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520154544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6)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5.20 15:45 수정 : 2009.08.19 11:37


천하호령하던 ‘제국의 심장’을 느끼다


에르데니 조 사원 바깥의 카라코룸 고지


일행 20명은 다섯 대의 미니 밴에 나눠 타고 울란바토르를 떠났다. 모두 10만㎞ 이상씩을 달린 허름한 구 소련제 차라서 먼 길을 무사히 달릴지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이제부터 가야 할 초원과 사막 길은 녹녹잖은 비포장길이다. 이른 시간이라서 거리는 한산하다. 가는 길은 초원길이지만 왼편엔 황막한 고비 사막이 펼쳐진다. 우리가 탄 2호차 기사 도고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젊은이로서 성격도 명랑하다. 내내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어려운 길을 헤쳐가면서도 상 한번 찌푸리는 일이 없다.


시내를 갓 벗어나자 초원을 가르며 북쪽으로 아스라이 뻗어간 두 갈래의 철길이 나타난다. 베이징에서 이곳을 지나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찻길이다. 마침 러시아에서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순간 50여년 전 이 철도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베이징~모스크바행 국제열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당시 이 길이 열리면서 베이징~모스크바 간의 철도 여정은 3일이나 앞당겨졌다. 1958년 이집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열차로 프라하에서 모스크바까지 이틀간, 모스크바에서 베이징까지는 동북 만저우리(滿州里)를 에돌아 오기 때문에 열하루가 걸렸다. 그 시절 차량은 비록 노후하고 설비는 허술했지만, 이 철마를 함께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만은 따뜻하고 훈훈했다. 서로 잔을 주고 받으며 노래도 함께 부른다. 한 소련(현 러시아) 친구가 푸슈킨의 시집을 선물로 준 일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여러 인종을 아우르며 동행하는 국제열차,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하는 국제공동체의 한 표본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 정비한 데다가 새로 맞은 손님에게 솜씨라도 보여주려는 듯, 다섯 대의 밴은 서로가 앞을 다투며 드넓은 초원 길을 쏜살같이 질주한다. 오늘 일정은 불간산 기슭의 첸헤르까지 무려 514㎞에 달하는 장거리를 주파해야 하니 전속을 낼 수밖에 없다. 근 5시간을 달려 반사막 반초원의 다신칠렌 벌판에 이르렀다. 울란바토르의 한국 식당에서 마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서 쉴 틈도 없이 길을 재촉한다. 이윽고 질펀한 벌판이 나타나더니 게르를 운반하는 트럭 한 대가 길을 헛갈리는 바람에 그만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광경과 맞닥뜨렸다. 온 가족(5명)이 앞뒤에서 끌고 밀면서 안간힘을 써보지만 빠진 트럭은 요지부동이다. 게르를 해체한 자재와 가재들이 빼곡히 실려 있다. 우리네 4호차가 로프를 걸어 가까스로 구출해 냈다. 어제 한 차례 소나기가 훑고 지나가서 땅이 온통 진창으로 변했다. 우리네 밴은 마른 땅을 요리조리 골라가면서 용케도 위기를 모면했다.


트럭에 게르와 가재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이들은 전형적인 몽골 이동 유목민의 일가다. 일반적으로 몽골에서의 유목은 이란이나 터키 같은 서부 아시아나 중앙아시아처럼 규칙적인 계절이동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비정형적인 이동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동 원인은 초지를 찾는 것이 주인이나, 때로는 가족이나 가축이 병들어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 라마승이 이동 방향이나 장소를 예시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비록 비정형적인 유목이지만, 연평균 이동 횟수나 이동 거리 및 하영지(下營地)에 따라 몽골의 이동 유목을 몇 가지 형태로 구분하기도 한다. 최근 데 바자르구르 등 학자들의 연구(1989년)에 의하면, 유목 형태를 크게는 산악형과 평원형으로 나누되, 세부적으로는 동영지와 하영지가 구별되는 항가이·헨티형, 알타이형, 고비형, 중부 및 동부 초원형 등 네 가지로 나뉜다. 요컨대 몽골의 유목은 계절이나 목장 형편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


만안궁 터에 세워졌던 비신의 돌거북 기단


오후 4시쯤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드디어 ‘하르호린’이란 이정표가 나타난다. 저 멀리 마치도 푸른 주단에 백옥을 일렬로 상감하듯 촘촘히 박혀있는 백탑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속에 화려한 에르데니 조 사원의 기와지붕이 저물어가는 초원의 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여기가 바로 일세를 풍미하며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서방 나라들이 앞을 다투어 사신을 파견하고, 세계 곳곳에서 상품과 대상이 폭주하던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유구(遺構)와 잔해들은 이 고도가 사라진 이후 만들어졌던 구조물들로서 그 자체가 고적의 흔적은 아니다.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곳이 몽골제국의 첫 수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숱한 연구와 논쟁, 지어 오인을 시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실 카라코룸에 관해서는 <원사>를 비롯해 주와이니의 <세계정복자의 역사>, 카르피니의 <몽골인들의 역사>, 루브룩의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라시둣 딘의 <집사> 등 여러 사서에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적잖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기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는 갑론을박 이론이 분분하다. 일찍이 프랑스의 동양학자 레뮤즈는 카라코룸 역사지리 연구의 선구자로서 <당서>에 근거해 위치를 추정하기는 했지만, 그만 오르콘강 상류에 있었던 위구르제국의 수도 카라바르가스와 혼동했던 것이다. 그의 연구와 이슬람 관련 사료를 꼼꼼히 검토한 사학자 도슨도 우구데이가 오르콘 강변에 궁전을 지었다는 사실만 밝혀냈을 뿐, 구체적인 위치 확인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와 현장 발굴에 의해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몽골연대기 등 문헌에 의해 그 위치를 오른콘강 상류의 우안, 캉가이(杭海))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에르데니 조 사원 일원에 비정했다. 그러나 문헌기록에 의한 추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모든 유물에 대한 확증은 기록과 물증이 물합(勿合)될 때만이 비로소 인정되는 법이다. 다행히 카라코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이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 에르데니 조 사원을 지을 때 인근에 있는 무너진 카라코룸 성채의 석재를 가져다가 썼는데, 방치된 일부 석재 중에서 카라코룸과 관련된 비문이 발견되었다. 러시아의 두 학자는 각각 한문이 첨부된 몽골어 비문 조각 2개와 3개를 수습했는데, 신통히도 동류의 조각들이다. 알고 보니 흥원각비(興元閣碑)의 잔해다. 이 잔해의 해석은 프랑스의 탁월한 동양학자 펠리오가 담당했다. 그가 원대의 문필가 유임(有壬)이 찬술한 <칙사흥원각비>(勅賜興元閣碑)의 비문 일부라는 것과 이 비는 원래 카라코룸 궁전 안에 세워졌던 비라는 점을 확인함으로써 사원의 건축과 고도의 관련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바탕해 1948~49년에 러시아 조사단은 도시의 유적 일부에 대한 발굴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우구데이 궁전 유지에 대한 발굴작업의 결과는 루브룩 등 방문자들의 기록과 정확히 부합됨으로써 이제 이 고도의 위치는 최종적으로 낙점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문헌기록과 출토 유물, 그리고 서방 방문자들의 여행기록 등에 의해 이 몽골제국 첫 수도의 모습은 드디어 비교적 완벽하게 드러났다. 원래 이곳 이름은 몽골어로 ‘검은 자갈밭’을 뜻하는 ‘카라코룸’이었으나, 지금은 현지 발음으로 ‘하르호린’이라고 한다. 중국 문헌에는 ‘객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약칭 ‘화림’으로 나온다.


일행이 타고 떠난 다섯 대의 미니 밴.


그렇다면 이 고도는 언제 어떻게 건설되었으며, 그 면모는 과연 어떠했을까? 원래 칭기즈칸 시대의 제국 중심은 케룰렌 상류였지만 거기서 더 서쪽의 오르콘 강가 카라코룸에 수도를 정한 것은 그의 둘째 아들이자 제2대 대칸인 우구데이 치세 때(1229~1241)다. <원사>에 의하면, 1235년 봄 우구데이는 오늘날 하르호린의 부근에 있는 ‘달란다비스(일흔 고개)’에서 소집한 ‘쿠릴타이’란 거대한 집회에서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고 건설공사를 시작해 불과 1년 만에 ‘만년궁’(萬年宮)이란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이 통설로 되었다. 그러나 ‘흥원각비’에는 칭기즈칸 15년, 즉 경신(庚辰)년(1220)에 도읍을 화림에 정했다는 기록이 있어, 펠리오 등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1220년 칭기즈칸 건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은 칭기즈칸 당시는 군사근거지로서의 본영쯤은 될 수 있었으나 도읍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우구데이는 금나라를 정복하고 개선한 후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북중국이나 이슬람 세계를 정복했을 때 데리고 온 공장들로 궁전을 짓고 정식으로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궁전에 부속된 상공업 지역을 설치했다. 대칸은 왕자들과 귀족들에게도 주변에 높은 건물을 짓도록 했다.


이때부터 카라코룸은 제국의 수도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초원 도시로서 생존을 위해서는 물자공급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통수단으로서의 역참(驛站)이 필요했다. 카라코룸으로부터 각 정복지 사이에는 조밀한 역참망이 설치되었다. 특히 인접한 부국 중국 내지까지는 37개의 역참을 두어 교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매일 각지로부터 식량과 술을 가득 실은 500대의 차량이 입성했다. 기록이나 유적을 미루어보면, 카라코룸은 대칸의 궁전과 궁성, 행정관리와 상공업자들의 거주구역, 그리고 온 도시를 에워싼 성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칸 우구데이는 궁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1년의 대부분은 초원의 게르에서 여전히 유목민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3대 구유칸이나 4대 몽케칸도 마찬가지었다. 우구데이는 계절마다 행궁 게르를 바꿔가면서 정사를 봤다고 한다.


몽케 치세의 말년까지 3대에 거쳐 약 24년간(1235~1259)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의 면모에 관해서는 여러 방문기록들이 전해주고 있지만, 1254년에 이곳을 방문한 프란체스코 수도사 기욤 루브룩의 기록이 가장 구체적이고도 생생하다. 남향을 향해 중국식으로 지은 만안궁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한 은제 나뭇가지와 사자의 입에서는 말젖과 포도주, 마유주, 봉밀주, 미주(米酒) 등 음료가 줄줄이 흘러내리고 전내에는 기둥이 두 줄로 맞서 있으며 맨 북쪽 대상(臺上)에 왕좌가 있다. 중앙 공간에는 헌주하는 대신들과 선물을 가져온 사신들이 대기하고 있다. 칸은 신처럼 정좌하고 있으며 그의 우측에는 남자들이, 좌측에는 여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황후 중 한 명만이 칸과 배석하고 있다. 그리고 4개의 성문이 달린 도시는 귀족관리와 무슬림(페르시아인이나 위구르인 등), 중국인들이 사는 3개 지역으로 나뉘는데, 무슬림 지역은 주로 상업구다. 성내에는 우상숭배(불교) 사원 12개소와 이슬람 마스지드 2개소, 교회당 1개소가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상이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사실은 몽골제국이 지향한 다원주의와 통합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국세의 승승장구에 편승해 일시 영화를 누렸던 이 초원도시는 단명일 수밖에 없었다. 에르데니 조 사원의 북쪽에 자리한 이 도시의 규모는 남북 150m에 동서 1000m에 불과하며, 잔해란 만안궁 터에서 비신을 받치고 누워있었을 법한 귀부(龜趺, 돌거북) 한 기뿐이다. 몽케가 죽자 그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에는 치열한 계위다툼이 벌어져 결국 쿠빌라이가 승리하면서 수도를 대도(大都, 베이징)로 정하자 카라코룸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급기야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붕괴와 더불어 일세의 영화를 누렸던 이 고도는 지상에서 영영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역사의 무상함이다.





Posted by civ2
TAG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