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721175123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4) 초원에서 피고 진 돌궐

정수일 | 문명사학자·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7.21 17:51 수정 : 2009.08.19 11:39


돌궐제국 200년 흥망성쇠, 비석에 오롯이


체체를렉에 있는 제1 돌궐제국 시대의 부구트비.


오늘의 몽골 초원은 700~800년이란 세월의 격차를 두고 세 번이나 동서양을 갈무리한 세계적 제국, 즉 흉노제국과 돌궐제국, 몽골제국을 태동시킨 역사의 중요한 요람이다. 이것은 동서양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알렉산더제국이나 로마제국, 당제국이나 이슬람제국 모두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난 일회성 제국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이른바 정착 농경에 비교하며 이동 유목의 후진성을 운운하면서 초원의 유목민들을 ‘야만인’으로 치부하고 세계적 제국 건설의 바탕과 동력이 되어 온 그들의 유목문명을 아예 문명권에서 제외시키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치고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일찍이 돌궐제국의 본향이었던 이 몽골 땅에서 제국이 남긴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오늘날 흔적이랍시고 남아 있는 것은 고작 당시에 세워진 몇 기의 비석과 혈통적으로 돌궐족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카자흐스탄족 사람들뿐이다. 지금 일행이 알타이산맥 동남쪽 기슭을 따라 홉드에서 바얀올기로 북상하는 여로 주변이 바로 몽골 카자흐스탄인들이 지탱해 온 삶의 터전이어서 돌궐제국의 옛 모습을 얼마간 엿볼 수가 있다.


돌궐(突厥)은 그 어원부터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돌궐제국을 건설한 사람들 스스로는 ‘튀르크’라고 불렀지만, 한적에는 ‘돌궐’로 나온다. ‘돌궐’이 ‘튀르크’의 음사라고 할 때는 튀르크어의 어의를 따라 ‘강력’ ‘성대’ ‘기력’ 등으로 해석한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음사가 아니라고 할 때는 해석이 달라진다. <주서>나 <수서> 등 중국 정사에 의하면 금산(金山), 즉 알타이산 모양이 마치 원추형 두무(兜, 투구)와 같은데, 그 음이 ‘돌궐’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은 견강부회적인 해석이다. 그런가하면 고대 부족으로서 ‘연맹’을 뜻하는 칙륵(勒)이나 철륵(鐵勒)의 음사라는 주장도 있다.


울란바토르 남쪽 50㎞ 지점에 있는 제2 돌궐제국 시대의 톤육쿡비의 남비.


돌궐족의 시원에 관해서는 대체로 흉노와 관련시켜 그의 별종이라든가, 아니면 그 북쪽에 있던 색국(索國)이나 정령(丁零), 선비, 철륵의 후예라는 주장이 강하지만, 투르키스탄(신장)에서 발원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엇갈리고 아직 정설은 없다. 다만 그 체질에 관해서는 유골로 보아 대부분 몽골인이나 한국인처럼 단두형으로 검은 머리에 큰 눈과 보통 키보다 약간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돌궐족의 시조에 관해서도 몽골족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들이 공유하고 있는 낭생설화(狼生說話)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날 돌궐인들은 주변의 공격을 받아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남겨놓고 모두 살해된다. 사경에 처한 이 아이를 가엽게 여긴 암늑대 한 마리가 그에게 젖을 먹이고 고기를 물어다 주어 살리고 키운다. 후일 이 아이가 커서 암늑대와 결혼해 열 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 중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사나(阿史那, 튀르크어로 ‘늑대’란 뜻)였는데, 그가 바로 돌궐제국의 칸(군주)을 배출한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늑대가 사람의 조상이 될 리는 만무하지만, 이것은 초원의 강자인 늑대에 대한 유목민들의 토템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옛 수도 카라코룸 북쪽 40㎞ 지점에 있는 제2 돌궐제국 시대 퀼테긴비.


돌궐인들은 알타이산맥 부근에서 유목하면서 당시 몽골 초원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던 유연(柔然)에게 철이나 공납하는 연약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투멘(土門, 일명 부민, 만호장)이란 수장이 나타나면서 545년쯤부터 초원로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한다. 그러다가 불과 7년 후인 552년에 서위(西魏)와 협력해 유연을 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초원로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다. 이에 투멘은 자신을 ‘일릭 칸’(튀르크어로 ‘일릭’은 ‘나라를 건설한 사람’, ‘칸’은 ‘군주’란 뜻)으로 칭하고 제국의 중심지를 오르혼강 유역의 외튀켄에 정한다. 이것이 제1 돌궐제국의 출범이다.


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이원적 통치체제를 유지해 왔다. 즉 투멘은 제국의 동쪽을, 건국의 일등공신인 동생 이스테미는 서쪽을 각각 통치했다. 전성기는 제3대 목간(木杆) 칸 시대(553~572 재위)였다. 판도는 동으로 대흥안령 산맥과 요동만, 서로 카스피해와 흑해, 북으로 바이칼호, 남으로 고비 사막을 넘어 북중국까지 확대되었으니, 실로 유라시아를 아우른 세계적 제국이었다. 특히 인접한 중국과는 일찍이 흉노와 한나라 관계를 연상케 하는 부자관계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돌궐의 위협 앞에서 위나라를 계승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돌궐에 아부하면서 막대한 공물을 바친다. 북주는 매해 10만단의 비단을 헌상하고, 북제는 조공 때문에 국고가 바닥날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니, 목간 칸이 “남쪽에 효성이 지극한 두 아이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호언장담할 법도 하다. 흉노로부터 돌궐, 그리고 몽골에 이르기까지 북방 ‘미개인’들로부터 당한 중화주의의 수모는 이렇게 처참했다.


아르항가이 차이담 유적에서 출토된 퀠테긴의 두상(머리에 봉황 조각).


그러나 대체로 역대 유목국가들이 그러했듯 칸의 승계문제를 둘러싼 내홍으로 인해 동·서돌궐로 양분돼(583년) 사양길을 걷던 돌궐은 급기야 638년 당나라에 멸망당하고 만다. 50여년간 당의 이른바 ‘기미정책’(羈政策, 중국 역대 왕조가 굴레를 씌운 듯이 다른 민족에게 취한 간접통치책)에 묶여 시달림을 받게 된 돌궐족은 결코 굴하지 않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선다. 드디어 687년 정신적 고향인 외튀켄을 중심으로 남북 고비사막 전역을 망라한 제2 돌궐제국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 제2 돌궐제국은 2대 묵철(默) 칸에 이어 3대 빌게(毗伽) 칸 치세 때까지 주변의 9성 30여개 부족들을 거느린 강대한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친중국 일변도의 정책을 추구하는 빌게 칸에 대한 불만과 내분은 칸의 독살을 계기로 제국의 운명을 경각으로 치닫게 한다. 이러한 운명을 막아보려고 몇 명의 칸들이 나타났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위구르와 바스밀, 카를룩 등 부족들의 연합 반란으로 제국은 무너지고(745년) 그 땅에 새로운 유목제국 위구르제국이 일어섰다. 이로써 200년간(545~745) 초원의 길에서 피어난 돌궐제국은 그 길 위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역시 그 길을 통해 돌궐족과 그 문화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일원에까지 서전하며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다.


홉드시 향토박물관에 소장된 사슴돌(녹석).


돌궐은 북방 유라시아 유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남아 있는 몇 기의 돌궐 비문에 의해 확인되는데, 그 형태가 고대 게르 민족이 사용했던 룬 문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룬체문자’라고도 하지만, 양자간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셈계 아람문자나 고대 소그드 문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일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문자를 가지고 있으리만큼 발달한 사회문화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돌궐은 제1 제국 때부터 벌써 멀리 비잔틴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비잔틴 역사가 메난토로스가 전하는 비잔틴 사절단의 돌궐 방문기를 보면, 칸이 기거하는 천막은 한마디로 황금과 비단으로 차고 넘친다. 천막 내부는 화려한 비단으로 장식되고 침상이나 의자, 식기류는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오늘에 이르러 돌궐제국의 이 모든 실상은 그동안 발견된 몇 기의 비문에 의해 여실히 실증되고 있다. 종전에는 주로 중국 측의 문헌기록에 의해 각색됨으로써 많은 편단과 오류를 면할 수가 없었다. 19세기 말 러시아 지리학협회가 파견한 라돌프 탐험대에 의해 <몽골고대유적지도>(1892~99 기간 출간)가 만들어진 이래 일련의 연구에 의해 비문들이 해독됨으로써 제국의 실태가 점차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비는 제1 제국 시대의 부구트비와 제2 제국 시대의 퀼테긴비와 빌게 칸비, 톤육쿡비의 4기다.


홉드시 입구의 표지석(선돌).


수도 울란바토르의 서쪽 400㎞ 지점에 있는 해발 1700m의 아름다운 도시 체체를렉의 박물관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제1 제국 시대의 부구트비(높이 2.45m)는 본래 근교 부구트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건조 연대가 580년쯤으로 추정되는 이 비의 주인공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왕족 출신의 마한 테긴이다. 상면에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문자와 인도의 브라흐마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수(首, 보통 뿔 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비의 머리)에 어린아이가 늑대의 젖을 빨아먹는 낭생설화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제2 제국 시대의 중요한 비석들은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르혼강 주변의 호쇼 차이담 분지에 있기 때문에 그 비문들을 일괄해 ‘오르혼 비문’ 또는 ‘호쇼 차이담 비문’이라고도 한다. 오르혼 비문은 최초로 12세기 이슬람 사학자 주바이니에 의해 알려졌고, 1709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스트라흐렌베르그에 의해 유럽에 전해졌으며, 1893년 덴마크 언어학자 톰센이 그 난해한 돌궐문의 판독에 성공했다. 가장 이른 비는 725년쯤 오늘의 울란바토르 남쪽 50㎞쯤 지점에 있는 제국 재건의 일등공신인 톤육쿡의 비(남비와 북비)다. 다음으로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오르혼강 동안에 732년과 735년에 각각 세워진 퀼테긴(闕特勤)과 빌게 칸의 형제 비가 있다. 퀼테긴은 쿠데타로 숙부 칸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형 빌게에게 양보한 인물이다. 비문은 기본적으로 돌궐어로 쓰였지만, 퀼테긴비처럼 한문(당 현종의 추도글)으로 쓰인 것도 있다.


북부 국경도시 알탄불라크에 있는 돌사람(석인).


비석들의 주위에는 대체로 여러 가지 석인(石人)과 ‘바르바르’라고 하는 미가공 돌기둥이 배치되어 있다. ‘바르바르’는 주인공이 생전에 살상한 적을 상징하는데, 그 수가 100에서 1000까지(퀼테긴비는 무려 3㎞) 이른다. 퀼테긴 비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해가 뜨는 동방의 나라 ‘뵈클리’가 두 번 언급된다는 사실인데,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라는 것이다. 한 번은 조문 사절을 보내 온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당을 도와 원정한 나라라는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와 돌궐 간의 관계를 시사하는 비문으로 대단히 진중되는 기록이다.


여기 몽골 땅, 특히 서부지역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사슴돌(鹿石)과 돌사람(石人), 선돌(立石) 같은 돌 유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런 유물들은 북방 유라시아 여러 지역에서도 볼 수 있지만, 몽골에 가장 흔하다. 사슴돌이나 선돌은 우리네 장승, 돌사람은 제주도의 돌하르방 같아서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 중 사슴 문양 위주의 음각 사슴돌(몽골어로 보등쇼)은 사슴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데, 보통 2m 안팎의 높이에 폭 60~80㎝, 두께 약 20㎝로 문양이나 새김법이 다양해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홉드시 교외에 있는 선돌(입석).


이러한 비문들과 석조물들은 개화한 유목 돌궐족들의 신성한 세계관을 올곧게 증언하고 있다. 그들의 방위 관념은 동→서→남→북이 아니라, ‘탱그리’, 즉 ‘천신’을 상징하는 태양의 진행 방향을 따라 동→남→서→북이다. 외국 조문 사절의 명단 배열순을 보면 역시 정치적 친소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 방향 관념에 따른다. 그리고 비문에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군주를 일괄해 ‘칸’으로 호칭한다. 이것은 그들이야말로 천자는 오로지 하나뿐이라는 경직된 일원적 세계관을 벗어나 유연한 다원적 세계관의 소유자임을 웅변적으로 증명해준다. 이제 우리는 돌궐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들을 ‘잔인하고 미개한 문명의 파괴자’라고 호도하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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