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617164600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0) 불간에서의 점심

정수일 문명사학자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6.17 16:46 수정 : 2009.08.19 11:38


몽골의 영양·정성 흠뻑 밴 소박한 한 끼


불가 마을 게르에서 초벤으로 점심식사.


몽골 하면 흔히 초원과 사막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해발 532m에서 4653m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산악국으로서 산악 사이 사이에 초원과 사막이 끼여 있다. 그래서 지세는 크게 산지삼림초원지대와 고지초원지대, 황막초원지대, 황막지대 등 비교적 복잡한 네 가지 형태로 나뉜다. 지금 일행이 지나가고 있는 중부지역은 기본상 고지초원지대에 속하지만 산을 낀 곳에는 가끔 삼림도 껴안고 있다. 첸헤르 온천휴양지가 바로 그러하다.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을 조금 벗어나자마자 드넓은 초지와 함께 시베리아 낙엽송이나 소나무, 자작나무, 산버들이 듬성듬성 짙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20분 달리니 강안에 푸르싱싱한 나무가 빼곡한 싱프리고드강이 나타난다. 다들 시원한 강물 속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으로 어제의 여독을 풀었다.


여기서 한 시간 반쯤 초원을 가르는 포장길을 신나게 달리니 아라한가 아이맥이란 군 소재지가 나타난다. 산 중턱엔 게르 아닌 벽돌과 목조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길 양 옆엔 국기를 게양한 행정기관들과 상점들이 늘어서고, 저 멀리 자그마한 공장 굴뚝도 눈에 띈다. 거리는 행인으로 붐빈다. 오지인 이곳에서도 현대를 향한 몽골의 움지럭거림을 느끼게 된다. 비록 보폭이 작아 느릿느릿하지만 분명 몽골은 지금 막 개혁과 개방의 걸음마를 떼고 있다. 점심 채비로 한 식품가게에 들르니 여러 가지 유제품과 함께 ‘도시락’ 상표가 붙은 우리네 라면이 팔리고 있다. 판매원은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인기 상품이라고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갖가지 라면은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 끝 바얀올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제 몽골인들도 선호하는 국제식품이 된 셈이다.


한 시간 반 더 가서 드디어 타미르강을 건넜다. 50m쯤 되는 강폭에 깊이는 2~3m이며 유속은 초당 1~2m라고 하니 물살은 꽤 빠른 편이다. 몽골의 강들은 동부의 초원 하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산지 하류이기 때문에 유속이 빠르며 침식작용이 심하다. 몽골 초원문명의 발흥지 역할을 해 온 오르혼강 좌안 지류인 타미르강은 호이트 타미르강과 오르드 타미르강이 합류한 강으로서 길이는 280㎞밖에 안 되지만 폭 4~5㎞의 넓은 곡지(谷地)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유역 면적은 1만3000여㎢나 된다. 중부 항가이 산지 수계(水系)에 속한 이 강 주변에는 간간이 여울이 생기고 삼림이 우거지며 특유의 둥근 자갈돌이 깔려 있는 등 경관이 빼어나 ‘통갈라크(맑고 투명한) 타미르’라고도 부른다.


차 잎에 우유와 소금을 넣는 수태차이 만들기.


타미르강을 건너 얼마쯤 떨어진 불가 마을에 이르니 정오가 막 지나고 있다. 무작위로 한 민가(게르)에 들러 점심을 부탁했다. 예정 없이 25명이나 되는 과객의 점심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40대 초반의 여주인은 흔쾌히 승낙한다. 점심 준비는 40여분이 걸렸다. 그 사이 마당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둘러 앉아 몽골과 우리나라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은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 초우번이다. 양고기를 넣고 끓인 물에 칼국수와 당근, 감자를 넣고 해바라기씨 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 일종의 비빔국수다. 국물은 없지만 담백해 입맛에 맞는다. 중국 북방음식인 차오몐(炒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식후에는 수태차이를 대접한다. 수태차이는 우유차인데 찻잎이나 차 가루를 끓이다가 우유와 소금을 넣어 한참 젓다가 식혀서 마신다. 고기와 함께 마시기도 한다. 수시로 마시는 음료수이자 식품이다. 수태차이 말고도 우유를 섞지 않는 하르차이가 있다. 몽골인들의 차를 마시는 습관은 일찍이 중국 송나라 때 북방과의 차마무역(茶馬貿易)이 생겨나면서 칭기즈칸 때부터 이미 있다가 16세기 후반 라마교의 유입과 더불어 크게 성행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몽골에서 일반 차는 전차(塼茶), 즉 벽돌차라고 하는데 이것은 운송이나 보관에 편리하도록 찻잎을 수증기로 살짝 익혀 벽돌 모양처럼 다져 만든 데서 유래된 말이다.


호쇼르(튀김만두)와 무늬가 새겨진 과자.


몽골 음식, 정확하게 말하면 주식은 ‘하얀 음식’(차강이데)과 ‘빨간 음식’(올랑이데)의 두 가지로 대별한다. ‘하얀 음식’이란 가축의 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말하며, ‘빨간 음식’은 가축을 도살해 얻는 육류를 지칭한다. 유제품은 보존식품으로서 1년 내내 먹는 음식이지만, 가장 풍성한 계절은 여름이다. 그래서 ‘여름 음식’이라고도 한다. 가을에 통통하게 살진 가축을 도살해 혹한기에 대비하는 육류가 가장 풍성한 계절은 겨울이다. 그래서 ‘겨울 음식’이라고도 한다. 몽골에는 젖을 기본 원료로 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든 유제품만도 20여종에 달한다. 유제품은 겨우내 육식으로 인해 생긴 체내의 노폐물을 정화한다고 한다. 겨울철에 도살한 가축의 경우 양은 덩어리째 말려 보존하고, 소는 대부분 육포처럼 찢어 말린다. 말린 고기를 보르츠라고 하는데, 보르츠를 갈아 만든 가루는 영양가 높은 휴대용 식량이다. 몽골 서정군이 그토록 기력이 왕성했던 것은 이 보르츠 가루 군량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몽골인들의 식탁은 여름을 정점으로 하는 ‘하얀 음식’과 겨울을 정점으로 하는 ‘빨간 음식’이라는 또렷한 계절성을 지닌 두 가지 주식에 의해 차려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음식은 이러한 계절적 특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하얀 음식’은 그 색깔 때문에 청렴과 진심을, 이에 비해 ‘빨간 음식’은 풍성함을 상징한다.


이 두 가지 주식 말고도 몽골 음식에는 분명 곡물류가 있다. 우리가 먹은 초우번을 비롯해 럄샤(국물이 있는 초우번) 같은 음식은 밀가루 음식, 즉 곡물 음식이다. 다만 우리와는 반대로 유제품이나 육식은 주식이고 곡물은 부식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몽골의 농업이나 곡물은 거의 다 논외로 취급되고 있다. 작금 유목사회 곳곳에서 유목지의 경지화가 외압적으로 강행되면서 생태적 환경은 물론 사회 전체가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재유목화의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몽골을 비롯한 유목사회가 직면한 농경문제와 곡물의 생산 및 소비 등에 관해 정확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몽골의 유명한 화가 샤라브가 1910년에 그린 ‘몽골의 하루’라는 그림에 보면, 농부가 호미로 김을 매고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 농경의 생생한 모습이다. 몽골초원에서 살아온 유목민들은 흉노제국 때부터 오르혼강이나 셀렝게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어 왔다. 몽골제국 때에는 워낙 바깥으로부터 거둬드리는 것이 많아서 농업은 무시되었다. 그러다가 원제국 시대에는 전반적인 농업 진흥정책이 추진된다. 전국에 건설한 대규모 관개시설만도 260개소에 달하며, 새로운 농경기술과 재배법이 많이 도입된다. 이러한 사실은 농업통론이라고 일컫는 왕정(王禎)의 <농서(農書)>(1313)를 비롯한 여러 농학서에 집성되어 있다. 이러한 여파는 몽골초원에도 파급되어 일부 지역에서 농업이 다시 움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만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농업이 활성화되어 알타이 산맥, 항가이 산맥, 헨티 산맥 등에서 발원하는 강들을 관개용수로 사용해 야채나 당근, 보리, 밀, 기장 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강이 없는 고비지대에서는 샘이나 계곡물로 농사를 지어오고 있다.


몽골 땅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네 막걸리에 맞먹는 음료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유주(馬乳酒, 아이락)다. 약간 시쿰텁텁하고 뽀얀 이 술은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몽골의 대표적 술로서 알코올 도수는 6~7도밖에 안 된다. 몽골인들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아이락은 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음료다. 일찍이 프랑스 루이 9세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몽케칸을 진현한 루브룩은 ‘여름이 되면 쿠미스, 즉 마유주가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하면서, 대군주(칸)들의 음료로는 ‘흑마유주’가 있다고 견문록에 적고 있다. 남송 때 우구데이칸에 파견된 사신 팽대아(彭大雅)와 서정(徐霆)이 쓴 책 <흑달사략(黑달事略)>(1237)에도 보통 마유주와는 다른 ‘흑마유주’가 있다고 전한다. 지금은 흑마유주가 사라졌거니와, 그 실체도 밝혀진 바 없다. 루브룩이 말한 ‘쿠미스’는 투르크계 언어에서 마유주에 대한 총칭이며, 몽골제국 시대에는 몽골어로 ‘에스구’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타미르강 계곡의 돌길.


‘아이락’이란 명칭은 훌레그 서정군이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을 공략할 때 그곳 증류주인 ‘아락’을 맛보면서 그것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짐작된다. 원대 홀사혜(忽思慧)가 펴낸 궁중 식보(食譜)인 <음선정요(飮膳正要)>(1330)에 의하면 당시 몽골에서는 발효한 젖술(마유주)을 증류시켜 무색투명하고 알코올 농도가 높은 술을 빚는데, 아랍어의 증류란 의미의 ‘아라끼’를 따다가 ‘아랄길’(阿剌吉, 아라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 그때는 증류주였으나, 어느 날부턴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지금까지도 발효주인 마유주를 ‘아이락’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는 이런 유의 와전이나 변이가 수두룩하다, 어쩌면 그 누적이 역사로 둔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유주 말고도 요구르트를 끓여서 증발시킨 후 액화시킨 아르히라는 술도 있다, 알코올 농도는 약하지만 은근히 취하게 하는 마법의 술이다.


몽골음식문화에는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그중에는 금기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아침에는 주로 양고기를 넣어 끓인 칼국수를 먹으며, 손님 접대 음식으로는 고기만두(보즈) 등 만두류가 많이 등장한다. 양을 통째로 잡아 상에 올리는 것은 최고의 접대요리(슈우스)인데, 그 상차림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 도살한 양을 여덟 개 부위로 해체해서 삶은 뒤 살아 있을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그릇에 담아 놓는다. 목살과 척추의 윗부분, 가슴살은 맨 처음 놓고 그 위에 등판을, 또 그 위에 머리를 얹는다. 등판 양 옆에는 앞발과 뒷다리가 배치되고, 목살과 머리는 손님 쪽을 향한다. 그리고 유목지에서 우유를 파는 것은 죄행이다. 개고기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보면 즐긴다고 했으나, 지금은 폐결핵 환자만 먹는다고 한다. 물고기도 원래는 먹었으나 라마교가 들어온 후부터는 멀리한다. 식물의 식용도 원래는 짐승이 먹는 풀을 인간이 어찌 먹을 수 있느냐고 도도하게 금기시했으나 지금은 대파나 야생마늘, 쐐기풀 같은 식물은 먹는다고 한다.


비록 소박한 점심 한 끼지만 주인의 정성과 친절이 흠뻑 밴 대접이다. 여남은 살 되는 딸애가 어머니 일손을 돕는답시고 부엌을 드나들며 음식그릇을 나르던 그 홍조 띤 앳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몽골사람들은 하늘이 내려준 은전인 음식을 남기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모두들 깨끗하게 밥그릇을 비우고 문을 나섰다. 이어지는 길은 남 타미르강 계곡의 돌밭 길이다. 해발 3000m가 넘는 두 산 사이에 펼쳐진 계곡은 상당히 깊거니와 폭도 넓다. 강 자체가 급류인 데다가 폭우 때면 산에서 굴러 내리는 돌 때문에 계곡은 온통 돌덩어리로 뒤덮여 있다. 길이 따로 없다. 밴은 좌우상하 걷잡을 수 없이 덜커덕거린다. 이곳저곳에서 바퀴에 펑크가 난다. 게다가 저녁 무렵이 되자 기온이 5~6도로 뚝 떨어진다. 한낮보다 무려 20여도나 급락하니 온 몸에 전율이 인다. 그래도 양안에 펼쳐진 고지초원의 환상적인 풍광에 의해 이러한 전율과 피폐는 조금씩 상쇄되어 갔다. 이제나저제나 끝나기만을 고대하던 이 돌길을 무려 다섯 시간이나 달렸다. 갑자기 나타난 산맥 하나를 넘어서도 또 같은 계곡 돌길을 두 시간 남짓 가야 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220㎞밖에 안 되는 험로를 돌파하고 목적지 바얀혼고르에 안착했다. 다들 녹초를 체험한 하루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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