·제감(弟監)·보감(步監)·소감(少監)을 두었다.
두상대감은 1인으로 782년(선덕왕 3)에 설치하였고, 대곡성두상은 급찬(級飡)으로부터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로 삼았다. 대감은 7인으로 관등은 태수(太守)와 같은 까닭에 중아찬(重阿飡)에서부터 사지(舍知)까지로 삼았다.
패강진 - 나무위키
그러나 통일신라 하대에 북진을 계속하며 서북쪽에 군현이 계속 늘었고, 성덕왕 34년(735)에 나당전쟁의 앙금으로 통일신라의 영토를 인정하지 않아왔던 당나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 영유를 완전히 인정받아 수자리를 설치한다. 선덕왕 3년(782)에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으로 비정되는 대곡성(大谷城)에 패강진전(浿江鎮典)이란 관청을 설치, 패강 지역을 군정 형태로 통치하게 되었다.[2]
화려와 불내가 침략해 오다 ( 40년 09월 )
한국사DB > 삼국사기 권 > 제1신라본기 제1 > 유리(儒理) 이사금(尼師今)
17년(40)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註 001과 불내현(不耐縣)註 002 두 현의 사람들이 연계하여 모의하고서는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註 003의 거수(渠帥)가 군사를 내어 곡하(曲河)註 004의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쳐서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더불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불내현(不耐縣):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했던 영동 7현의 하나로, 동부도위의 치소이기도 하다. 『한서』 권28 지리지 낙랑군조에는 ‘불이(不而)’로 나온다. 애초에는 임둔군 소속의 현이었다가 B.C. 82년에 임둔군이 소멸하자 현도군으로 이속되었고, 얼마 후 현도군마저 퇴축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 관할 현으로 바뀌었다. 서기 30년에 동부도위가 혁파되면서 불내현은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고, 그 후 어느 시기엔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예(濊)조에 의하면, 245년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이끄는 위(魏)군이 영동예(嶺東濊)를 정벌하자 불내후(不耐侯) 등이 항복하였다고 하며, 247년에 이들이 조공을 바쳐오니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했다고 전한다. 불내현의 구체적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재의 강원도 통천 또는 안변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5~202쪽).
불이현(不而縣) - 한국역사용어
불이현(不而縣)
낙랑군이 BC 75년에 임둔군의 고지(故地)를 병합 단단대령(單單大嶺) 이동(以東)의 옛 땅에 설치한 낙랑군 동부도위의 7현 중에 하나. 관구검이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을 점령하고 불내성(不耐城)이라고 새겼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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