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527150132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7) 몽골의 활불과 라마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5.27 15:01 수정 : 2009.08.19 11:37


유목민 사로잡은 ‘주술적 불교’의 힘


티베트 시가체에 있는 반첸라마의 본찰인 타슈룬포궁 외관.


2007년 6월30일,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현 하르호린)의 옛터에서 보낸 시간은 비록 한나절이 채 안 되지만 실로 뜻 깊은 한때였다. 일세를 풍미하던 현장에서 칭기즈칸 후예들이 비상하던 그 경천동지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음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무언가를 찾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한낱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유언 무언으로 그 현장을 증언하는 에르데니 조 사원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 몽골을 찾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불교의 몽골 전파다. 그것은 불교의 몽골 전파야말로 종교 전파사에서 특이한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직껏 연구가 미급한 종교 전파의 초전(初傳, 혹은 私傳)과 공전(公傳, 혹은 公許) 문제, 접변(接變) 문제 등 종교 전파의 근본 문제가 일찍이 여기 몽골 땅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특히 근간에 와서 속칭 라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가 그 독특한 수행법과 포교법으로 지금까지의 전통적 불교 분류법을 밑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이른바 장전불교(藏傳佛敎, 티베트에서 전래된 불교)라는 라마교에 대한 재인식은 절실하다 하겠다.


인도에서 출현해 세계 각지로 뻗어간 불교를 크게 작은 수레와 큰 수레로 대변하는 소승(남방불교, 히나야나)과 대승(북방불교, 마하야나)으로 나누며, 라마교는 대승계통의 한 밀교 분파쯤으로 여기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티베트 불교에 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불교에는 소승이나 대승과 더불어 라마교로 대표되는 금강승(金剛乘, 바즈라야나 혹은 탄트릭 부디즘)이라는 제3의 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대체로 그 주장이 긍정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전불교로서 티베트 불교와 한 맥을 이루는 몽골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현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하고 유의미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몽골 불교는 장전불교인 것인 만큼 그 원류인 티베트 불교를 찾아보고 그 전파 과정이나 전파 중에서 일어난 접변 같은 것을 비교검토해 보는 것은 몽골 불교의 심층적 탐색을 위해선 필수적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엮기에 앞서 지난 5월10일부터 8일간 티베트 현지를 찾아갔다. 라싸에서 달라이라마의 겨울 궁전인 포탈라 궁과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 궁, 송첸캄포가 네팔과 당에서 시집온 공주들을 위해 세운 티베트 최초의 사원 조캉 사원, 장체에서 백색 쿰붐 사원, 티베트 제2도시인 시가체에서 판첸라마의 본찰인 타쉬룬포 사원 등을 두루 돌아봤다. 역시 몽골 라마교의 본향답게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만큼이나 내용이 다양하고 심원하며 형식에서도 민족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본질에서는 그것이 그것이어서 여러 가지 공통점과 공유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장체험은 몽골 불교-라마교를 재량(裁量)하는 데 큰 지침이 되었다.


몽골인민공화국 국장의 원형인 중앙사의 국장(國章).


흔히들 티베트 불교나 몽골 불교를 통틀어 ‘라마교’(喇마敎)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국적불명의 용어다.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구루’, 즉 스승을 일컫는 단어로서 원래는 티베트 승려 중에서 전생을 기억할 정도의 뛰어난 수행력을 가진 대덕고승에 대한 존칭으로서 일반 승려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지칭이다. 가령 ‘달라이라마’에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며, ‘라마’는 대덕고승, 즉 ‘대사’(大師)를 가르키니, ‘달라이라마’는 ‘바다 같이 큰 지혜를 가진 대사’란 의미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라마승’은 있어도 ‘라마교’는 없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누구에 의해 잘못된 말 ‘라마교’가 씌어지기 시작한 후 회자되면서 관행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는 왕왕 어불성설이라도 관행으로 굳어져버리면 정설로 둔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튼 관행으로 굳어져 버렸다손 치고 티베트에서 몽골로 전래한 밀종 불교, 즉 장전불교를 일단 라마교로 명명하자. 그렇다면 이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16세기 후반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1575년 남몽골의 알탄칸이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黃敎, 黃帽派)에 속한 고승 소남갸초에게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이 파 불교를 신봉하며 시주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후 10년이 지난 1585년 북몽골 할흐 지방의 압타이사이칸이 옛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티베트 불교의 싸갸파(花敎) 고승을 초청해 에르데니 조 사원을 건립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불사(佛事)를 라마교의 몽골 전파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했을까?


여기에는 종교 전파에서 제기되는 한 근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몽골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서 한번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종교에서는 지연이나 혈연구조에 입지한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도 추구하려는 노력, 즉 포교나 전도(미션)를 통한 전파가 맹렬히, 그리고 간단없이 진행된다. 이와 같은 종교 전파는 자연적으로 전달과 변용(變容)의 과정을 거치는 바, 타지에 대한 한 종교의 전래 시원(기점)은 으레 초전 단계인 전달에서 찾아야 하며 초단계적으로 변용을 그 시원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초전 단계에서는 왕왕 이질적인 토착신앙(종교)으로부터의 저항이 있기 때문에 전파는 비밀리에 잠행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초전과정을 구체적으로 명백히 추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초전(전달)활동은 무시된 채 기록, 그것도 공전을 기준으로 한 공식기록에만 의존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몽골에서의 불교 초전 과정이나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교의 초전 과정은 유사한 경우로서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몽골의 경우 라마교는 초전단계에서 토착 전통신앙인 샤마니즘과 여러 면에서 맞부딪치면서 진퇴를 거듭한다. 급기야 대권자인 칸들의 공인 공허에 의해 전통신앙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변용단계에 이르러 라마교는 국교로서 공식화된다. 공허에 앞서 진행된 초전 사실을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료에 대해 일부 논자들은 그저 ‘불교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이라느니, ‘불교와의 최초 접촉’이라느니 하는 등 표현을 쓰지만, 그것이 초전(사전) 현상이라는 것까지는 갈파하지 못하고 있다.


과문으로는 몽골 관련 문헌 중에서 최초로 불교와 관련된 기사는 <몽골비사>에 보인다. 이 기사에 따르면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가 1227년 몽골에 항복하면서 마지막 군주인 이현(李睍)이 칭기즈칸에게 보낸 공물 가운데 수메스라는 이름의 진귀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불상이다. ‘수메스’는 후일 몽골인들이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하면서부터는 불교 사찰을 뜻하는 ‘숨’으로 와전된다. 13세기 중엽 루브룩을 비롯한 서방 선교사들이나 사신들이 수도 카라코룸을 방문하고 남긴 여러 여행기에는 당시 이곳엔 불찰이 12개소나 있으며, 사원 내에선 밀종의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으로 알려진 ‘옴 마니 반메 훔’을 주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원사>에도 헌종 때 해운(海雲) 화상이 불사를 주관하고, 캐시미르 출신의 불승 나마(那摩, 나모)를 국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카라코룸을 수도로 정한 우구데이칸의 아들 커턴이 티베트를 진공할 때 영입한 싸갸파의 지도자 사카판디타에 의해 불교로 귀의했다고도 전한다.


에르데니 조 사원 중앙사의 불상.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16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라마교를 국교로 공식 받아들이기 이전 300~400년 동안의 초전단계에 여러 경로를 통해 라마교가 스며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초전단계가 있었기에 비로소 전통적 신앙이 버려지고 대신 새로운 종교신앙-불교가 자리하는 사회적 대변용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용은 대대적인 불사의 건설과 전생(轉生)에 의해 종교의 최고통수권이 보장되는 활불제(活佛制)의 도입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할흐 몽골(외몽골)에서 라마교에 귀의한 압타이사인칸은 1586년 몽골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라마교 사원인 에르데니 조 사원(‘보석과 같이 귀중한 사원’이란 뜻)을 바로 이곳 카라코룸에 세웠다. 이 사원은 부지면적 0.16㎢(400m×400m) 위에 세워진 하나의 대규모 가람군으로서 모두 18개의 가람과 그 부속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으며, 그 건축 연대는 일치하지 않다.


서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가람군이 눈에 띄는데, 그 한가운데 흰색 사리탑(소보르간탑)이 우뚝 솟아있다. 이 탑 왼쪽에는 이른바 3사(寺, 고르반 조)라고 하는 중국 양식의 가람 3동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한가운데의 중앙사는 1585~87년에 지어진 건물로 가람군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 왼쪽과 오른쪽엔 각각 17세기 초엽에 세운 서사(西寺)와 동사(東寺)가 자리하고 있다. 소보르간 백탑의 오른쪽에는 18세기 초에 티베트 양식으로 지어진 라프란 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은 승려들의 수행 장소 역할을 한다. 3사를 비롯한 건물마다에는 귀중한 각종 불상과 불화, 경서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람군 건물들은 인접한 옛 수도 카라코룸의 궁전이나 사원의 잔해 자재들을 가져다가 지었다는 것이 남아 있는 주춧돌의 문양이나 명문에서 입증되었다. 경내에는 칭기즈칸이 이곳을 지나 서진할 때 썼다는 대형 무쇠솥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정사각형의 가람군은 20m 간격으로 하나씩, 총 108개의 백색 탑이 마치 푸른 주단 위에 박아넣은 흰 옥처럼 사위를 빙 둘러싸고 있어 에르데니 조 사원의 풍채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에르데니 조 사원의 건립을 기점으로 하여 도처에서 라마사원 건설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울란바토르에서 그 대표적인 건물 몇 개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중에는 1838년 제5대 활불에 의해 세워진 간단 데그친렌 사원과 1919년 제8대 활불이 세운 복트칸 겨울 궁전이 있다. 오늘날 간단 사원은 현대 몽골 라마교 부흥의 본산으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몽골인들이 샤마니즘을 포기하고 정통 불교에서 보면 좀 이탈적인 밀종계의 라마교를 받아들인 데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자연종교로부터 보편(이상)종교로의 이행이 불가항력적인 사회진화라는 점 말고도, 몽골 특유의 자연환경이나 사회문화 배경과 관련이 있다. 적막과 고독만이 감도는 초원에서 유목민들의 정신에 그나마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고요함에서 우아함을 청하는 침정담아(沈靜淡雅)의 수행보다는 주술적인 독경이나 장엄한 음악, 현란한 색채 같은 극적이고 신비적인 동적 자극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밀종일진대, 그것이 바로 구태신앙에서 벗어나려는 몽골인들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라마교는 출가승이라도 가족과의 유대를 유지하게 하고, 육식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유목사회의 유지를 가능케 하는 등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몽골인들의 일상에 부합되는 신앙인 것이다. 비록 이런 속에서 오늘로 이어져왔지만, 전통과 현대의 갈등과 괴리라는 시대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몽골 라마교가 직면한 난제가 아닐 수 없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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