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아래
금산(金山)
이적 당군이 신성을 빼앗고 천남생 군과 합하다 ( 667년 09월 )
한국사DB >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제10 > 보장왕(寶藏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고〕간이 진격하여 금산(金山)註 003에 이르러 아군과 싸워 패하였다.
금산(金山) :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현재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시[瀋陽市] 서북쪽 랴오허[遼河]의 북안(北岸)에 있는 산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는데(鄭求福·盧重國·申東河·金泰植·權悳永, 2014,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 (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412쪽),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37 산동(山東) 안동위(安東衛)조에 의거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금산(金山), 위(衛)의 서북 350리, 요하 북안에 있으며, 곡거금산(曲呂金山)이라고도 한다. 또 서북 30리에 동금산이라 불리는 것과, 또 20리에 서금산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세 산이 300여리 이어져 있다(“金山, 在衛西北三百五十里, 遼河北岸, 一名曲呂金山. 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 又二十里曰西金山. 三山延亘三百餘里.”)’라고 한다.
[고구려사 명장면 121] 무너지는 고구려 (2) 압록 이북 방어망이 뚫리다. - 매경
③ 고간이 거느린 당군이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패퇴하였고 고구려군이 승세를 타 북쪽으로 쫓아왔는데,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군을 대파하여 5만[5천] 명이 전사하였다.
...
⑤ 설인귀가 (금산 전투의) 승세를 타고 2천명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이겨 만여 명을 전사시키고 부여성을 함락시켰으며, 이에 부여천(扶餘川)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중략)
고구려군 반격에도 신성을 지켜낸 당군은 신성 주변 지역을 공략함으로써 신성 장악을 보다 안정시키려는 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기사 ③, ④, ⑤에서 전하는 전투이다. 먼저 ③ 기사를 보면 당군과 고구려군이 금산(金山)에서 대접전을 치렀다. 금산의 위치는 알기 어렵지만, 금산 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군이 북진하다가 설인귀의 역습으로 대패하였다는 내용에서 보건대, 금산은 신성보다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신성과 오골성을 잇는 교통로상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기사 ②, ③을 종합하면 오골성의 고구려군이 신성을 되찾기 위해 신성을 공격하다가 설인귀의 반격으로 패퇴하였고, 뒤쫓던 고간의 군대를 금산에서 격전을 벌여 격퇴시키고 다시 신성 쪽으로 진격하다가 설인귀의 역습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간과 설인귀 등 당군은 신성 남쪽 방어선이 안정되었다고 보고, 신성 북쪽의 부여성을 공략하여 이를 함락시키는 상황이 기사 ⑤의 전투이다. 여기의 부여성은 길림시 일대가 아니라 지금의 요녕성 서풍(西豊)이나 요원(遼源) 일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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