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811172456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7) 바위그림의 보고 알타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8.11 17:24 수정 : 2009.08.11 17:26


원시조형 50만장…수천년 풍상 견뎠구나


퀴공호라의 암각화를 탐사하는 일행.


홉드에서 만청시대의 산긴 헬렘 성채와 인접한 이슬람 사원을 둘러보고 나니 한나절이 다되었지만, 갈 길이 멀어서 점심식사는 뒤로 미루고 서북쪽으로 210여㎞ 떨어진 바얀올기를 향해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알타이 산맥의 여러 지맥 사이사이에 조성된 협곡을 따라 가는데, 밋밋한 초원길과 울퉁불퉁한 돌밭 길이 자주 엇바뀐다. 산기슭에는 돌무덤이 가끔 눈에 띈다. 지세도 초원과 삼림, 초전(草甸, 풀이 무성한 저습지)이 뒤섞여 있으며 자그마한 호수나 물구덩이들이 점점이 널려 있다. 그런가 하면 날씨도 변덕스럽다. 이따금씩 비바람이 확 지나가면 산봉우리들이 금방 구름 위에 두둥실 떠있다가도, 어느새 햇볕이 나면 저 멀리 산허리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서린다. 순간 장관이 연출된다. 우리는 지금 몽골 알타이 동쪽 기슭을 남에서 북으로 누비고 있다.


오후 3시 반이 돼서야 설산이 한눈에 보이는 하샷디다와 평원에서 양고기와 감자를 짓찧은 소를 넣은 넓적한 만두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여기서 두 시간쯤 달리니 갑자기 푸른 톨보 호수가 나타난다. 호숫가에는 이름 모를 키 낮은 야생화가 솔솔바람에 하느작거리며 새하얀 짐승 해골이 얹혀있는 오보가 길손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호수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다들 동심이 발동돼 물수제비뜨기 시합을 한다. 얇은 돌이 물 위를 연방 담방담방 뛰어가게 팔매치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 운전기사 몽거의 솜씨가 단연 압권이다. 유쾌한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 차는 쏜살같이 달린다. 여기서부터는 지세도 평탄한 데다 포장길이다.


다양한 암채화들 (사진 위부터 점박이 동물, 활 쏘는 사냥꾼과 남녀상, 늑대, 각종 동물).


저녁 7시 반경에 드디어 목적지 바얀올기에 도착했다. 어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울란바토르에 이어 몽골에서 두 번째로 높은 80여m의 수신안테나다. 이곳의 명물이라고 한다. 숙소로 안내된 곳은 하얀 벽체로 빙 둘러싸인 12채의 ‘게르 여관’이다. 지은 지 오래된 허름한 게르다. 해가 떨어지자 기온은 급강하는데 난로는 없고 샤워 시설도 변변찮아 여성분들은 시내의 호텔 두만에 묵기로 했다. 나머지 일행은 새벽녘까지 바깥 벤치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며 알타이 밤을 즐긴다. 자정이 지나자 다들 풀밭에 누워 저 무한창궁(無限蒼穹)에 억조의 은바늘을 뿌려놓은 것 같은 밤하늘의 총총 별을 쳐다본다. 한 곳에 눈길을 못박아놓으면 놓을수록 별은 자꾸 새끼를 친다. 꼴도 변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성싶다. 지구의 몇 안 되는 곳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별의 향연이자 대자연의 신비다. 별이 저토록 촘촘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마 오염 없이 청정한 해발 2500m의 높은 곳이라서 그러할 것이다.


바얀올기는 몽골 서북단 알타이 어귀에 자리한 고원도시다. 원래는 행정구역상으로 홉드와 하나의 아이막(군)이었으나 1940년에 두 개의 아이막으로 나뉘었다. 지금은 산하에 12개 솜(읍)을 거느리고 있는데 인구는 약 9만명이다. 그중 절반 이상이 군 소재지인 바얀올기에 모여살고 있다. 건물들은 홉드강 연안에 흩어져 있으며 사위는 바위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고산준령과 삼림, 푸른 초전과 물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간도시다. 주민의 90%가 돌궐제국의 직계후예라고 자부하는 카자흐족이며 공용어는 카자흐어와 몽골어다.


예부터 여기서 시작해 알타이 깊은 협곡을 뚫고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일원으로 이어지는 길, 이를테면 동서교류의 통로 역할을 해온 알타이 초원로가 있었다. 여기가 바로 기원전 8세기쯤부터 펼쳐진 스키타이 동방무역로의 동단이다. 이 길을 통해 스키타이 문화가 몽골과 중국 서북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기원후 7~8세기에는 이 길의 연변에 사는 카자흐인들에 의해 돌궐문화가 전파됐으며, 13세기 서정에 나선 칭기즈칸의 기마군단도 이 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오늘도 그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온 대형 화물트럭들이 거리에서 짐을 부리고 싣는다. 이곳 사람들은 너나없이 알타이를 자랑한다. 알타이가 있기에 그들의 오늘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알타이 축복이라고 믿는다.


알타이, 자고로 동서양 모두에게 동경과 환상을 심어준 대명사다. 알타이는 산이나 산맥의 이름이기도 하고,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의 내륙 고원지대에 우뚝 솟아 동서로 뻗은 알타이 산맥은 화산 분출로 인해 생긴 습곡융기 지대로서 크게 몽골 알타이와 고비 알타이, 고르노(러시아) 알타이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총 길이는 약 2000㎞에 달하며, 해발 4374m의 후이튼봉(우의봉)을 비롯해 40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여러 개 있다. 지금 일행은 몽골 알타이 최북단에 와 있다. 희끗희끗한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빙하만 해도 1500개나 흘러내리고, 겨울 혹한기의 최저기온은 영하 60도까지 내려간다. 여기는 카자흐인, 몽골인, 야쿠트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킨인 등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 요람이다. 지금은 러시아 알타이 쪽에 인구 20여만명이 있는 자치 성격의 알타이 공화국이 있어 마냥 알타이의 상징적 구실을 하고 있다.


알타이는 몽골어나 돌궐어의 ‘알탄’(altan)에서 유래된 ‘황금’이란 뜻이다. 그만큼 알타이 땅 속에는 황금(주로 사금)을 비롯한 철, 은, 아연, 주석 등 귀중한 광물자원이 많이 묻혀있다. 러시아 금의 90%가 고르노 알타이에서 공급될 정도로 금이 풍부하다. 그리하여 역사의 여명기부터 이곳에서는 황금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근 1000년 동안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를 중심으로 동서에 기다랗게 황금문화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알타이에서 발생한 황금문화는 스키타이가 개척한 동방무역로를 통해 서방으로는 그리스까지 전해졌으며, 알타이족을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들의 동진에 의해 한반도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영향이 미쳤다기보다는 차라리 그 전성기를 문화대의 동단 신라 땅에서 맞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문화의 최고 결정체라고 하는 고대 금관이 10기 중 7기(가야 1기, 신라 6기)가 한반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금관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알타이인들은 다양한 문화, 특히 초원로의 유목문화를 개화 발전시켜 인류문명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겨놓았다. 그래서 알타이 지역은 굴지의 문화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유익한 자양분을 섭취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일찍부터 적잖은 연구가 집적되었고, 또 여기 바얀올기 박물관의 전시품을 통해서도 실증되다시피 알타이와 우리는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인연이란 여러 가지 상관성으로 설명되는데, 이를 입증하는 실례는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언어의 친연성으로부터 시작해 천손강림(天孫降臨)이나 난생(卵生) 신화 같은 시조창조설, 신조(神鳥)와 신수(神樹)사상, 솟대와 ‘나뭇꾼과 선녀’ 같은 민속이나 민담 등등 실로 각이한 분야에서 알타이 문화와 우리 문화 간의 친연성 내지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파내는 데서 원초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사실(史實)들이다.


밤새 별의 향연에 심취돼 잠을 설쳤지만, 알타이에서의 아침은 피곤을 말끔히 씻어준다. 보기 드문 화창한 날씨다. 일행은 ‘게르 여관’ 주인 에킬한의 안내로 15㎞ 떨어진 퀴공호라 지역으로 바위그림 탐방에 나섰다. 에킬한은 30여년간 이 지역 바위그림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요즘은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약 두 시간 동안 세 군데를 탐사했다. 다행히 바위들이 높지 않아 그림들을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다. 탑본은 못하고 카메라에만 잔뜩 담았다. 알려진 대로 몽골의 중서부, 특히 알타이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바위그림의 보고다. 일반적으로 바위그림이라고 하면 바위를 쪼아 새긴 암각화(岩刻畵)와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암채화(岩彩畵) 두 가지가 있다. 몽골의 경우 비중으로 봐서 서쪽 알타이 지역에는 암각화가, 중부와 북부지역에는 암채화가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일행 중 많은 분들은 처음으로 바위그림을 접하다 보니 퍽 신기한 모양이다. 궁금증도 많다. 그래서 그림 바위 앞에 둘러 앉아 바위그림에 관한 개괄강의부터 시작했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길고긴 풍상 속에서도 닳지 않고 살아 숨 쉬는 바위그림, 볼수록 신기하다. 소나 양, 말 같은 가축과 인간의 모습이나 활동상이 비록 원시적이고 소박한 조형이지만, 그토록 오롯이 남아서 당시의 사회상 단면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알타이 지역 전체에 약 50만장의 이러한 바위그림이 있다고 한다.


몽골의 바위그림에 대한 조사는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76년 고비 알타이지역에서 이루어진 러시아 탐험가 포타닌의 암각화 조사를 효시로 주로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걸쳐 중요한 몇 건의 조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에는 지리학자 남난도르지, 고고학자 도르지수렌과 체벤도르지 등 몽골 학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호이트 쳉헤르 동굴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각이한 시대에 조성된 많은 암각화와 암채화가 알려져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선사시대 연구에 결정적 진전을 가져 오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널려있는 바위그림의 연구에도 유용한 실마리들을 제공했다. 최근 연간 ‘한국암각화학회’를 비롯한 관련 연구단체와 학자들이 몽골 바위그림의 현장을 자주 탐방하고 탁본까지 집성한 것은 우리 학계에서 경하할 만한 일이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장 체벤도르지는 지난 100여년 동안의 몽골 바위그림의 연구 흐름을 세 시기로 구분해 개괄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1940년대까지의 첫 시기에는 포타닌을 비롯한 외국 탐험가들이 탐사하면서 발견한 바위그림의 소재를 보고하고 출판하는 등 바위그림 연구의 초창기다. 그후 1948년부터 1990년까지의 두 번째 시기에는 몽골 학자들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 학자들과 공동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탐사하고 연구하는 활동기다. 이 시기의 주요한 연구 성과는 바위그림의 역사시대( ~14세기)를 석기시대와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흉노시대, 돌궐시대, 키르키즈시대, 몽골시대의 여섯 개로 시대구분한 것이다. 마지막 시기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인데, 몽골의 체제 변혁을 계기로 한국을 포함해 교류가 없었던 나라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연구의 지평을 넓히며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기의 주요 연구 업적은 바위그림을 제작방법에 따라 붉은 안료로 그린 그림과 먹으로 그린 그림, 바위 면을 갈아서 새긴 그림,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점이나 선으로 새긴 그림 등 4가지로, 그리고 묘사 대상에 따라 일상생활을 대상으로 한 그림과 동물을 대상으로 한 그림, 물건이나 주거를 대상으로 한 그림, 묘사 대상이 불분명한 그림 등으로 구분하는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바위그림은 역사의 유형적 증언치고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역사의 유물이다. 그것이 저 알타이에 가장 많으니 알타이야말로 바위그림의 보고요, 인류문명의 충실한 전령사다. 바위그림을 적잖게 소장하고 있는 우리 한반도에 알타이 바위그림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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