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401155419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9) 칭기즈칸은 어디에 누워있는가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4.01 15:54 수정 : 2009.08.19 11:35
제국의 왕 간 곳 없고, 전설만 무성하고 무상해라
우란하오터에 있는 칭기즈칸의 묘당. 칭기즈칸은 어디에 묻힌지 알 수 없지만 중국은 이렇게 대규모의 묘당을 건립하고 유례없이 칭기즈칸을 치켜세우고 있다.
반세기 전 내몽고자치주가 설립될 때만 해도 우란하오터는 주도(지금은 후허하오터)로서 내몽고에 사는 몽골족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성지로 우러르던 곳이다, 아득한 옛날,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고토(故土)치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서 번듯한 도시를 이루고 있는 곳은 이곳뿐이며, 더욱이 여기에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르는 그들의 영웅 칭기즈칸의 성소를 대신할 수 있는 묘당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요즘 중국 측에서 칭기즈칸을 전례 없이 치켜세우는 시류 속에서 그의 묘당은 당연히 인기를 끌게 된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궁금증을 품고 늦은 오후 시간에 묘당을 찾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지형이 평지에서 300여m 높은 곳이어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묘당 주변은 공원처럼 깔끔히 꾸려놓았다. ‘성지’라서 그런지 그간 둘러본 다른 유적지들과는 달리 입구부터가 갖가지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묘당의 연혁에 관한 소개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40년에 시공해 1944년에 완공했는데, 설계자는 내몽고 건축예술가 나이러얼(耐勒爾)이다. 건국 후 당과 국가는 이 묘당을 십분 중시하는 바, 후진타오·예젠잉·리펑 등 국가 지도자들이 다녀갔다. 묘당은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이며 국가의 AAA급 풍경구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여행 성지다.
사실 먼저 알고 싶은 것은 이 묘당이 왜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는지 하는 문제인데, 그에 대한 답은 이 소개문이나 묘당 전시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소개문 내용과는 좀 다르게 현지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1930년대 말 일본이 몽골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음 직하다. 그 시기 이곳은 일제의 꼭두각시 만주국 영내에 속해 있었으며, 일제는 호시탐탐 대소 침략을 노리면서 갖가지 감언이설로 몽골인들을 회유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러하거니와 일본은 유별나게 시종여일 칭기즈칸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그의 죽음과 장지에 대한 추적은 그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요하다.
묘당의 정문 입구에서는 이 소개문 말고도 여러 장의 홍보물이 눈에 띈다. 사회봉사 기강을 세우기 위한 6개 항목의 규정이라든가, 안내원이 지켜야 할 5가지 책임 사항, 그리고 8가지 여행자 수칙 등이 시시콜콜 적혀 있다. 조금은 의아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안내원들이 사용해야 할 ‘문명 용어 20구’를 명문화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好)’, ‘고맙습니다(謝謝)’, ‘미안합니다(對不起)’로부터 시작해 ‘돈이 맞는지 확인하십시오(請核對好錢款)’까지 모두 스무가지의 ‘친절안내’용 단문이다. 작금 여러 가지로 흐트러진 사회봉사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요즘, 특히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어디를 가나 이런 ‘문명화’ 구호가 지천에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어 국도 요금소에도 ‘문명수관처’(文明收款處)란 게시판이 붙어 있다. ‘문명적으로(점잖게) 돈을 받는 곳’이란 뜻이다. ‘문명’을 ‘교화’나 ‘교양’으로 이해하는 중국식 문명 개념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문에 들어서니 묘당 본채까지는 서서히 높아지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우측에는 ‘칭기즈칸잠언장랑(成吉思汗箴言長廊)’이란 긴 주랑 건물이 있는데, 유리벽 속에는 칭기즈칸이 생전에 남긴 잠언(가르쳐 경계가 되는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묘당 본채는 언덕배기의 꼭대기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몽골 모자형 지붕을 얹은 정방형 백색 건물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원태조’라고 금물로 쓴 커다란 액자 아래에 위엄 있게 정좌하고 있는 칭기즈칸의 초상과 맞닥뜨린다. 1층 전체가 전시실인데, 칭기즈칸의 유품은 몇 점 안 되고, 거개가 그의 가계도라든가 전쟁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나 몽골인들 일반의 생활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관심거리인 칭기즈칸의 매장지에 관한 단서는 여기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내려오는 계단 길 오른쪽 비탈진 곳에는 장검을 뽑아들고 진중으로 돌진하는 칭기즈칸의 용태를 부각시킨 기마동상이 서 있다. 낙조에 비낀 동상만을 스쳐보고 지나가려는데, 앞면에 한자와 몽골어로 새겨진 ‘일대천교’(一代天驕)’란 제목의 명문이 발목을 잡는다. ‘천교’라니, 어안이 벙벙하다. 이 말은 역사 용어로서 옛날 한민족이 흉노족의 왕을 일컬었던 말이었으나, 흉노가 없어진 후로는 소수민족의 군주에 대한 전칭으로 뜻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일대천교’란 한 세대를 통치한(혹은 일세를 풍미한) 한 소수민족의 군주란 뜻이 된다. 그러나 명문 내용에는 칭기즈칸을 일컬어 ‘일생을 전장에서 살다 간(戎馬一生)’ ‘중국 역사 상 걸출한 군사통수’라고 씌어 있다. 이를테면 그를 중국 역사 속에 끌어들여 한때 중국 군사 일체를 거머쥔 ‘군사통수’로 묘사하고 있다. 제목과 내용의 문맥을 뒤집어 보면, 제아무리 ‘군사통수’였지만 결국은 저 변방의 한 소수민족 군주에 불과했다는 저의다.
중국 사람 치고 그 누구도 이루어보지 못한 세계제국의 건설자, ‘정치통수’를 고작 ‘일대천교’로나, 순 칼잡이 ‘군사통수’로 평가하다니. 너무나 얄팍한 꼼수다. 이것은 자가당착적인 유설(謬說)일 뿐만 아니라, 은연중 중화주의적 교만을 내비친다. 그 밖의 중국 측 글에는 칭기즈칸을 가리켜 ‘일대천교’라고 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용의(用意)는 무엇이라고 하든, 진의는 이렇게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동상이 역사적으로 오늘의 중국 판도 내에 있던 모든 국가나 민족은 중국에 귀속된다는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2001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칭기즈칸을 기리는 성소는 내몽고 어얼두어쓰(鄂爾多斯) 이진호뤄(伊金洛) 초원에 하나 더 있다. 사실 그곳은 시신이 아닌 의관을 묻은 의관총(衣冠塚)이지만, 왕릉인 양 ‘칭기즈칸릉’이라고 부른다. 부지 면적이 1500㎡나 되어 여기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지만 내막은 그것이 그것이다.
이러저러한 착잡한 생각을 하면서 돌계단에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는데, 일행 중 한 분이 갑자기 여기가 칭시즈칸의 묘당이라면 그의 묘지는 어디 있는가라고 묻는다. 다들 호기심이 동했는지 둘러앉는다. 이 오리무중의 수수께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한참 망설이다가 내키는 대로 말문을 열었다. 당시 몽골인들, 특히 상층들의 장례관습부터 이야기했다. 매장은 크게 비밀리에 묻는 비장(秘藏, 일명 潛藏)과 간소하게 묻는 박장(薄葬)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비장은 분묘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당하는 도굴과 유골의 노출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는 매장이다. 그래서 역사 상 드물게 원나라 황제들은 묘를 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어디에 묻혀 있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묘 자리에서 파낸 흙은 차례대로 늘어놓았다가 다시 차례대로 덮는다. 칭기즈칸의 비장을 위해 시신이 지나가는 길 위의 모든 생물은 죽음을 당했다니, 비장에는 이런 무시무시한 악폐도 도사리고 있다. 박장은 영혼은 중시하나 육신은 경시하는 몽골인들의 신앙풍조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유골 매장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으며 장례도 간단히 치른다. 제왕의 매장법을 소개한 한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관은 두 쪽으로 자른 사람 크기의 통나무 관이며 부장품은 고작 금주전자 2개와 잔 1개, 접시와 수저 각 1개씩뿐이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은 어디에 어떻게 묻혀 있을까. 지금껏 숱한 시도를 해봤지만 정답은 없이 각인각설이다. 최근 일본과 미국 고고학자들이 최신 탐사기라고 하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GPS)을 이용해 탐사해 봤지만 허사였다. 아무래도 기록이나 전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명나라 주원장의 명을 받은 대문신 송렴(宋濂)이 책임지고 편찬한 <원사>는 이에 관해 ‘장기련곡(葬起輦谷)’이란 4글자를 남겨 놓았다. 즉 기련곡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 기련곡 찾기에 매달린다. 그 해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련’은 제왕이 타는 가마란 말이므로 그가 그런 ‘가마를 타기 시작했다(起輦)’는 것은 제국의 왕이 되었다는 뜻인 즉, 제국을 일으킨 외몽골의 어느 골짜기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련곡’은 고유 지명이라는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후자에 무게를 두는데, 내몽골이나 외몽골의 어느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하단. 내몽골의 경우 닝샤(寧夏)나 간쑤(甘肅), 신장(新疆), 심지어 베이징 일대에 있는 어느 골짜기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르코 폴로는 알타이산 높은 곳에 묻혀있다고 하며, 러시아 학자들은 중국 고대 풍수를 들먹이면서 매장 길지는 수성(水城)이기 때문에 바이칼호에 수장됐을 것이라고도 한다. 스웨덴의 동양학자 다상(多桑)이 쓴 책에 보면, 칭기즈칸을 묻고 나서 장지에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자라서 밀림이 되자 어느 나무 밑에 묻혔는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일부에서는 그가 병사한 간쑤성 류판산(六盤山)이 장지라고 믿고 있는데, 그 근거는 이른바 눈을 가리는 장안법(障眼法)에 두고 있다. 몽골인들의 습속에 따르면, 일단 시체가 썩기만 하면 영혼이 천당으로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3일 이내에 시신을 묻어야 한다. 따라서 여름에 죽은 칭기즈칸의 시신을 먼 곳으로 옮기지는 않고 그 산에 곧바로 묻었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논리지만 사실로 입증되어야 한다. 이렇듯 그의 매장지에 관한 논란이 분분하고 아직까지도 찾아내지 못한 것은 아마도 후예들이 비장을 위해 시쳇말로 위장정보를 퍼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찾아낸다고 의욕을 보이지만, 800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부지 하세월’,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보다.
몽골의 비장과 관련해 한 가지 이상야릇한 사실은 사람을 매장할 때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 낙타를 도살한다. 슬피 우는 어미 낙타를 강제로 끌고 돌아간다. 이듬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지를 다시 찾았을 때는 육안으로 풀 덮인 묘지를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어미 낙타는 모성 본능으로 새끼를 잃은 바로 그 장소(장지)에서 서성거린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묘지는 확인된다. 인간의 이기를 위한 잔인한 동물 학대다. 그 낙타가 죽기만 하면 묘지 확인은 그로써 끝장나고, 묘지는 영영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다들 출출한 김에 ‘대청화교자(大淸花餃子)’란 널찍한 간판이 붙은 중국 식당을 찾아갔다. 전국적으로 체인점을 가질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라서 손님들로 붐빈다. 우리말로 하면 만두 전문식당이다. 그런데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중국식 교자(소 넣은 것)를 만두(饅頭, 소 넣지 않은 것)라고 부른다.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이겠지만, 기왕 조선조 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음식이니만큼 제대로 교자는 ‘교자’로, 만두는 ‘만두’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이 식당의 특색은 갖가지 고기와 두부, 채소 등을 소로 한 9가지 색깔의 교자가 식탁을 꽃피운다는 것이다. 맛도 맛이려니와 빛깔에 그만 먹기 전부터 황홀해진다. 그리고 오늘 점심은 조선족 부부가 운영하는 ‘한성주점(漢城酒店, 서울여관)’ 식당에서 며칠 만에 한식을 맛보았다. 중국 돈 100만위안을 주고 인수 받은 이 식당이 지금은 잘 된다고 주인은 흐뭇해 한다. 대체로 한식 식당은 잘 운영되는 모양이다. 어제는 퉁랴오에서 아예 개고기 식당으로 불야성을 이룬 ‘개고기성(狗肉城)’ 내에 자리한 ‘조족촌(朝族村, 조선족촌)’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두부와 채소, 국수를 마구 한데 넣고 끓인 개고기국이 옌볜식이라고는 하는데, 어릴 적의 맛과는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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