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901172823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0) 흥겨운 ‘보켄바이 보라’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9.01 17:28 수정 : 2009.09.01 23:09


어깨 겯고 춤추며 제국의 후예와 만찬

독수리 사냥 명문가와 만남

한쪽 날개만 1m… 모두 움찔

강성했던 몽골 기개 느껴져


유능한 독수리 사냥꾼 아다이와 사냥 독수리.


바얀올기에서 이틀째 되는 날 오후 4시쯤 시내에서 약 20㎞ 떨어진 한 카자흐 마을을 찾았다. 나지막한 민둥산으로 에워싸인 전형적인 초원 마을이다. 산기슭 이곳저곳에 게르가 한두 채씩 널려있다. 예로부터 독수리나 매 사냥으로 소문이 자자한 마을이다. 멀리서부터 개가 짖어대니 주인이 밖으로 나와 개를 달래며 다가가는 일행을 향해 손짓을 한다. 개는 꼬리를 낮추고 주인 뒤에 숨는다. 마당에 트럭과 분쇄기가 있고, 말 여남은 필이 풀을 뜯고 있으며 양떼도 어디선가 몰려오고 있다. 꽤 넉넉한 집안 같다. 주인은 다가와서 반갑다면서 환영의 악수를 청한다.


이윽고 나무 등걸에 매놓았던 독수리 한 마리를 풀어서 일행에게 인사시킨다. 외마디 끽끽 소리만 내고 날개를 퍼덕인다. 반갑다는 인사란다. 한쪽 날개 길이만도 1m는 족히 되는 것 같다. 눈은 가죽 가리개로 가려서 보이지 않으나 부리와 발톱은 날카롭다. 매로 꿩을 사냥한다는 것은 어려서부터 봐오던 바지만 맹금류(猛禽類)인 독수리가 사냥새로 쓰인다는 것이 우리에겐 조금 이상야릇하다. 그래서 독수리 앞으로 얼른 다가가기가 꺼려진다. 이 기미를 알아챈 주인 아다이(42)는 손수 독수리를 손등에 올려놓고 날개를 펴는 시범을 보인다. 그제야 너도나도 앞다투어 이 ‘모험적’인 쇼를 한 번 경험하고 싶어진다. 잘 길들여진 녀석이라서 고분고분 따른다. 3㎞ 밖의 물체까지도 식별한다는 독수리는 보통 태어나 1년만 되면 사냥에 나선 후 약 10년 동안 사냥에 쓰이다가 자연 속에 방출된다고 한다. 수명은 30년 정도다. 여우나 늑대, 살쾡이 같은 사냥감은 곧바로 가죽을 벗겨 팔고 고기는 독수리에게 밥으로 준다. 독수리 한 마리가 먹는 1년치 고기 양은 소 한 마리 정도라고 하니 식욕이 대단하다. 1주일 전 산에서 어미 몰래 가져다 키운다는 생후 한 달 된 새끼 독수리가 한창 재롱을 부린다.


조심스럽게 게르의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의 문지방을 밟는 것은 주인의 목을 밟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밟아서는 안 된다. 잘못 밟아서 죽음을 당했다는 어느 여행가의 기사가 떠오르면서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게르 안은 의외로 정갈하고 안온하다. 땅바닥엔 두툼한 주황색 주단이 깔려 있고,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 현대적 세간이 두루 다 갖춰져 있다. 여느 게르와 마찬가지로 벽에는 가족사진을 비롯해 갖가지 그림들이 빼곡히 붙어있다. 그 가운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사냥대회에서 받은 상장들이다. 주인 아다이 말고도 아버지, 할아버지가 받은 상장도 여러 장 걸려 있다. 알고 보니 7대가 내리 독수리 사냥을 거의 전업으로 해 온 사냥 명문가다.


옛날부터 사냥(수렵)은 유목민들, 특히 몽골인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한 기둥으로 기능해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몽골에는 크게 두 가지 사냥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지만 칸이 참가하는 대규모의 ‘아바’라고 하는 사냥이고, 다른 하나는 무리를 지어 행하는 소규모의 ‘앙’이라고 하는 사냥이다.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사냥은 식량과 모피를 제공하는 일종의 생활수단, 즉 경제활동의 하나이다. ‘적수약구릉’(積獸若丘陵), 즉 ‘산더미 같이 쌓아놓은 사냥감’은 그들의 식량수급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며, 모피는 농경민들과의 교역에서 주 수입원이다. 산악지대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냥은 이러한 경제활동과 더불어 일종의 예비 군사훈련이다. 천하를 뒤흔든 몽골제국의 군사 위력은 사냥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위력을 현장에서 목격한 13세기의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는 그의 역저 <세계정복자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몽골군은 사냥을 통해 무기 사용법을 숙지하고 정탐이나 포위 방법을 훈련하며 기마술을 익히고 고난을 견디는 능력도 키운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도 군대를 수렵장으로 내몰아 쉴 틈을 주지 않는데, 그 목적은 사냥보다 군사훈련에 있다. 생생한 현장 기록이다. 칭기즈칸이 친히 이끈 대규모의 사냥에 관한 기록과 시편도 여럿 있다.


가수 코게르쉰과 아들 보켄바이의 공연 장면.


수렵은 또한 세력집단들 간의 결속이나 권위, 복속을 상징하는 정치적 행위로서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 몽골제국 시대에 부족들 간의 맹약에는 공동수렵에 관한 조항이 반드시 들어 있다. 테무진과 족장 옹칸 사이에 맺은 ‘카라툰’ 맹약에는 적을 공격할 때 서로 함께 공격함은 물론 도망치는 짐승을 사냥할 때도 함께 사냥한다는 약속이 있다. 칸은 자신의 권위를 시위하기 위해 종종 많은 족장과 신하들을 거느리는 대규모 사냥을 주도한다. 유목민 후예인 만청 황제들도 이런 전통을 계승해 해마다 열하(熱河, 지금의 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많은 몽골 왕공들을 불러다가 대규모 사냥행사를 벌이곤 했다. 그런 흔적을 필자는 지난 8월 초 현장 답사에서 확인했다. 그밖에 사냥의 오락적 기능도 부인할 수가 없다.


사냥 수단으로는 총이나 화살 같은 무기와 매나 독수리 같은 맹금이 있다. 그 가운데서 매를 통한 꿩 사냥의 여파는 우리나라까지도 미쳤다. 한반도에서 연해주까지의 일원에 서식하는 송골매, 그 가운데서도 흰 송골매는 가장 진귀한 매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에 바치는 매를 전문 사육하고 관리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기관이 가동되고 있었다. 몽골에서 지금은 맹금에 의한 사냥이 흥행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고장이 바로 우리 일행이 머물고 있는 바얀올기 지방이며, 그 주역은 카자흐인들이다.


사실 사냥은 고도의 숙련과 기술을 요하는 일종의 초원 예술이기도 하다. 화살로 날아가는 새나 쏜살 같이 뛰어가는 짐승의 관자놀이를 명중하는 것은 신기에 가깝다. 이런 신궁(神弓)을 ‘메르겐’이라고 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는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아다이의 가문에도 이러한 신궁이 배출되었다고 그는 은근히 내비친다.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왕 칭호인 ‘마립간’(麻立干)이 이 ‘메르겐’의 음사일거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흔히들 유목민이라고 하면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들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다이 일가족은 깍듯이 예의를 갖추면서 그렇게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다. 다들 깨끗한 의상으로 갈아입고 부인과 세 자녀가 차례로 인사를 한다. 어느새 수태차이와 요구르트, 치즈와 크림, 여러 가지 모양새와 색깔을 낸 과자와 빵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모두가 안주인이 손수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과자에 새겨진 문양은 옛날 고려 공녀(貢女)들이 이 땅에 와서 남겨놓은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의 흔적이라고 한다. 주인은 일행에게 사냥과 세간(世間) 얘기를 많이 들려준다. 일행 가운데 몇몇은 빌려준 전통복식 차림으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법석거린다. 흥이 한껏 부풀어 오르자 아다이는 손때 묻은 돔브르를 꺼내 능란한 솜씨로 카자흐 민요를 연거푸 몇 곡 연주한다. 밖에서는 작은 아들이 일행에게 올가미로 말을 낚는 시범을 보여준다. 이렇게 두 시간 남짓한 동안의 즐거움을 뒤로 한 채 아쉬운 작별을 했다. 아다이 가족들은 한 줄로 도열해 일행이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저으며 바래다줬다. 그 정겨운 얼굴들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바얀올기의 게르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은 특별한 잔치로 꾸며졌다. 75달러짜리 양 한 마리가 통째로 식탁에 올랐다. 게르 주인 에퀼칸이 차림새를 주관하는데, 해체된 여덟 개 부위를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 비슷하게 배치한다. 맨 위에는 손님을 향해 머리를 얹어놓았다. 주인은 머리 고기 한 점을 먼저 맛 보고 나서 손님들에게 권한다. 잘 삶은 데다 향료도 적당해 맛이 일품이다. 그렇게 귀한 야채도 어디서 푸짐하게 구해 왔다.


고기 점에 손이 닿았을 때 필자는 육식에 관한 몽골인들의 딜레마 한 가지가 불현듯 상기되어 멈칫거렸다. 알다시피 그들에게 육식은 주식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육식에 따르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다. 하나는 주식의 내원인 가축을 도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가축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육식과 가축 소멸(축소) 간의 딜레마다. 다른 하나는 라마교가 금지하고 있는 가축 도살과 육식 간의 딜레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해법이다. 첫 딜레마의 해법은 가축의 계획적인 도살이다. 늙거나 허약한 가축을 선별적으로 도살함으로써 최소한의 가축 수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몽골 사람들은 어린 소나 양을 잡아먹는 유럽인들은 잔혹하다고 비난한다.


다음으로, 종교적 불살생과의 딜레마는 라마교 특유의 이른바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자위적(自慰的) 해결책을 찾는다. 이를테면 인간을 위한 도살은 무죄이며, 따라서 허용된다는 식의 해석이다. 설혹 죄책을 느낀다면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참회하며 행동으로 공양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주지 않도록 겸허하게 도살하라고 설교한다. 도대체 고통 없는 도살이 있을 법한가. 도살할 때 짐승의 머리를 위로 향하게 하는 것은 마지막으로 푸른 하늘을 보고 죽으라는 자비의 베풂이라고 한다. 스님들은 감사와 참회, 공양의 의미로 매달 음력 3, 8, 15, 30일은 재계일로 정하고 육식을 끊는다. 인간이 자기중심적 독선 위주이고 보면 견강부회(牽强附會)도 일종의 불문율(不文律)로 둔갑하는 경우라 하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 지역의 유명한 부자 가수를 초청했다. 50세 중반의 아버지 코게르쉰은 몽골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돔브르 가수이며, 12세의 아들 보켄바이도 전도유망한 소년 가수라고 한다. 아들의 이름은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게르의 앞산 이름 ‘보켄바이’에서 따온 것이다. 부자 가수는 몽골과 카자흐 민요 여섯 곡과 재창 요청에 의해 몇 곡 더 불렀다. 부자가 제 나름의 독창을 하다가도 합창으로 넘어가는데, 그렇게 화음이 잘 될 수가 없다. 어머니가 초원을 노래하는 정겨운 리듬이 있는가 하면,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가 연상되는 격조도 있다.


아다이 가족과 일행의 기념사진.


그들의 노래를 듣고만 있을 수가 없다. 일행의 대다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님들과 학생들이라서 자연히 예술적 공감대가 형성된다. 전통예술원 음악과의 김보라 학생이 우리네 ‘아리랑’과 ‘이별가’로 화답한다. 장내는 온통 환호와 박수로 들끓는다. 코게르쉰은 “이때까지 수많은 출연을 했는데 대개는 건성건성 들어 넘기지만 이처럼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호응해주는 손님들은 처음 봤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게르를 떠났다. 우리의 잔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고하는 기사 다섯 분과 현지 안내원, 그리고 게르 주인 내외분을 위한 위로연이 자정까지 이어졌다. 서로가 대작(對酌)을 하며 거나한 김에 어깨 겯고 춤을 추어대는 모양새가 너나를 가를 수가 없으니, 누가 동군(同群), 동종(同種)의 후예들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오늘 밤의 흥겨운 만남과 잔치를 두고 얘기를 나누던 끝에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조형예술과 윤동구 교수님의 예지가 발동됐다. 오늘의 만남과 어울림, 화답에서 이름을 따 이번 몽골 답사단을 ‘보켄바이-보라’라고 부르자는 제언이다. 얼마나 멋진 구상인가. 다들 우렁찬 박수로 뜻을 같이했다. ‘보켄바이-보라’, 한·몽 두 나라의 해후(邂逅)와 영원한 우정을 상징하는 표어치고 이보다 더 적절하고 신선하며 정감 넘치는 표어가 또 어디 있으랴.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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