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8041745541&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6) 흐미의 고향 홉드에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8.04 17:45 수정 : 2009.08.19 11:40
유목 애환 풀어내듯 애절한 ‘초원의 선율’
현악기 톱쇼르(좌)와 에킬(우).
몽골 음악하면 그 독특한 발성법으로 널리 알려진 성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흐미(후미)다. 홉드시에서 동쪽으로 150㎞쯤 가면 해발 3797m의 잘간트하일한산 기슭에 전형적인 초원의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난다. 흐미로 유명한 찬드마니 마을이다. 이 마을은 역대의 유명한 흐미 가수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대대로 가수 전통을 이어온 가족이 있는가 하면 온 가족이 흐미 가수인 경우도 있다. 물론 산과 초원, 물과 바람이란 자연환경이 천부적인 재능을 부여하겠지만, 여기에 더해 마을 사람들은 전통에 대한 크나큰 자부심을 간직하고 내공을 쌓아감으로써 비로소 그토록 어렵다는 성악의 높은 경지를 계승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좁게는 이 마을을, 넓게는 이 성악을 흥행시킨 홉드 일원을 흐미의 고향이라고 한다.
흔히들 스위스의 알프스 지방에 사는 주민들이 부르는 요들을 독특한 창법의 노래라고 알고 있으며, 요들단의 세계 일주 공연은 일찍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낮은 가슴소리와 높은 가성(팔세토)이 자주 또는 빨리 교체되는 모음창법(母音唱法)이 특징인 이 노래가 보통 창법이 아닌 어렵고 독특한 창법이라는 것은 음악계의 공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흐미는 요들보다도 더 어렵고 미묘한 창법이라는 것도 공인된 사실이다. 흐미는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목청과 혀로만 뱃속의 깊은 소리를 끌어내는 창법이다. 창법에는 듣기만 해도 의아스러운 콧소리, 입과 콧소리, 성대소리, 가슴소리, 몸통소리 등 다섯 가지가 있다.
몽골 악기 중 가장 널리 쓰이는 현악기 마두금.
처음 들었을 때는 콧소리가 많아서 콧노래구나 하고 착각했는데, 자주 들어보니 골격음악의 앞뒤에서 그 음을 꾸며주는 장식음인 시기새가 매우 다양해 요들보다 훨씬 감미로운 음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음성학회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 음악계에서는 일찍부터 이 독특한 창법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모창마저도 하기 어렵다고 한다. 동행하는 현지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흐미랍시고 하는 사람은 1000명 중 한명 꼴이지만, 제대로 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홉드 지방의 흐미가 가장 전통적인 것이지만, 지방마다 창법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산 정상의 흐미’ ‘알타이 찬가’ ‘항가이 찬가’ 등이 있다. 그 독특한 발성과 창법으로 하여 흐미야말로 음악에 대한 몽골의 세계사적 기여라고 평가해 마땅할 것이다.
예로부터 몽골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다. 유목민인 그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유목하면서 살기 때문에 모여 살거나 정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부단히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음악을 언어처럼 서로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또한 그들의 생활은 간단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정착민들과는 달리, 일단 목축을 풀밭에 풀어놓고 나면 여유작작한 여가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여가를 때우는 데는 음악이 그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기게 될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기대와 신앙을 갖게 된다.
헨게륵(북).
그들은 음악의 선율이야말로 모든 사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라고 인식해 왔다. 유목민들은 새끼를 잃은 어미를 달래 다른 새끼에게 젖을 주게 하려 할 때나, 새끼를 멀리하는 어미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받아들이게 하려 할 때 언제나 악기를 타고 그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사람의 입, 즉 말로 달래지 못한 것을 음악이라는 또 다른 입, 즉 가락으로 가축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바가 헬’ 즉 ‘작은 입’이라 하고, 음악의 입(가락)을 ‘이흐 헬(에헬)’ 즉 ‘큰 입’이라고 한다. 정말로 유머적인 유목민다운 삶의 비유다.
몽골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다양하고 폭이 넓다. 자연계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음악에 포함시키고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경전을 낭독하는 콧소리, 축복해주는 외침소리, 명상 중의 중얼거림, 동물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소리 등도 죄다 음악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새 소리나 말 발굽소리, 물소리 같은 자연계의 소리를 즐겨 흉내낸다. 여기에는 이러한 자연의 모방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에 동화함으로써 자연의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신조(神鳥) 신수(神水)의 심오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있다. 자연현상을 모방한 음악은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며 새는 하늘 높이 날고 물은 지하세계로 통하는 길을 터주기 때문에 새나 물의 소리를 모방한 음악은 곧 인간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산조 가야고와 비슷한 야탁.
몽골의 음악은 성악곡이 주류를 이루며 순수 기악곡은 드물다. 우리나라의 정선아리랑처럼 자유리듬으로 음악적 변화를 즉흥적으로 주기 때문에 선율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가락은 여러 가지 장식음으로 꾸며진다. 몽골 음악은 기본적으로 무반음 5음 음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 점은 우리나라 음악과 비슷하다. 지역에 따라 유반음 6음 음계나 유반음 5음 음계 또는 7음 음계도 사용하고 있다. 노래는 속요풍(俗謠風)의 노래, 오락의 노래, 의식의 노래 등으로 나뉜다. 속요풍의 노래로는 ‘목양(牧羊)의 노래’ 등이 있고, 오락의 노래로는 나담제에서 부르는 ‘씨름 응원가’가 있으며, ‘성 칭기즈칸 노래’ 같은 것은 의례 때 부르는 의식의 노래에 속한다.
가요에는 우리나라 판소리와 비슷한 것이 있어 주목을 끈다. 그것이 바로 올린도라고 하는 서사적인 긴 노래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의 영웅 이야기 전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만행이 넘는 긴 가사가 있는데, 노래와 노래 사이에는 우리나라 판소리처럼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유리듬으로 사설을 엮는 그러한 아니리 대화체를 삽입하기도 한다. 선율과 리듬은 이야기 속에서 전개되는 싸움이나 슬픔, 기쁨, 말 타기 같은 장면을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엮어가면서 연주를 이끌어간다. 악기 반주는 가수에 따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 두 사람이 엮어가지만, 올린도는 가수가 노래와 말, 악기 반주를 혼자 담당하는 비교적 단출한 편성이다.
현악기 돔브르(좌)와 슈드투르(우).
몽골의 악기는 크게 전통악기와 외래악기의 두 종류로 나뉜다. 고유의 전통악기로 호가(胡茄, 피리의 일종)나 호각(胡角, 뿔피리의 일종)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서 없으며, 남아 있는 전통악기로는 찰현 악기인 모린쿠르와 발현 악기인 야탁(한국 산조 가야고와 비슷)과 샨드즈(3현), 타현 악기인 요오천(한국의 양금과 같음) 등이 있다. 마두금(馬頭琴, 모린 호르)을 비롯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악기의 대부분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기는 하나 실정에 맞게 개조한 것들이다. 마두금은 아랍의 라바브를 본떠서 만든 것이고, 호궁(胡弓)은 거란의 해금(奚琴)을 개조한 것이다. 원대에는 멀리 아랍이나 이란·티베트에서, 명대와 청대에는 중국에서 여러 가지 악기가 유입되어 기악합주까지 가능했다. 합주악기로는 12현의 쟁(箏)과 중국의 3현, 운라(雲라), 동각(銅角), 피리, 북, 퉁소, 양금 등이 있다.
외국 악기를 받아들여서 주체적 정서에 맞게 창의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오랫동안 널리 애용되고 있는 악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거의 전통화된 마두금이다. 마두금은 사람뿐만 아니라 산과 물, 식물과 동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을 일깨우고 번성케 하며 기쁘게 하고 죽음까지도 멀리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마두금 소리가 나지 않는 곳에서는 다툼이 자주 일어나고 어른들은 성미가 급해 모든 것에 신경질적이며 아이들은 겁이 많아 울어대기가 일쑤라고 한다. 가정에서 가축이 죽거나 무슨 자연재해를 입게 되면 ‘천공의 문 닫기’란 곡조를 연주하거나 벽사진경(피邪進慶)의 의례를 거행하기도 한다. 마두금을 연주하는 가정에는 좋은 수말과 수낙타의 축복이 내려진다고도 믿는다. 이런 유의 악기로는 마두금말고도 지공(指空, 구멍)이 세 개 달린 종적(縱笛, 세로 부는 피리)이 있는데, 매해 정월 초하루에서 초사흘까지 사흘 동안 불면 그해의 액운을 몰아낸다고 한다.
마두금과 피리를 연주하는 악사. (샤리브 작 <몽골의 하루> 중, 1911년, 몽골국립자니바자르기념미술관 소장).
마두금은 관련 전설이나 민담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악기임을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마두금을 만든 사람은 차하르 초원의 어린 목동 쑤허다. 어느 날 귀가하는 길에 버려진 망아지를 발견하자 안고 돌아온다. 정성껏 키운 덕에 망아지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흰 준마로 자란다. 어느 해 봄 친왕이 개최한 경마대회에서 단연 우승한다. 우승자 쑤허가 가난뱅이 목민인 줄 알고 난 친왕은 당초 우승자에게 딸을 주어 부마로 삼겠다던 언약을 팽개치고 쑤허더러 돈 몇 푼에 백마를 팔라고 강요한다. 거절하자 쑤허는 뭇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백마는 여러 개의 화살이 꽂힌 채 피땀을 흘리며 쑤허를 찾아온다. 그러나 심한 상처로 다음 날 아침 숨을 거두고 만다. 알고 보니, 사악한 친왕은 빼앗은 백마를 타고 거들먹거리려다 백마에게 내동댕이당하고 만다. 백마는 화살을 맞으며 도망쳐 쑤허를 찾아온 것이다. 애마를 잃고 비통한 나날을 보내던 쑤허가 어느 날 밤 꿈결에 살아있는 백마를 만난다. 백마는 함께 있으려면 자신의 힘줄과 뼈로 거문고를 만들라고 당부하고는 사라진다. 꿈에서 깨어난 쑤허는 백마의 분부대로 힘줄과 뼈, 꼬리로 거문고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초원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두금이다.
마두금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더 소개하면, 옛날 몽골 동쪽에 남질이라는 의적(義賊)이 있었는데 서쪽 변방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그곳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하는 남질에게 공주는 ‘조논 하르’(검은 준마)라는 겨드랑이에 신비의 날개가 달린 명마를 선물한다. 남질은 명마를 타고 밤이면 공주를 만나러 다닌다. 이를 시기한 한 모략꾼 여인이 야음을 타 명마의 날개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다. 그러자 말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슬픔에 잠긴 남질은 명마의 머리를 본떠 나무로 오늘 우리가 보는 모양의 마두금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돔브르를 연주하는 매 사냥꾼 아다이씨.
이러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섭리를 간직하고 있는 마두금은 그 전설에서 이미 모양새를 예시하고 있다. 마두금은 현악기로서 나무로 만든 사다리꼴 몸통 양면에는 나무판이나 염소 가죽을 덧붙인다. 몸통 윗부분에 긴 자루가 꽂혀 있고 그 자루 끝에 말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런 구조 때문에 마두금이라고 부른다. 말머리 바로 아래에는 쐐기 두 개가 양쪽으로 튀어 나왔다. 줄이나 활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며 은은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초원의 첼로’라고도 한다. 흘러나오는 소리는 한을 풀어내듯 깊고 애절하다. 마두금에 맞춰 부르는 몽골 민요는 우리나라 정선아리랑처럼 무장단 리듬이 대부분이다. 어미를 잃은 말이 주인이 연주하는 마두금 소리를 들으면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이 든다고 한다. 그만큼 마두금은 서정적이고 호소력이 뛰어난 악기다.
그밖에 바람이나 강물 소리, 뻐꾸기나 아이들의 울음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내는 초르나 서사시 연창에 단골로 등장하는 톱쇼르 같은 가슴을 울리는 악기도 있다. 실로 유목민들은 ‘큰 입’(이흐 헬, 즉 음악)으로 세계를 향해 크게 말하는 통 크고 낭만적이며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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