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617  (중부)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915  (남도)

험한 지세 이용 교통요로에 자리잡은 고구려 전략 요충지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49>
중부일보 승인 2011.01.24  남도일보 승인 2012.12.19 16:51

서부 변강의 요충지 신성 ②

험한 지세 이용 요충지에 자리잡은 고구려 대형 산성
고이산 동·서 주봉 사이에 구축…주성·외성 등으로 구성
방어구조 탁월…동문 밖 고구려 후기 벽화무덤군 발굴
성 안에선 생활·생산용구·무기·건축자재·동전 등 나오기도

신성 북벽 터


방어 구조가 뛰어난 산성

신성이 있는 고이산 남쪽에는 혼하가 약 2km 사이를 둔 채 하곡지대인 충적평원에 자리한 남북이 좁고 동서가 긴 무순시내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다. 신성의 동·서·북 3면엔 모두 산봉우리가 뻗쳐 있는데, 북쪽에서 흘러온 무서하(撫西河)가 산성의 동쪽을 거쳐 혼하에 유입된다. 현재 심양에서 길림(吉林)과 통화(通化)로 가는 철도와 국도가 벼랑 같은 신성 남쪽 등성이 아래를 지나간다. 신성은 높은 곳에 있는지라 혼하 연안을 굽어볼 수 있고, 성 아래 나있는 교통요로도 통제할 수 있는데다 지세가 험하고 위치도 알맞아 고구려의 중요한 군사요충지가 되었다.

신성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고고학 조사와 발굴을 거쳐 자료가 완벽하기로 몇 안 되는 고구려 대형 산성 중 하나이다. 1940년과 1944년에 ‘만일(滿日)문화협회’(일제강점기 세운 단체)의 이름으로, 무순 고이산산성의 건물터와 성문터 등을 비롯하여 주변 사적지들을 대규모로 조사한 바 있다. 일본중앙공론미술출판사에서는 뒤늦게 1983년에 이 조사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북관산성》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요령성과 무순시의 문화재 직원들은 1950년대부터 고이산산성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과 발굴조사를 거쳐 대량의 고고학자료를 수집했다. 신성은 요동 고구려 옛 성 중 고고학 발굴과 조사가 가장 잘 되어 학술계의 논쟁이 가장 적다.

고이산의 동·서 두 주봉 사이에 자리한 신성은 대체적으로 주성(主城)과 외성(부성<附城>이라고도 부른다)으로 구성되었다. 신성의 서북쪽에 있는 최고봉은 해발 230m 되는 장군봉(將軍峰)이다. 1905년 러·일 전쟁 때 여기서 전사(戰死)한 러시아의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전하는 이 산봉우리와 이어진 작은 산등성이가 남동쪽으로 뻗어 나와 성 안에 깊숙하고 넓은 동·서 2개 골짜기를 형성하였다. 신성의 주성은 그 동쪽 골짜기를 둘러쌓았고, 외성은 서쪽 골짜기와 그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차지하고 있다.

고이산산성이라고도 부르는 신성의 문화재 비석

주성은 성 안의 남북으로 된 골짜기를 따라 나있는 신작로가 세로로 지르고 있다. 이 신작로가 지나는 골짜기의 남북 두 입구가 산성의 남문과 북문 터다. 이 신작로는 주성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동쪽 부분은 동성(東城)이고 서쪽 부분은 서성(西城)이다. 동성과 서성으로 이루어진 주성은 동·서·북 3면의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따라 둘러쌓았는데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불규칙적인 다각형으로 된 주성은 동서 길이가 약 1.2km이고 남북으로는 0.9km이며 둘레의 길이는 4km 남짓하다. 주성에는 남문, 북문, 동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남문은 산성의 정문으로서 그 몇 백m 앞에는 심양에서 길림과 통화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 가로 나있다. 남문터 길 서쪽에는 ‘요령성중점문화재보호단위 고이산산성’이라 새긴 낡은 돌비석이 칼로 깎은 듯한 한 토막의 토축 성벽 단면 옆에 세워져 있다. 옹성구조로 되어 있는 북문은 예부터 북쪽으로 철령의 청룡산산성과 최진보산성 및 옛 부여성인 성자산산성을 잇는 교통요로를 지키고 있다. 북문 양측으로 약 5m 높이의 성벽 터가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문터에도 남문터의 비석과 똑같은 내용으로 조각한 비석이 한편에 서 있다. 역시 옹성구조로 되어 있는 동문터 밖으로 북쪽에서 흘러오는 무서하(撫西河)와 그 양안의 건물들이 내려다보인다. 동문터 남쪽으로는 5m 높이의 성벽 단면이 풀숲에 가려져 있다. 현지인들에 의하면 1950년대만 해도 이곳에서는 대형 가공석으로 된 성문 주춧돌과 돌계단을 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주성 남문 터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서벽 토막

장군봉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산등성이가 남쪽으로 뻗어가다가 점차 동쪽으로 굽어져 주성 남문 앞 200m 지점에 가로놓인 산머리와 만나 커다란 옹성을 이루고 있다. 이 부분이 신성의 외성이다. 면적은 주성과 거의 맞먹는다. 외성은 또 서북구역과 동남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말할만한 것은 동남구역이다. 이 구역은 주성 남문 앞의 산머리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서쪽으로 약 500m 가서 산등성이를 타고 동북방향으로 내려와 신성의 서쪽 골짜기를 넘어 주성의 서벽과 이어지는 성벽이 비스듬하게 동서로 대칭되는 집게 모양으로, 주성의 남문을 둘러친 옹성을 이루고 있다. 고이산 요탑이 바로 이 옹성 남쪽의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산성 남문터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보면 우거진 숲 사이로 이 탑의 꼭대기가 보인다. 이 외성은 주성을 축조한 후에 당나라군이 쳐들어 올 때 보수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성을 축조한 것은 산성으로 올라오고 있는 적들을 1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주성 서쪽과 남쪽에 커다란 고리모양으로 된 이 외성 성벽은 주성 양쪽으로 겹성을 이루고 있어 신성의 방어력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고구려의 다른 산성보다 유별난 것은 신성의 주성 밖에 설치해 놓은 2개 부속 건축물이다. 하나는 주성 북벽 중간에 성 밖으로 쌓아놓은 사람의 혀 모양으로 내민 작은 성이다. 길이 140m, 너비 50m 되는 이곳에도 옛날에 성벽이 둘러쳐져 주성과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벽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소나무만 가득 자라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서쪽과 북쪽을 바라보면 산성 서북쪽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의 전경, 성 북쪽의 평지와 마을, 먼 산들이 역력하다.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동그란 작은 석벽이 ‘8’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주성 동남쪽 모서리 산등성 위에 쌓아놓은 이 작은 성은 이미 허물어져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부속 건축물은 모두 고구려군이 성 바깥을 살펴보는 보루(堡壘)로서 산성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신성 안의 옛 저수지 자리

신성의 성벽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산등성이 위에 두텁고도 높게 흙을 쌓고 간혹 돌멩이를 섞어 쌓은 것이다. 이는 동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구간에 잘 보존되어 있는데, 남아있는 높이가 8m나 된다. 둘째는 산등성이 안에 큰 돌로 단층 석벽을 쌓은 다음 석벽과 산등성이 사이에 흙을 넣어 다진 것이다. 주성의 동서 성벽 사이에 쌓은 남벽이 바로 그러하다. 세 번째는 평지에 먼저 돌로 약 30~50cm 높이로 성벽의 기초를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다져 놓은 것이다. 동쪽 성벽 문터의 두 단락이 그러한데,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5m다.

산성 안에서는 일찍이 많은 건물터가 발견됐다고 한다. 이러한 건물터는 주성의 서쪽 성벽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산성 동문 밖에서는 고구려 후기의 벽화무덤군이 발굴되기도 했다. 성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로는 대량의 생활과 생산용구, 무기 및 건축자재들과 동전 등이다. 그중 동문 안에서는 철촉, 철갑 조각, 철투구, 칼, 창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의 붉은 줄무늬기와조각, 연화무늬 막새기와와 회색 토기 파편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요, 금 및 청나라 시기의 유물들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서쪽 성벽터 부근에는 고구려 시기의 오랜 돌절구가 나뒹굴고 있으며, 현재 살림집이 있는 밭에서는 지금도 당시의 기와조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 안의 옛 우물 터

주성 서쪽 성벽에서 남문으로 내려오는 길목 어름에는 고구려 시기의 옛 우물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메워졌고 대신 그 우물터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을 받아내는 비닐관이 작은 도랑과 이어져 있었다. 옛 우물은 남문 바깥 외성 안의 북관마을에도 하나 있었는데 오래 전 우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입구에 큰 중국식 가마를 덮어놓았다. 이곳에서 20여 년을 살았다는 사경당(謝慶堂·90)이라는 노인이 이를 증언했다.

신성평면도

현지 학자들 가운데 신성과 무순 옛 성을 합쳐서 고이산산성이라 불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옛 신성이 전란으로 사라진 후 명나라 홍무 17년(서기 1384년)에 명 태조는 고이산 아래 남쪽으로 0.5km 떨어진 곳(지금 무순 시가지)에 석성을 쌓고 그 이름을 무순성이라 지었다. 오늘의 지명 무순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 당시 무순성의 둘레에 길이 2리(里), 성 밖으로 너비가 2장(丈), 깊이가 1장 되는 해자를 파놓았다. 그 후 세상의 변천에 따라 무순성은 훼손-중수의 과정을 거듭하다가 1950년대에 허물어버렸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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