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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미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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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미성 전투
휴전선이 가로지르는 한반도. 허리의 반이 동강난 슬픈 몸뚱아리의 서쪽 끝에 나지막히 솟아 서해로 흘러가는 임진강과 한강을 강화 앞바다와 한몸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뫼가 있다. 고구려의 상징인 까마귀 삼족오(三足烏)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 오두산(烏頭山)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은 분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통일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경기도내에서도 연천과 포천일대와 강원도의 통일전망대가 1천m 넘는 고지에 있는 반면, 이곳 오두산은 겨우 118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통일전망대 및 서해안 일대를 관측하는 국방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지로 사용되는 것은 바로 지형의 중요함 때문이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오두산은 과거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에서 성곽이 설치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과거 관미성(關彌城)이라고 불리었던 이 지역은 백제의 북쪽 국경에 있던 철옹성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있어서 백제의 관미성은 반드시 격파해야할 대상이었고 이를 실현한 이가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건설한 광개토 대왕이었다.
사실 관미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 2년(392)조에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둘러싸여 있었다.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눠 공격, 20일 만에 함락시켰다.(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而 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관미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그 성을 둘러싸고 있어 천험의 요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관미성을 지금의 강화도의 교동도에 비정하고 있으나 1995년 파주군(현재 파주시)이 발간한 ‘파주군지’에 의하면 관미성이 지금의 오두산성임을 밝혀냈다. 광개토 대왕은 즉위 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지난해 전체 시청률 50%를 넘어섰던 국민드라마 ‘주몽’에서도 나왔듯이 고구려의 기마병이었던 철기군은 한나라 군대의 철기군을 넘어서는 최고의 부대였다. 온통 갑옷으로 무장한 철기군에게 그 어떤 장수나 무기 등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주몽’의 드라마 내용과 달리 철갑으로 무장한 철기군은 주몽시대에 등장했던 부대가 아닌 바로 광개토대왕 집권 전후에 창설된 군대였다. 이들은 말위에서 4m가 넘는 긴창으로 무장해 동아시아 일대 최고의 군대가 됐다. 광개토대왕은 이 강력한 철갑기마병을 동반하고 만주 일대를 누볐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 일대의 공격과 더불어 그가 풀어야만 했던 가장 중요한 과업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한을 갚는 일이었다. 고국원왕은 재위 4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친정(親征)으로 단행된 평양 침공 당시 평양성을 방어하다 활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이는 고구려가 건국한 이래 최대의 치욕이었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을 중심으로 부국강병을 추진해 백제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따라서 한반도 북쪽에서 연(燕)나라와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던 고구려로서는 백제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국원왕의 아들이었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백제 정벌에 나서기는 했으나 관미성 일대를 지켰던 강력한 백제 군사 앞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부왕 고국양왕이 재위 9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18세 어린 나이로 고구려의 국왕을 계승한 담덕(談德)이란 이름의 광개토대왕은 즉위와 함께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강력한 철갑기마병들과 더불어 장거리에서 적을 궤멸시킬 수 있는 고구려 특유의 활을 개량해 대규모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그 정복 사업의 첫 단계는 남진정책으로, 할아버지의 원수 백제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남하정책으로 한반도 전체의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어 고구려의 웅혼함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광개토대왕은 392년(즉위 2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으면서 고구려의 오랜 숙원사업을 달성해 나갔다. 그는 또 9월 북쪽의 거란을 공격해 남녀 포로 500명을 사로 잡았으며, 거란에 의해 억압당하던 고구려 백성 1만명을 위로해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남하정책을 통해 그해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의하면 고구려 군대는 풍덕-장단-김포-인천을 거쳐 임진·한강의 합수 지점인 군사적 요충지 관미성으로 군사력을 총집결했다. 관미성을 지키는 백제의 최정예 국경수비대는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지만 광개토대왕은 군사를 7개 부대로 나눠 해전과 공성 전투를 벌여 20일 만에 함락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백제는 끝내 이곳을 되찾지 못했다. 결국 이곳 오두산성에서 펼쳐졌던 서기 392년의 관미성 전투는 고구려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의미있는 전쟁이었고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 및 장수왕 시대에 신라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대부분의 지배권을 고구려가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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