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908172822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1) 말 잔등에 세워진 흉노제국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9.08 17:28 수정 : 2009.09.08 20:12


기마대군 앞세워 동·서문명 채찍질


훈 제국 왕 아틸라(406~453년) 상.


갑작스러운 항공편 결항으로 바얀올기에서 울란바토르로 직행하게 된 일정을 바꿔 다시 홉드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틀 전 지나올 때는 궂은 날씨였지만 오늘은 씻은 듯 개서 알타이 설산준령이 연출하는 신기한 장관을 오롯하게 감상할 수가 있다. 톨보 호숫가에 이르니 몽골 알타이에서 최고봉을 자랑하는 해발 4374m의 후이튼 산(우의봉)이 한눈에 안겨온다. 수백 갈래의 심산계곡을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는 만년 설산이다. 여덟 시간 넘게 돌길을 달려서 해가 뉘엿뉘엿 거릴 무렵 홉드에 도착했다. 난데없이 소나기가 한참 퍼붓더니 불그스레 물든 지평선에 쌍무지개가 아롱거린다. 보기 드문 길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날 밤 게르의 풀밭에 누워 바라본 저 무한 창공의 뭇별들은 유난히도 많고 반짝거린다.


다음날(7월7일) 아침 어렵사리 항공편을 얻어 홉드 공항에 나갔다. 비좁은 구내는 한마디로 북새통이다. 서로가 밀치고 당기면서 큰 짐은 창구로 마구 집어넣는가 하면 수하물마저도 일일이 무게를 달아 본다. 어찌된 영문인지 일행의 짐 무게가 6㎏나 초과했다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추가 지불을 요구한다. 출발을 몇 분 앞둔 터라 따져볼 경황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서양 여행객 일곱은 뒷문으로 짐을 들여보내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누군가가 이런 짓을 두고 ‘문명의 교차로에 선 인간의 몰염치’라고 꼬집었다. 아무튼 울란바토르로의 귀로에 오른 것만도 천만다행한 일이어서 다들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후 1시4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두 시간도 채 안 걸려 목적지 울란바토르에 착륙했다. 몽골의 대초원을 서부에서 중부까지 횡단 비행한 셈이다. 비행 고도가 별로 높지 않아 가끔씩 구름 사이로 대초원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순간 아득한 옛날부터 말갈기를 휘날리며 이 드넓은 초원을 종횡무진 질주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사실 이번 답사는 그러했던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길이다. 그래서 곳곳에서 이 땅을 주름잡던 스키타이며 돌궐인이며 몽골인들과의 해후(邂逅)는 그런 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 모두의 혈통적 시조격인, 적어도 그들 모두의 문명적 원형격인 흉노(匈奴)와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이제부터 그 만남을 시작할 것이다.


흉노는 오늘의 몽골 일원에 건국의 태를 묻은 첫 유목제국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장벽을 허물고 동서문명을 소통시킨 주인공이다. 흉노의 후예로 알려진 훈은 근 한 세기 동안 유럽을 석권하면서 유럽 고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장장 600~700년간 동서를 아우른 흉노의 활동이야말로 언필칭 범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 족적도 거룩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흉노에 관한 연구가 대단히 미흡하며 미제의 수수께끼도 많다. 그런가하면 오해도 적잖다. 여기에 더해 근간에는 우리나라에서 신라 김씨 왕족이 흉노의 후예라는 흉흉(흉흉)한 일설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비상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게 여러 모로 보아 흉노 연구는 그 절박성을 더해가고 있다.


흉노의 어원부터가 아직 미상이다. 일반적으로 ‘흉(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을 지닌 ‘훈(Hun 혹은 Qun)’의 음사로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으로 불렀다고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노(奴)’인데, 한인들이 그들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비어인 ‘종’이나 ‘노예’란 뜻의 ‘노’자를 첨가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중론이다. 과연 그럴까. 막강한 위력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형제 결맹에 의해 형으로 받들며, 심지어 투항해 온 남흉노인들에게 예를 갖춰 지방 왕후들보다 더 후대하던 한이 흉노를 향해 감히 ‘노’(종이나 노예)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흉노가 그런 비칭을 용서할 리 만무하다. 원대의 여러 극의 대사 중 몽골 어휘와 함께 나오는 ‘노(奴)’나 ‘아노(阿奴)’는 남편이나 기사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흉노’의 ‘노’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라는 해석이 있어 주목된다.


흉노의 황금조각상(기원전 2세기).


흉노의 종족적 기원에 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중국 황제가 북쪽으로 쫓아냈다는 ‘훈육(훈粥)’이 바로 흉노의 시조로서 하대에도 이런 이름으로 나타난다. 은대에는 ‘귀방(鬼方)’으로 은나라와 3년 동안 전쟁을 치른 바 있으며 서주 때까지도 ‘험윤(험)’이란 이름으로 자주 내침했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면 이상의 여러 가지 명칭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융(戎)’이나 ‘적(狄)’ 같은 이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고비 사막의 남북 지역이나 황하 유역에 산재해 중원의 화족(華族)들과 공생공영하기도 하고 상쟁하기도 하며, 또한 자체의 이합집산 과정을 겪는다. 그 결과 전국 시대 후기에 오면 집단들 간의 세력관계에 따라 국가권력을 갖춘 흉노나 부족연맹체인 동호(東胡) 같은 소수의 유목민족 집단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다. 이와 같이 흉노란 어떤 단일한 씨족이나 부족에게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전대의 여러 유목 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하고 계승한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 집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집합체 속에서 흉노라는 한 종족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흉노 자체도 휴도(休屠)와 우문(宇文)·독호(獨弧) 등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흉노의 종족적 구분, 즉 흉노가 투르크족과 몽골족 사이에 어느 족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도 갑론을박의 난제이지만 필자는 투르크족계라고 본다. 그 근거는 출토된 체질인류학적 특징에서 찾게 된다. 기원 전후로 추정되는 몽골 노인울라 고분군 제25호 무덤에서 나온 인물자수화에 표현된 흉노인의 모습은 이렇다.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빗고 이마가 넓으며 눈이 크고 짙은 콧수염에 얼굴은 엄숙하고 위용이 있어 보인다. 특이한 것은 안구는 검은색이나 동공은 남색 실로 수놓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몽골족은 동공이 검고 턱수염이 없으며 눈이 작은 반면에 투르크족은 동공이 남색이고 턱수염이 덥수룩하며 눈이 크다. 1950년대 중반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발굴대가 섬서성 객성장(客省庄)의 한 주나라 고분에서 많은 흉노 유물과 함께 문양이 이채로운 장방형 동제 부조 한 점을 발견했다. 묘주는 흉노의 사신이나 그 수행원으로 짐작된다. 이 부조에는 콧대가 높고 가랑이가 긴 바지를 입은 장발의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씨름을 벌이고 있다. 알다시피 투르크인은 심목고비(深目高鼻, 눈이 푹 들어가고 콧대가 높음)하고 장발인데 반해 몽골인은 코가 낮고 단발이므로 그 외형적 특징으로 보아 주인공인 이 흉노인들은 투르크족임을 일견에 식별할 수 있다.


몽골 모린 톨고이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흉노 토기(기원전 75~기원후 100년).


그밖에 종족의 발원지가 서로 다른 데서도 흉노는 몽골인종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다. 흉노의 최초 출현지는 음산(陰山, 현재의 내몽골을 중심으로 한 만리장성 일대) 지역이나 몽골족은 대흥안령 이동 지역이 본향이라서 그 발원지가 서로 다르다. 문자가 없어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한어로 음사한 수십 개의 흉노 글자를 살펴보면, 흉노어는 알타이어계 투르크어족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족의 연원이 다원적인 것만큼 언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 몽골어족에 속하는 어휘도 뒤섞여 있다.


흉노가 역사 무대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 4세기 전국 시대 말엽이나 제국의 면모를 갖춘 것은 기원전 3세기 초 ‘천자’를 자칭한 제1대 두만(頭曼, 만인을 거느리는 장) 선우(單于, 하늘의 아들)가 등극할 때부터다. 기원전 209년 선왕 두만을 시해하고 군주에 오른 모둔(冒頓)은 내정을 정비하고 30만 기마 대군으로 주변의 26개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병합해 강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 강역은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 호, 서로 아랄 해, 남으로 티베트 고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대로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세계적 대국이다. 백등산(白登山) 전투에서 숙적 한 고조 유방의 30만 대군을 포위 섬멸하고 그에게 굴욕적인 형제화약을 강요할 정도로 흉노는 일세를 풍미했다. 흉노의 이러한 기세는 효기선사(驍騎善射, 날쌔게 말을 타고 활을 잘 쏘는)하는 강력한 기마군단이 있어서 가능했다. 또한 흉노는 말 잔등에 가재를 싣고 다니는 전형적인 유목기마민이었다. “활이 느슨해서는 안 되고, 말의 굴레가 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일상생활 신조다. 그래서 흉노제국은 ‘말 잔등에 세워진 제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4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양길에 접어든다. 군신(軍臣) 선우 같은 무능한 군주의 등극과 내홍에 의한 동서 흉노와 남북 흉노의 분열, 그리고 한나라의 보복적 정벌, 선비의 내침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급속하게 국운이 기울어진다. 급기야 북흉노의 잔여세력은 기원후 1세기 말엽부터 서쪽으로 잠행(潛行)해 후일 서방의 훈족으로 재현된다. 한편 한에 투항한 남흉노는 간헐적으로 한에 반기를 들기는 했으나 3세기 초 한에 완전히 종속되고 만다. 이렇게 동방에서의 흉노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만다.

흉노의 적석목곽분과 말 순장 모습.


그러나 흉노 역사의 막은 일시 내려졌을 뿐 완전히 닫쳐진 것은 아니었다. 200년이란 잠행기, 즉 그들의 행적이 역사기록에 포착되지 않은 시기를 거쳐 ‘훈’이란 이름으로 유럽 땅에 기라성 같이 나타나 내려졌던 역사의 막을 다시 거둬 올리고 근 100년간 유럽의 무대를 활보한다. 이 훈의 종족 기원문제, 특히 흉노와의 종족관계 문제는 오랫동안 동서양 학계의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훈이 흉노계, 몽골계, 투르크-몽골-만주 혼합계, 게르만계, 카프카스계라는 등 다양한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나 지금은 언어의 친근성이나 음사의 유사성, 두 종족의 기원이나 거주지 및 활동에 관한 한적과 서양 문헌의 기록상 일치성 등을 근거로 훈-흉노 동족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흉노의 후예인 훈은 1세기 말엽에 알타이 산맥을 넘어 일리 방면으로 진출했으나 계속 추적해 온 선비에게 쫓겨 카자흐스탄 초원을 지나 3세기 말~4세기 초에 아랄 해와 카스피 해 부근에 이른다. 여기서 선주민인 알란 족을 정복하고 375년쯤에는 발라미르의 인솔하에 돈 강을 건너 유럽에 침입한다. 그들의 내침 앞에서 고트인들은 주변 게르만 민족들 속으로 떠밀려 들어감으로써 게르만 민족들로 하여금 로마 제국 경내로의 진입을 촉발했다. 이것이 이른바 ‘민족 대이동’이며, 그 결과 로마 제국은 분열(395년)되고 만다. 로마 제국의 분열을 계기로 훈의 대유럽 공략은 날개에 깃을 달게 된다. 특히 434년 ‘하느님의 채찍’이라고 하는 당년 32세의 아틸라가 등극하면서 유럽을 완전히 제압한 강력한 통일제국이 건립되었다. 영토는 남으로 발칸 반도와 북으로 발트 해안, 동으로 우랄 산맥과 서로 알프스에 이르는 광활한 유럽 대륙을 갈무리했으며, 치하의 종족 수만도 45여 족에 이르렀다. 헝가리의 파노니아에 정도하고 동서 지역에 각각 중심지를 설치해 통치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복속 민족들의 반란과 친선관계에 있던 서로마의 이탈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어 갔다. 아틸라는 서로마 원정에서 돌아온 후 47세를 일기로 급서(453년)한다. 그의 사후 아들 둘은 각각 독립 왕국을 세우려고 할거(割據)에 매달리다가 게르만족과 로마인들의 격전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로써 흉노-훈은 영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훈족의 침입과 그에 따른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유럽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와 더불어 훈의 서천과 훈제국의 건국은 사상 처음으로 동양문명이 서양에 전파되고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견이 싹트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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