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707173538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3) 지천에 깔린 오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7.07 17:35 수정 : 2009.07.07 17:35


나그네 걸음 붙잡는 오색돌탑, 그 간절한 소원


일행이 오보에서 탑돌이하는 모습.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목적지인 서부 몽골의 중심 도시 홉드에 도착했다. 홉드는 산과 언덕으로 에워싸인 분지다. 어귀를 지켜선 언덕 위에 올라서니 고즈넉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사진 길을 한참 내려가서야 시내가 나타난다.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외진 곳에 자리한 게르에 여장을 풀었다. 10여채의 게르가 울타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문 여인숙이다. 열 평 남짓한 게르 한 채에 네 명씩 투숙한다. 식당과 화장실로 쓰이는 게르는 저만치 따로 있다. 알타이산의 신비스러운 낙조에 혼을 빼앗기다보니 시간의 흐름에는 전혀 무감각이다. 여기는 대낮이 길어서 아홉시가 훨씬 지나서야 해가 서산 너머로 떨어진다.


홉드 어귀 언덕에 있는 채색오보.


다음날(7월4일, 수요일) 아침 일찍이 일어나 지금은 말라버린 옛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멀리 알타이산 동남지맥의 눈 덮인 연봉을 연방 카메라에 담았다. 사막과 설경, 이곳 알타이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오늘의 첫 일정은 홉드박물관 관람이다. 찾아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때마침 수리 중이라서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이어 1762년에 축조한 산긴 헤렘(만청시대 성채)을 돌아봤다. 만청 정부가 이곳을 분할 통치했을 때 설치했던 관청과 가옥, 사원 자리로서 부지가 4만㎡에 달하는 꽤 넓은 유적지다. 폭 1.5m에 높이 3m로 지은 성벽의 잔해가 약간 남아 있을 뿐, 관리가 허술해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성채 바로 옆에 한 마스지드(이슬람 사원)가 붙어 있다. 민가 속에 돔 하나가 달랑 돌출돼 있어 그것이 마스지드임을 분간할 수 있다. 찾아가니 이맘(이슬람 성직자) 자바이 하나트란 분이 일행을 맞아준다. ‘앗살람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를)이라고 인사하니 제법 ‘알라이쿰 살람’(당신에게도 평화를)이라고 화답한다, 그밖에 ‘알라 아크바르’(알라는 가장 위대하다), ‘함둘릴라’(알라께 찬미를) 등 이슬람의 관용어 몇 마디는 서로가 통한다. 한때 시내에는 수십 호의 무슬림(이슬람 신봉자)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여남은 호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30여평의 건물 안 예배당은 작지만 정면에 미흐랍(예배 방향을 알리는 벽감)과 민바르(설교단)는 제대로 갖춰져 있다. 그러나 예배시간을 알리는 마스지드 특유의 미어잔(첨탑)은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몽골어로 된 몇 장의 홍보물이 부착된 것이 고작이다.


이슬람이 언제 몽골 땅에 들어왔는지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일찍이 몽골제국 초기부터 그 흔적이 보인다. <몽골비사>에는 칭기즈칸이 엉구트부에서 온 한 이슬람 상인 아산을 만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1219년 몽골의 제1차 서정의 도화선이 된 전해의 ‘오트라르 사건’은 몽골이 파견한 3명의 사절과 450명의 무슬림 대상이 피격된 사건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 몽골에는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도 카라코룸엔 무슬림 상인들의 거주 구역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세 차례의 서정과정에 끌고 온 색목인(色目人) 중 대부분은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서역 무슬림들이다. 당시로서는 선진문명을 구가하던 무슬림들이 일단 몽골제국에 와서는 제국의 요소마다에서 ‘문화 교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역할은 원제국 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원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라마교가 유입되고 만청의 반이슬람 정책이 강화되자 이슬람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일부는 카자흐스탄이나 신장 등 인근 지역으로 아예 떠나가 버렸다. 이제 이 홉드에서 보다시피 이슬람의 흔적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쓰던 물품을 던져 액땜을 기원하는 신앙대상오보.


지금의 홉드는 1760년대에 건설된 비교적 오래된 도시다. 지금도 이곳에는 한때 서부 몽골 일원을 석권했던 오이라트족 후예들이 살고 있다. 자고로 알타이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카자흐스탄이나 중국의 신장 지역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주변에 산과 초원도 있어 사냥 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거리에선 사냥총을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다니는 서양인들 몇몇을 발견했다. 그리고 시내에는 박물관과 사범대학 등 현대적인 문화시설도 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한적하고 호젓한 느낌을 주는 도시다. 시내의 서북쪽 언저리를 보얀트강이 흐르고 있다. 강가의 푸른 잔디 위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담소며 회식이며 낭만을 즐기는 모습이 퍽 평화로웠다. 강가에서 말과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다리를 막 건너던 우리네 기사 도고가 갑자기 혼자서 무언가 흥얼거린다. 물어보니 유명한 노래 <맑은 보얀트>라고 한다. 리듬으로 미루어 서정적인 민요다.


시내를 빠져 나오자 언덕이나 굽이마다에 형형색색의 오보가 눈길을 잡는다. 물론 몽골족이 사는 세상 어디를 가나 오보가 지천에 깔려 있지만 이곳 서몽골의 오보는 유난히도 크고 다채롭다. 알타이 산맥이 가까워 오면서 지세가 복잡해지자 그에 걸맞게 내린 샤만의 결단일 것이다. 어제 저녁 홉드에 입성할 때, 어구의 언덕 위에서 만난 그 오보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크기도 크기거니와 거의 다 탑식으로 돌을 쌓아 올렸고, 휘감은 천 조각들도 다채로웠다. 다들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면서 일렬로 서서 탑돌이부터 한다. 우리네 돌탑을 연상케 하는 풍물이라서 그리 낯설지는 않다. 모두에게 북방민족 고유의 원시종교인 샤만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에서 은연중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알타이시 입구에 있는 탑식 경계표오보.


아마 몽골족의 풍물치고 오보만큼 널리 퍼져있으면서 민족적 유대를 과시하는 풍물은 더 없을 것이다. 중국의 내몽골이나 신장, 바이칼 부근의 부리야트, 티베트와 히말리아 산록, 그 어디나 몽골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영락없이 오보가 눈에 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보야말로 그 속에 몽골사람들의 전통적 의식구조와 심성이 오롯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보는 늘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이번 몽골 답사 길에서 주의 깊게 카메라에 담은 피사체가 바로 오보다. 그렇게 다양하고 다채로울 수가 없다.


원래 ‘오보’라는 말은 투르크어 ‘오바’에 연유되었다고 하는 일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마찬가지로 오보가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도 명확한 해답이 없다. 몽골에 관한 지고의 문헌이라고 하는 <몽골비사>에도 오보 위에 장식하는 천인 잘라마는 소개되고 있으나 오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비록 고대의 문헌기록은 없지만, 여러 가지 구전이나 청대 이후의 기록, 그리고 근대 서양인들의 기행문 등을 통해서 그 역사적 실체가 상당히 밝혀졌다. 오보는 16세기 라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샤만신앙에서 유래해 존재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래한 불교가 종래의 샤만 습성을 죄다 부정하면서도 유독 오보나 오보제만은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불승들은 샤만을 대신해 희생 제물도 마다하지 않은 채 오보제의 주재권을 넘겨받아 그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토록 뿌리 깊은 전통적 습성을 무시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에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역사는 맹랑한 방편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자기부정을 합리화하는 수많은 행태들을 묵과해 왔다.


몽골의 오보는 대개 고개나 산꼭대기, 강가뿐만 아니라 기묘한 모양새를 한 언덕이나 바위 등에도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설치된 곳은 사방이 탁 트인 산꼭대기다. 이번 답사에서 매일이다시피 목격한 숱한 오보는 그 위치도 이렇게 여러 가지일 뿐만 아니라, 형태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오보를 장식하는 잘라마도 파란색을 위주로 한 갖가지 색깔의 천조각으로서 오보를 휘감거나 꼭대기에서 내리드리워 그 조형미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이정표 오보.


오보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에 따라 삼림오보와 초원오보로 나눌 수 있으며, 숫자에 따라 형태가 구분되기도 한다. 크게는 독립오보와 13오보, 군락오보로 나눠지는데, 독립오보는 문자 그대로 홀로 서있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행정 단위인 기(旗)나 숨(군)을 대표하는 오보, 씨족오보, 공동체오보 등이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13신을 상징하는 13오보인데, 중심오보를 가운데 놓고 좌우 일렬로 6개씩이나, 아니면 동서남북 십자형으로 4개씩을 배치해 총 13개의 오보를 이룬다. 군락오보는 3이나 9, 108처럼 셀 수 있는 숫자와 셀 수 없는 숫자의 오보를 많이 거느리는 경우를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보를 구성하는 재질에 따라 돌오보(대부분)와 나무오보, 흙오보로 구분한다. 이런 것은 지역 고유의 지질적 특성을 고려한 구분으로서, 심지어 가족단위로 만드는 임시적 눈오보도 있다. 또한 바치는 제수품에 따라 전통적 제수품만이 허용되는 오보와 여기에 더해 가축의 뼈나 털이 놓이는 오보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간혹 헌 옷이나 목발, 유모차 등 낡은 일용품이 놓여있는 오보를 발견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이런 것들은 액땜 같은 개인의 절박한 소원이 담긴 물품으로서 허용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행정구역 별로 세우는 대표적 오보가 있는데, 이런 오보는 한 지역에 하나밖에 없으며 꼭 정기적인 오보제가 행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번잡한 오보를 만들어 기리고 있을까, 그 기능은 과연 무엇일까. 그럴 만한 기능이 없었던들 유지는 물론 발생도 없었을 것이다. 동행하는 몽골 친구들에게 그 기능을 물어봤더니 그때그때의 대답이 다르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별하면, 이정표나 경계표를 주 기능으로 하는 오보와 신앙대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오보 두 가지다. 이정표오보는 대체로 고개나 교차로에, 경계오보는 구릉에 세워지는데, 제사를 지내는 오보와는 달리 사람들이 접근해 술이나 우유를 바치며 탑돌이를 할 수 있다. 술이나 우유를 바칠 때는 하늘과 땅, 사람을 위해 세 잔을 세 번 공중에 뿌린다. 탑돌이는 해가 도는 방향을 따라 세 차례 돈 다음 돌 하나를 집어 오보에 던진다. 신앙대상으로 되고 있는 오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이나 강 등의 정령(精靈)이 산다는 지방신오보와 조상숭배의 유습이 스며있는 씨족오보다. 그밖에 특정 사적을 기리기 위한 공동체오보나 개인의 기원을 목적으로 한 개인오보도 이러한 신앙대상오보에 속한다


신앙대상이 되는 오보에는 반드시 오보제가 치러지고 있는데, 그 목적은 가축의 번식과 기마의 안전, 마을의 안녕, 풍성한 목초 등을 신에게 기원하는 데 있다. 오보제는 대개 1년에 한 번씩 모든 것이 풍성한 음력 5월과 8월 사이에 행해진다. 제의방식은 오보의 단장, 제문의 봉독과 제사, 탑돌이, 연회의 순이다. 특이한 것은 제문의 봉독과 제사는 주재자가 라마의 경우는 불교식으로, 샤만의 경우는 샤만식으로 한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종교간의 평화적 공존 같지만, 사실은 궁여지책에서 나온 일종의 조율이다.


오보제의 연장선상에서 열리는 나담은 몽골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서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몽골어로 ‘사람들이 모여서 즐긴다’라는 뜻의 나담은 일종의 축제로서 지금은 보통 사흘간 거행되는데, 승마. 씨름. 활쏘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활쏘기는 총포가 널리 퍼진 현대에 와서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열광 속에 진행되는 승마는 소년·소녀들의 30㎞ 경주다. 오보와 오보제, 나담은 몽골사람들의 끈질긴 전통의식이자 끈끈한 유대의 상징이다. 그런 전통과 유대가 이어져 왔기에 어제와 오늘의 몽골이 있게 된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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