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318144944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7) 우란하오터의 조선족 중학교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3.18 14:49 수정 : 2009.08.19 11:34
중화를 강요받는 민족, 길을 묻다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
조선족은 중화민족의 구성원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
퉁랴오에서 밤길로 다섯시간 만인 자정께 우란하오터에 도착했다. 무려 16시간이나 강행군하는 벅찬 하루였다. 일행 중에는 이순(耳順)을 훨씬 넘긴 몇 분이 계시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기꺼이 일정을 소화했다. 현란한 간판이 달린 창펑(長豊)국제대주점이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희한한 것은 방 번호 앞에 ‘8’자가 덧붙어 있다. 4층 38호면 으레 ‘438’호여야 하는데, ‘8438’호다. 알고 보니, 근간에 광둥사람들이 돈을 잘 번다는 소문과 관련이 있다. 광둥어 ‘발재(發財)’(돈을 벌다)에서 ‘발’자 발음이 ‘8’자와 같다고 해서 ‘8’자를 선호하는 유행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것을 해음(諧音) 현상이라고 한다. 황금만능으로 치닫는 씁쓸한 중국 현실의 한 단면이다.
‘우란’이란 몽골어로 ‘붉은 색’, ‘호트’는 ‘시’란 뜻으로서 ‘우란하오터’(烏蘭浩特)는 ‘붉은 시’란 말이다. 이 시는 싱안(興安)맹의 치소로서 인구는 약 29만명(2008년)을 헤아린다. 대흥안령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뻗은 이 맹의 대부분은 산지와 구릉이며, 면적은 남한의 3분의 2에 가깝지만 인구는 200만명에 불과하다. 싱안맹은 명색이 내몽고자치주 3대 맹의 하나지만 몽골족은 전체 인구의 35%밖에 안 된다. 우란하오터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렇게 비중에서 큰 편차가 생긴 것은 다른 민족자치 지역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대거 이주 때문이다. 이른바 ‘중화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의 축도라고 하겠다.
이 대목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네 교포인 조선족 문제다. 이 문제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조선족이 많이 사는 우란하오터가 적격지다. 이 시에 사는 조선족은 약 1만명으로 전체 내몽고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절반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내몽골에서 유일하게 고등반과 초등반을 부설한 조선족 중학교가 있다. 그리고 시내에는 조선족 식당이 여남은개 있으며, 근교에는 오래 전에 자리잡은 조선족 마을도 몇 개 있다.
몇 곳 가볼 곳도 있지만 우선 이 고장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자부하는 조선족 중학교를 찾기로 했다. 9시가 갓 지나 학교 정문에 이르니 일과가 막 시작되고 있다. 정문 좌우에는 한글과 한자로 쓴 ‘우란호트조선족중학교’란 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4층 건물의 계단과 복도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조잘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순진하고 발랄하며 예쁜 얼굴들이다. 일행에게 반갑다는 손짓과 미소를 건넨다. 일행 중 몇 분은 그 애들을 얼싸 껴안고 볼을 비빈다. 겨레의 훈훈한 정이 흐르는 순간이다.
이윽고 어디선가 확성기 소리가 왕왕 울린다. 교장 선생님은 출타 중이라서 만나지 못하고, 여선생 한 분이 일행을 운동장으로 안내한다. 300m 달리기 코스를 갖춘 운동장에는 푸른색이나 감색 바탕에 줄무늬가 난 운동복 차림을 한 남녀 학생들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다. 매일 이맘 때 행하는 아침조회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기(오성홍기)가 서서히 올라간다. 모두들 근엄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이마 앞까지 치켜들고 국기를 향한다. 50여년을 이어온 학교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1956년 4개 학급 160명 학생으로 문을 연 이 학교는 한 때 500여명의 학생으로 북적거렸으나, 지금은 200명 안팎으로 줄었다. 4만4000평방미터의 부지에 각종 실험실과 도서실, 컴퓨터실을 갖춘 이 학교에는 2006년 현재 42명의 교사(고등반 9, 중등반 21, 초등반 12명)가 봉직하고 있다. 이 학교는 자치주나 전국적 범위에서 여러 차례 우수한 민족교육 학교로 평가받았으며, 배출된 3000여명 졸업생 중에서 1000여명은 베이징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 진학했다. 그들 중에는 수석 합격자도 여러 명 나왔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60년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5년간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 지금도 한인들이나 몽골인들의 학교에 비하면 시설이 뒤떨어져 있다고 한다. 절해고도나 다름없는 대흥안령 기슭 커얼친 초원에서 ‘선조들이 쪽지게로 실어온 우리의 말과 글, 문화’를 지키기 위한 동포들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다. 그들의 노력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현장에서 눈길이 운동장 뒤편의 나지막한 흰색 담벽과 마주쳤을 때, 이러한 솟구치는 감격과 흥분은 그만 냉정과 당혹으로 바뀐다. 그 담벽에는 이런 구호가 길게 가로 붙어있다. “시대적 특색이 있는 배움터를 꾸려 민족후대 양성사업에 최선을 다하자.” 장중한 구호다. 그러나 한편 난해한 구호이기도 하다. 여행 중 내내 이 글발이 눈앞에 서성이면서 착잡한 사색을 몰아오곤 했다. ‘시대적 특색’이란 어떤 특색이며, 그러한 특색을 갖춘 배움터란 어떠한 배움터일까, 특히 ‘민족후대 양성사업’이란 어떻게 하는 사업인지, 어떻게 해야 할 사업인지, 과연 가능한 사업인지…, 물음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자문(自問)에 또렷한 자답(自答)을 줄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기우쯤으로 넘어가려 해도 넘어가지 못하는 응어리다.
중국 동북 땅에 태를 묻고, 지금도 그 땅에 혈육들을 남겨놓고 있는 필자로서는 여전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민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 우리 겨레의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면, 이러한 연민과 걱정은 자연스레 700만 해외동포 모두에게로 확대된다. 이제 낙엽이 제 뿌리에서 떨어지듯 인간은 구경에 제 고향으로 돌아가고야만다는 혹은 돌아가야 한다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이나,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닭을 천하게 여기듯 멀리 떨어져 있는 해외동포들을 가엾게 여겨 더 보살펴야 한다는 ‘귀곡천계(貴鵠賤鷄)’ 같은 애국·애족·애향의 정신은 이미 효험을 필한 폐물이 되고만 것일까. 아니면, 저 구호처럼 ‘시대적 특색’에 맞춰 이해를 달리해야 하는가. 이제는 ‘낙엽귀근’이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는 ‘낙엽생지(落葉生地)’, 즉 낙엽은 살고 있는 곳에 떨어져야 하는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대다.
중국의 경우 바야흐로 우리 조선족 동포들에게 이른바 ‘3관(觀)’이 강요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3관’이란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조국관,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라는 민족관, 조선족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역사관, 이 세 가지 관점을 말한다. 설령 이것이 ‘시대적 특색’이라고 한다면 저 해맑은 어린 조선족 학생들은 분명 이 ‘3관’으로 세뇌되게 될 텐데, 그렇다면 그들을 향한 ‘민족후대 양성사업’이란 한낱 공염불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일국의 소수민족문제는 국내문제로서 바깥에서 왈가왈부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적잖은 경우 소수민족은 타국과 역사나 문화, 혈통의 공유로 인해 동족이란 고리로 연동되어 있다. 중국 내 조선족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우수한 민족문화를 꽃피워서 중국이란 화원을 백화로 아름답게 꾸며야지, 인위적이며 일시적인 난제를 구실로 다 문질러버리고 칙칙한 꽃 한 송이만 남겨두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나 독선이고 단견이며 역사의 역리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 조선족을 포함해 해외에 있는 모든 동포들에게 관심을 돌리면서, ‘낙엽생지’하되 ‘낙엽귀근’의 근본(고국이나 고향)을 생각하는 구수지심(丘首之心)만은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생지’와 ‘귀근’을 상극 아닌 상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살아갈 국내외인 모두의 슬기인 것이다.
이날 동행하는 하태무 여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퍽 인상적이다. 여사께서는 10여년 전 옌볜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정판용 총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조선족은 중국으로 시집 온 딸이다. 우리더러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좋으냐 아버지가 좋으냐를 묻는 어리석은 질문과 같다. 출가외인이란 말이 있듯이 조선족은 중국 사람이다. 시집에서 대우를 잘 받자면 친정이 잘 살아야 하는데 지금은 친정에서 싸움질만 하니 조선족은 힘이 없다. 잘 살아달라…. 한 조선족 지성인의 솔직한 심정이고 간절한 소망이다. 출가한 외인이지만 친정은 어디까지나 친정일진대, 희비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다.
고인이 된 정 총장의 말이 더욱 절절하게 필자의 가슴을 허비는 것은 그와의 오래된 인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옌볜대학 조선어문학과 1기 졸업생으로서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었다. 멀리 문 밖까지 나와서 우리 문화의 지킴이가 되어줄 것을 당부하는 필자의 환국을 손 저으면서 슬피 바래주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누군가를 마음속에 묻어두고 추억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행복한 일이다. 그 시절 젊은 영혼들이 간직했던 그 바람이나 미래가 오늘 비록 빛을 바래고 있을 성싶지만, 아직은 영영 꺾이지 않고 마냥 살아 숨쉬고 있음을 우란하오터와 이 중학교 현지에서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아침조회가 끝날 무렵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옮겨놓으며 교실들을 한 바퀴 돌아봤다. 깔끔히 정돈된 교실마다의 벽에는 형형색색의 한글과 중국어로 쓰인 게시물이나 과제물이 붙어있다. 가끔 몽골어도 눈에 띈다. 교실동 입구에는 ‘노력으로 실력을 기르자’라는 독려의 현판이 가로 걸려있다. 그 밑에는 ‘한산중가(罕山中街) 40호’라는 학교 주소와 그 오른편에는 문명단위(文明單位, 문명한 기관)란 표창장이 붙어있다. 그리고 입구 계단 위에는 ‘식품 안전은 사람마다의 책임이다’(食品安全人人有責)라고 쓴 판자가 놓여있다. 모두 이 학교의 알뜰한 살림살이를 말해준다.
학교 정문 좌측에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일풍(日豊)상점’이란 조그마한 학용품 가게가 있다. 기념품이나 사려고 들어갔더니 20대 중반의 젊은 주인은 꽤나 수줍어하면서 말문을 머뭇거린다. 그는 한국말을 대충 알아듣기는 하는데 말할 줄은 모른다고 손시늉을 한다. 이 중학교는 옌볜교육출판사에서 찍어내는 조선어 교재를 사용하는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애먹는다고 한다. 부모들이 장래를 생각해 자식들을 중국 학교로 빼돌리기 때문에 학생 수도 자꾸 줄어든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한국행이 늘면서 빈집이 생길 정도로 조선족 숫자도 줄어든다. 당국의 지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귀곡천계’의 정 나눔이 필요한 시점이다.
앞으로 더 엄혹한 현실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불을 뿜어대는 거대한 ‘중화민족’이란 공룡 앞에서 200만 우리 동포가 과연 불사조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동북의 모든 민족을 황제의 ‘후예’로 싸잡아 넣는 ‘요하문명’의 격랑을 과연 막아낼 수 있겠는가. 측은지심을 달래며, 다음 답사지를 향해 차에 올랐다. 어린 고사리 손들이 차창 너머로 너울거린다. 두고 떠나는 우리들의 눈가에도 물기가 서린다. 부디 불사조로 모진 세파를 헤치고 ‘민족후대’로 무럭무럭 자라 달라, 그 염원 한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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