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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광개토대왕 1부 -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
역사스페셜 2011-06-02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군주, 우리 민족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고구려의 19번째 통치자 광개토 대왕의 이야기

 

담덕은 나이 13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 당시 사람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나라 상황이 안 좋았다.이런 상황 속에서 18세 때 태자가 된 후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태자는 내이멍구로 향했는데. 지안 북서쪽 바린쥐치가 목적지였다. 이 곳은 당시 거란의 본거지였는데 지금도 시내 곳곳엔 거란이라는 이름이 남아있고 훗날 이곳을 중심으로 요나라를 세웠다.


거란은 매우 호전적인 민족이었는데 현재 만주 북서부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거란에게 남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구려는 눈엣 가시였다.


태왕이 즉위하기 전에 소수림왕 시대에는 소수림왕 8년(378) 9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하였다.

391년 영락 원년이 삼국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앞으로의 정복활동에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호로고루성은 오늘날 개성에서 서울로가는 가까운 길목에 위치해 있는데 고구려가 임진강변에 요새를 새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태자시절부터 고구려를 괴롭혀 온 백잔(백제)을 치기 위해서 이다.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4700여점의 토기 중 전문도기를 보면 3~4세기 중국 동진의 것과 모양과 무늬가 같다. - 어깨 부분에 동전무늬를 찍은 것을 따로 전문 도기라고 부르는데 중국것과 백제의 것이 유사하다는 것. 

백제는 서해를 통해 중국, 일본과 교역하는 동아시아의 해상강국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중국계 이주민들도 수용하면서 그들로부터 선진적 기술도 받아들이고 백제 국가를 이루는 데 이용했다. 백제 석촌동 고분군은 근초고왕의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고국원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백제의 근초고왕의 군대에 크게 패배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 백잔의 '잔'은 안좋은 말(악, 살, 멸망)이 다 담겨있다.



임진강 남쪽의 파주 육계토성은 흙을 다져 만든 백제의 성으로 고구려를 막기 위해 축조되었고 건너편에는 강 북쪽 고구려의 호루고루 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육계토성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네귀항아리(고구려 것) - 어느 순간 고구려에 의해 점령되고 고구려 사람들이 그곳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왕은 고구려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태왕 즉위 2년 고구려는 더 이상 백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즉위 10년 난공불락의 백제 관미성도 함락당함 - 이 성을 함락당했다면 백제는 더 이상 한강을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태왕은 즉위 후 백제의 거점을 하나씩 공격하며 마침내 관미성까지 함락한 것이다.




다시 태왕은 북방 점령에 나섰다. 정벌 목표는 거란의 땅 염수/ 시라무렌 강 그 주변은 하얀 물질이 뒤덮여 있는데 이는 소금으로 이러한 땅에선 농작물이 
자랄 수 없었지만, 소금은 충분히 쓸 수 있었다. 고대인에게 소금은 곧 돈인데 군인의 급료로 지급할 정도였다. 

 

396년 광개토 대왕은 이곳을 정벌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유목민족들의 마을(營)을 정복하고 염수 인근의 얕은 구릉과 초원은 목축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어었다. 유목민들에게 가축은 정말 중요한 재산으로 소와 말들을 노획. 전쟁을 하면 할 수록 힘이 점점 커졌다. 광개토대왕은 염수 인근의 거란의 근거지를 장악하고 그들의 자원을 얻어 내실을 다졌다.

 

그 당시 백제에서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었다. 관미성을 되찾으려 한 것인데 고구려 군은 이를 굳게 지켰다. 태왕에겐 근본적 대책이 필요했다. 인천 문학상에 가보면 정상에 돌로 쌓은 성이 있다. 이곳은 미추홀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는데 문학성은 해양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1차 관문지역이기도 하였다. 396년 광개토 대왕이 이곳에 직접 나타났다. 수군을 이용한다는 것은 적이 어디로 접근해오는지 그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인천만이 아니라 한강 하류에서도 고구려 배가 몰려왔다.

 

아차산성은 강 건너편 풍납토성을 지키기 위해 백제가 쌓은 성이다. 수도를 방어하는 최전방역할을 했는데 이 곳에 고구려가 나타났다. 고구려의 기습공격에 백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광개토 대왕의 공격은 세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육군과 수군이 출동한 수륙합동작전이었던 것이다.



관미성 함락으로 서해 항로를 잃은 백제 아신왕은 계속해서 반격해왔다. 수세로 일관하던 담덕은 백제의 공세가 끊이지 않자 결단을 내린다. 고구려 판 인천상륙작전, 담덕은 한강, 미추홀, 남양만 3가지 진로로 수륙양공을 펼쳐 백제의 도성인 ‘한성’을 포위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백제 아신왕(阿莘王)은 결국 담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담덕은 그러나 백제를 점령하지 않았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단 것입니다. 소탐대실이 아니고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하고 
또 상대방 나라들을 포용해 줬단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은 궁극적으로 포용과 자비심을 발휘함으로써 
시간이 해결해준다 언젠가는 고구려 안에 다 포용되고 한 가족이 된다는 그런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었단 것이죠. -이도학 교수


그는 즉위 5년 간 남으로는 아리수의 백제를 치고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였으며 한반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서해 중부 항로를 장악했다. 담덕은 고구려제국을 거느린 새로운 통치자이자 동아시아 최고의 정복자였다.

출처 :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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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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