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막판에 민감한 외교문서 수만 건 직권 파기됐다
국민일보 | 입력 2013.10.14 04:59

[쿠키 정치] 박근혜정부 출범을 앞둔 지난해 12월과 올 1월 외교부(당시 외교통상부)가 주요 비밀 외교 문서를 무더기로 파기한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또 지난해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 체결 추진 논란이 불거진 직후에도 수만 건이 삭제됐다. 이들 문서는 사전승인 절차 없이 임의로 직권 파기된 의혹이 있어 제2의 '사초(史草) 증발 파문'이 일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민주당 우상호 의원이 외교부의 '보안문서 현황'을 분석한 결과 외교부는 이명박정부 말기인 지난해 12월 비밀문서 1만1822건을 파기했다. 올해 1월에도 2만4942건을 폐기했다. 매월 평균 수백 건에서 많아야 수천 건에 머물렀던 파기 건수가 정권교체 시기에 10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부조직 개편에 따른 통상기능 이관에 관한 문서가 대거 삭제됐을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지만 부처 간 이첩(이관)이 아닌 파기를 했다면 더 큰 문제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8월에도 비밀문서 1만3202건이 대거 파기됐다. 이 시기는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직후여서 외교부가 '국가 간의 협상 등 기밀 유지'를 이유로 비밀문서를 직권 파기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현재 외교부는 파기된 비밀문서 목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외교부는 지난해 1월부터 국가정보원 시스템에 의해 비밀문서를 관리하고 있다. 현행법상 외교부가 6개월마다 해당 관리 현황을 국정원에 송부토록 돼 있다. 집계 내역에는 비밀문서 생산 건수는 물론 파기, 이첩, 등급변경, 보호기간 만료 등으로 분류된 해제 건수가 포함된다. 이 중 파기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 외교부가 보호·보존 기간이 종료되지 않은 문서를 직권 파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파기 문서는 보관돼 있는 문건 원본의 복사본이 상당수"라며 "파기된 문서는 정상 파기이거나 집계 오류"라고 해명했다. 외교부는 또 "지난해 8월 파기 외교문서가 많은 것은 외교부 본부의 공관기록물관리점검팀이 당시 주러시아 대사관에 출장가 대사관이 임의로 보관 중인, 보호기간이 경과한 비밀문서에 대해 일체 점검을 실시하고 일괄 폐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외교부가 절차를 어긴 채 비밀문서를 삭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내부 보안업무규정 시행세칙 제21조(비밀직권파기)에 따르면 비밀문서는 생산 당시 보호·보존 기간을 명시하도록 돼 있다. 기간을 채우지 않고 파기할 경우 보안담당관의 사전 결재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 의원이 외교부에 '보안담당관 사전 결재에 의해 파기된 비밀문서가 있느냐'고 질의했으나 외교부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우 의원은 "외교부가 비밀문서의 보호·보존기간 없이 임의로 파기하는 것은 국가의 공공기록물을 취급하는 원칙에 반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민감한 시기에 이뤄진 무더기 파기, 왜=지난해 초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비밀 외교문서가 대량 파기된 것은 크게 두 번이다.

우선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 졸속·밀실 추진 논란이 터진 직후인 지난해 8월 1만3202건이 파기됐다. 이명박정부는 지난해 6월 말 국무회의에서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밀실 처리했고, 이 사실이 들통나면서 역풍이 불었다. 김태효 대통령 대외전략기획관이 사퇴하고,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사과했다. 국회 외통위 관계자는 13일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 밀실 논란이 터졌을 당시 국회에서 협정 논의 과정 등에 관한 각종 자료를 요구했으나 외교부는 협상 중임을 이유로 대부분의 자료 제출을 거절했다"며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 관련 자료들이 대거 직권 파기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사이에는 무려 3만6764건이 파기됐다. 특히 박근혜정부 인수위가 출범한 1월에는 2만4942건이 파기됐다. 외교부가 지난해 1월 비밀문서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월간 최다 파기 분량이다. 새 정부 출범에 앞서 민감한 외교문서들이 의도적으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교해 통일부가 한 해 파기한 비밀문서는 1000건이 안 된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집계상 오류로 보인다"고 해명하기도 했으나 이날까지 새로운 통계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심각한 직권 파기 실태=특정 시점에 대규모 외교문서가 파기된 것도 문제지만 다수의 문서들이 내부 보안규정을 무시한 채 파기된 점도 향후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비밀문서의 경우 최초 생산자가 예고문에 해당 문서의 비밀 보호기간 및 보존기간 등을 명시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올해 6월까지 '보호기간 만료'로 비밀 해제된 것은 405건에 불과했다. 반면 외교부가 파기한 문서는 모두 6만5904건이다. 외교부가 비밀 보호기간 등을 지키지 않고 서둘러 직권 파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더 이상 보호할 필요가 없다면 보존기간까지는 문서를 보관해야 하지만 대부분 파기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직권 파기된 문서의 상당수도 사전승인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은 의혹이 제기된다. 외교부 본부의 경우 보안담당관인 운영지원과장의 승인을 받지 않고 직권 파기됐다.

민주당 우상호 의원실 관계자는 "재외공관은 참사관급인 분임보안담당관의 사전 승인이 있어야 직권 파기할 수 있다"며 "그러나 외교부가 재외공관 현황을 따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비밀문서에 관한 주요 사안이 있을 경우 외교부 제1차관 주재로 열리게 돼 있는 보안심의위원회는 지난해 이후 단 한 차례도 열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엄기영 김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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