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603140345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8) 칭기즈칸의 서정(西征)길을 따라

문명사학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6.03 14:03 수정 : 2009.08.19 11:37


게르(텐트식 이동가옥)서 여장 풀고 느껴본 몽골군의 자취

몽골 서정군의 이동 지휘부 조형물.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자 그러잖아도 조금은 을씨년스럽던 하르호린(옛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의 하늘은 잔뜩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면서 난데없이 바람도 윙윙거린다. 운전기사들의 얼굴에는 근심기가 서린다. 목적지 체체를레크까지 남아있는 120㎞의 밤길을 가야 하는데, 달빛이나 별빛이 구름에 가려진다는 것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먼 길을 달려 온 데다가 이 고도의 옛터를 구석구석 살펴보느라 다들 맥도 빠졌거니와 시장기가 들었다. 근교의 깔끔한 게르 식당으로 안내되어 쇠고기 덮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심신이 나른해진 일행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화림’(和林) 이야기를 꺼냈다. 이 고도의 한자 이름은 음사로서 ‘화림’인데, 뜻을 풀이하면 ‘평화의 숲’이라고 운을 뗐다. 맞거나 말거나 엉뚱한 풀이다. 마유주 한잔씩을 치켜들고 ‘화!’에 ‘림!’으로 화답하면서 건배를 했다. 다들 얼굴에 활기가 내비친다. 일단 야행을 앞둔 기분전환에는 성공한 셈이다.


녹녹잖은 초원길이다. 우리가 에르데니 조 사원 정원에서 본 대형 무쇠솥은 칭기즈칸이 이끈 서정군(西征軍)이 쓰던 것이라고 하니, 서정군은 분명 이곳에서 출발했거나 이곳을 지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행은 이제부터 1700여년 전 칭기즈칸이 서정에 올랐던 그 길을 비록 오롯하지는 않지만 더듬더듬 찾아가는 것이다. 그 길에 찍혀진 발자국과 길 위에 남겨진 유적·유물들은 서정이란 장거에 관해 유언무언으로 증언할 것이다. 그 증언을 현장에서 확인하고파 이렇게 불원천리 찾아 온 것이다.


첸헤르 온천 휴양지의 게르식 식당 내부.


어두움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밤 8시, 일행에게 칭기즈칸의 서정길에 관해 간단하게 브리핑을 하고 길을 떠났다. 초원엔 길이 없다. 지나간 자국이 곧 길이다. 밤이면 더더욱 그러하다. 유일한 물표(物標)는 달이나 별이다. 그런데 그 물표가 짙은 구름에 완전히 가렸으니, 초원은 문자 그대로 칠칠흑야다. 길 아닌 길을 가다보니 밴은 상하좌우 무법으로 요동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네 밴은 두 번이나 타이어가 펑크 났다. 몇 번이고 기사들은 차를 멈춰 세우고 구수회의를 한다. 이 길을 자주 오갔다는 노련한 기사들도 도시 얼떨떨한 모양이다. 통상 3시간이면 족히 닿을 그 목적지는 여섯 시간이 훨씬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리무중이다. 할 수 없이 차를 멈춰 세우고 노숙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야밤에 초원이나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경우는 허둥대지 말고 제자리에 딱 붙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수칙이다.


수칙대로 할 것을 결심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노라니, 문뜩 몽골군이 서정할 때 일어났다는 한 토막 전설이 요행을 예고나 한 듯 기억에 떠오른다. 어느 날 한 분견대가 그만 사막에서 길을 잃고 아사지경에 처한다. ‘노마식도’(老馬識道), 즉 ‘늙은 말은 길을 안다’라는 속담을 믿고 늙은 말 한 필의 고삐를 풀어놓았다. 말은 몇 바퀴 주위를 돌다가 무엇을 알아냈는지 곧장 서북 방향으로 뛰어간다. 따라가 보니 푸른 호수가 나타나 물을 실컷 마시고 기사회생했다. 호수가에 나와 보니 우거진 숲 속에 몇 채의 게르가 보인다. 한 게르에 찾아가 사정을 말하니 노부가 아이라크(소젖 요구르트)를 건네준다. 그런데 그 맛이 방금 전 호수에서 마신 물맛과 신통하게도 똑같다. 이것이 호수가 젖이 되어 서정군을 구출했다는 ‘아이라크호 전설’이다. 전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기대이고 암시일 뿐이다.


다들 포기하고 눈을 붙일 채비를 하고 있는데, 적막 속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가 솔깃했다. 순간 그쪽에서 섬광이 번뜩인다. 기사들 중 연장자인 4호차의 진네가 어느새 개 짖는 곳을 알아내고 찾아가 우리들에게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함께 달려가니 두 채의 게르에서 두 아주머니가 기지개를 켜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은 짖는 개를 달래고, 다른 한 사람은 갈 길을 알려준다. 새벽의 단잠에서 깨어났으련만, 그렇게 스스럼없이 마치 지인을 만난 듯 친절하다. 덕분에 한 시간 남짓 더 달려 드디어 새벽 3시쯤에 체체를레크에 도착했다. 첫날 여행치고는 꽤 벅차다. 19시간 동안 514㎞를 주파했으니 말이다.


우리가 답사 첫날 밤 여장을 푼 곳은 유명한 첸헤르 온천 휴양지의 게르다. 6월 그믐인데도 게르 안은 한기가 감돈다. 난로에 장작을 피워놓고서야 안온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네 시간도 채 못자고 기상했지만 간밤의 초조와 피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다들 활기에 차있다. 이곳은 온천 야영소로서 20여채의 게르가 목책 속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위는 짙푸른 주단을 깔아놓은 듯 목초로 뒤덮인 언덕과 야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어느새 말과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야영소의 한 모퉁이에 마련된 공동식당은 40~50평의 넓은 공간인데 게르식이다. 어떻게 이렇게 큰 게르를 지을 수 있을까. 게르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앞으로도 여러 밤을 그렇게 해야 하는 일행. 특히 초행자들에게는 게르 생활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게르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원래 인간의 의식주는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영향이 절대적이다. 몽골과 같은 유목사회에서 생계의 기본수단은 목축이며, 목축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그 어느 경제형태보다도 많이 받기 때문에 유목민들의 의식주는 그 내용이나 형태에서 이동적인 목축경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거주에서 그런 사실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원래 고대 몽골에는 고정된 가옥과 분해해서 운반할 수 있는 텐트식 가옥의 두 형태가 있었으나 지금은 텐트식 가옥 한 종뿐이다. 그런데 이 가옥 형식도 역사발전에 따라 그 면모를 달리해 왔다.


몽골의 게르 외형.


몽골제국 이전에는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수백가구가 서로 어울려 사는 쿠리엔식 텐트 가옥이었으나, 제국 이후에는 방어라는 필요성이 없어진 데다 목축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분산 거주하는 아일식 텐트 가옥(보통 2~5가옥)이 성행하기 시작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일식인 경우 가장 오른쪽 게르는 연장자의 것이고, 가장 왼쪽 게르는 창고 등으로 쓰인다. 칸이 거주하는 오르도(게르의 높임말)의 오른쪽으론 누구도 지나갈 수 없다. 겨울이나 봄엔 매서운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문은 항상 남쪽으로 낸다. 게르의 재료는 나무와 펠트인데, ‘게르의 뼈대’라고 하는 나무재료는 둥근 천창과 천장의 서까래, 벽, 문틀 등이다. 천창은 느릅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서까래와 연결시키고, 벽은 주로 버드나무를 엇갈리게 엮어 접었다 폈다하는 신축성이 있어 계절에 따라 높이와 너비를 조절한다. 게르의 외벽은 보통 5~6짝의 펠트로 덮는데 여름에는 한 겹으로, 겨울에는 두 겹으로 한다. 펠트가 드리운 문을 출입할 때는 문의 바른쪽을 들어올리고 출입한다.


게르에는 엄격한 내부질서가 있다. 지을 때는 맨 먼저 화로를 설치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하고 가신제를 떠맡게 될 막내아들을 ‘화로를 지키는 아들’, 즉 ‘가계를 지키는 아들’이라 부른다. 게르 안의 북서쪽은 신성한 장소로서 거기에 불단이나 우상을 모시며, 출입문에서 왼쪽은 남자 자리고 오른쪽은 여자 자리다. 가재도구의 배치도 이 원칙에 따른다. 남자 자리에 마구나 무기 등을, 여자 자리에 조리기구나 유제품 제조 도구 들을 놓는다. 손님은 활과 화살 등 무기류를 휴대하고 게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게르 입구에 빨간 천조각이 장식되어 있으면 출산을 의미하고, 한낮에도 천창이 덮여 있으면 상사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럴 경우는 출입을 삼간다. 뒷간은 숲이 무성한 곳이나 움푹한 곳을 택하며 배설물은 대부분 개가 처리한다. 뒷간 간다는 말을 몽골어로 남자는 ‘말 보러 간다’, 여자는 ‘말젖 짜러 간다’고 표현한다.


게르는 몽골인들의 우주관을 집약하고 있다. 임신부가 진통을 시작하면 긴 실 한 타래를 화로 부근에서 기둥에 감아 천창 밖으로 내어 묶는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신앙에 바탕한 관습이다. 게르의 나무 기둥은 우주목으로서 샤먼이나 영혼이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게르를 해시계로도 이용한다.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닿는 곳을 보고 시간을 헤아린다.


게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피어나는 푸름의 ‘내음’은 싱그럽기만 하다. 그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첸헤르 온천에서 끌어온 온천수를 저장하는 수조(水槽)다. 노천 수조다 보니 수온은 자연수온으로 내려갔지만 거울처럼 맑으며, 광물질 냄새가 약간 풍긴다. 만져보니 미끌거린다. 이 물을 걸러서 식수로 쓰기도 하고 가열해서 욕조에 보내기도 한다. 이 온천수는 약 5리 밖에 있는 첸헤르 온천에서 관을 통해 끌어온다. 사실 몽골에는 40~50도에 달하는 온천이 적잖게 있다. 동북부의 헨티 산맥에서 발원하는 오논강변에는 20개소의 온천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노욘할롱 온천이다. 목민들은 겨울철이 되어 산지의 소택이 얼어붙으면 온천을 찾아 떠난다. 얼어붙지 않는 온천은 치료에 효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음료수원이 되기도 한다. 온천수에 버터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이 첸헤르 온천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보르칸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르칸산, 그것은 밝음을 주는 마음 속의 성산이다. <몽골비사>의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칭기즈칸의 근원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잿빛 반점을 지닌 늑대이다. 그의 부인은 황금색 털을 지닌 암사슴이다. 이들은 탱기스호를 건너 오난하의 상류에 있는 성스러운 보르칸산에 거주지를 정했다.’


이렇게 천손(天孫)을 자부하는 몽골계 민족들은 하늘의 밝은 빛을 받아 무궁토록 번영하는 곳이 바로 보르칸산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에게 이 성산은 고정된 산이 아니라 마음 속에 살아있는 믿음의 산이며, 하늘의 빛이 이르는 곳을 따라 이동하는 자유로운 산이다. 이동을 숙명으로 삼는 유목민들에게는 희망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특히 대칸들은 보르칸산을 자기 주변에 두고 싶어 하며, 주변의 어느 한 산을 보르칸산으로 정해 놓고는 성대한 제천의식을 거행한다. 아마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저 보르칸산도 바로 그러한 마음 속의 성산, 희망의 성산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옷깃이 여며진다. 우리의 고대문화를 하늘의 뜻이 전달되는 그러한 성산의 의미와 연결시켜 이른바 ‘불함론’(不咸論)으로 정리하는 견해도 있어 북방문화와의 상관성을 짚어보게 한다.


첸헤르 온천 휴양지.


아쉽게도 시간에 쫓기다나니 온천욕은 못한 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첸헤르 온천 야영소의 입구에는 그 옛날 몽골 서정군이 사용하던 대형 게르 조형물(지금은 아트 숍으로 이용)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필의 말이나 소가 끄는 차량 위에 얹혀 있으며 군기를 꽂는 자리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서정군의 이동 지휘부임이 분명하다. 대형 무쇠솥이 발견된 에르데니 조 사원이 있는 카라코룸에서 출발한 서정군은 이러한 이동 지휘부의 휘하에서 이곳을 지나 서정의 길을 이어갔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칭기즈칸이 열어놓은 그 서정의 길을 밟아보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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