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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을 까발려 주마> 5탄 유리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눈나라 총리 2007-01-13 01:02
추모성왕과 유리명왕은 아무리 부자지간이라지만 솔직히 이상하게 그 행동이 일치되는 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일단 첫째 활을 잘 쏘는 무사영웅이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술을 쓸 줄 안다는 점
(추모성왕은 송양과의 싸움에서 비를 내렸다. 유리명왕은 자신이 추모성왕의 아들을 인정하기 위해서 왕궁에서 하늘로 잠시 날아올랐다. 게다가 유리명왕이 만난 사람들중에는 커다랑이에 날개(?)까지 달려있으니 말 다했다. 유리명왕은 추모성왕의 신화시대와 대무신왕의 역사시대가 중첩되는 왕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리명왕이 건국영웅과 수성군주에 중간점이라는 증거다)
둘째 북부여를 탈출하여 딴 길로 가지 않고 졸본으로 갔다는 점. (즉 처음에 기반이 없었다는 점)
셋째 동료 세 명을 이끌고 왔다. 추모는 오이, 마려, 협보, 유리는 옥지, 구추, 도주
(덧붙인다면 부여내 이탈세력을 이끌고 왔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될 덕목을 가진 건국영웅에 기질이 보인다.)
넷째 졸본에 도착하여서 기존의 토착세력을 상당히 수월하게 접수했다는 점이다.
추모는 좀 예외조항이 있겠지만 연타발의 큰 도움으로 수월하게 고구려 건국을 했다는 점이다. 유리는 왕실에 왕통도 바로 서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와서 거저먹기로 태자가 되고 몇 개월 되어서 왕에 올랐다는 점, 게다가 추모는 남하하자마자 졸본의 실력자 연타발의 딸과 결혼했다면 유리명왕도 오자마자 졸본의 실력자 송양의 딸과 결혼 했다는 점도 있다. (즉 조건과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는 점이다.)
하지만 추모성왕은 건국자이고 유리명왕도 건국자라면 좀 이상하다. 고구려 2대 태왕인 유리명왕은 수성시대의 군주다. 국가가 제일 위험한 병목시기를 넘기는 군주라면 좀 더 현실적인 기록이 남아야 되는데 유리명왕은 약간 이단자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추모는 너무 일찍 죽은 감이 있다. 그 나이 40세였다.
한민족의 선조 국가 창업군주중에서 기록이 남은 분 중 최단명이다. 고구려왕들의 예상 평균수명이 55세정도인 것을 생각한다면 강대국 고구려의 활동적인 위대한 건국자치고는 너무 일찍 죽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출처: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 김용만 출판사 바다출판사)
여기서 한 드라마를 시청하겠다. 불멸의 윤필동 아니 불멸의 이순신이시다.
정철: 각하 하여간 나라도 뒤숭숭하고 고이즈미과 동물인 도요또미가 배달시키면 되는 중국집 가는 길 좀 빌려달라고 지랄합니다. 이왕 각하춘추도 40이신데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김춘추처럼 평양을 같다온 이후X정보부장 아니 광해로...
선조: 나 죽으면 좋다는 것이구나? 삼선개현, 유신한지도 아니 이게 아니지 하여간 너 나도 노무X처럼 레임덕은 없어! 임기 끝날 때까지 할 말하고 살 거야? 수경사령관 윤.. 아니 이 정철아저씨야! 가뜩이나 너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다. 이 견자야! 당장 보안사령관 강... 아니 도승지 저놈 원지 부처야
정철: 각하? 한동안 똥강아지처럼 저를 좋아하시지 않았습니까? 동인을 작살낼 때 뒷배를 봐 주실 때는 ...
선조: 네가 너 예쁘다가하니까 머리끝까지 올라갈래! 감히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후계자를 논해 좋았어. 외적이 쳐들어오건 말건 서인 때려잡고 나중에 동인 때려잡고 이순신도 때려잡고 그 다음에 백성들 때려잡을 거야! 하하하하하
뭐 더 보고 싶지만 여기까지 보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40이라는 숫자다. 사실 지금이야 환갑 넘는 것은 예삿일이지만 그 당시는 톱뉴스감이니 거의 40~50대에 사람들이 이승을 떠난 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신료들이 후계자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타이밍이 바로 이 시기이었다. 그리니까 당시 고구려도 바로 이런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맥을 보면 적어도 40세 이전에는 태자 책봉이 확실하게 없었다.
게다가 비류와 온조의 고구려 탈출기록을 보면 분명히 당시 고구려에 심각한 문제는 추모성왕의 후계자 문제였다. 일단 사람들 상식으로 생각하기로는 분명히 추모성왕의 핏줄을 이은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후일이지만 신라에서 사위가 후계자를 잇고 왕위를 외가로 돌려주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관례였다. 추모는 사실 연타발 가문에 큰 은혜를 입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즉 당시 시대관례상 우태와 소서노사이에 태어난 비류나 온조(추모성왕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를 책봉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에 말했듯이 유리명왕설화는 중국에 칼장인이야기를 표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 진행을 위해서 일단 유리명왕이 추모성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나중에 정리를 하겠다.
이 때 국제정세는 서서히 고구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한은 외척들의 난동으로 사실상 붕괴된 상황이었는데(처음부터 전한이 고조선일대를 지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1편에 소개했다.) 문제는 북쪽 북부여였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추모 아빠인 금와가 서서히 늙어가고 초기 고구려에 최대숙적 대소가 정권을 접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강경파에 부여집권은 고구려 국내정세를 심각하게 흔들어 놓았다. 당시 초기였던 고구려는 부여에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아니 형제끼리 왜 이러시나?)
당시 부여내에는 추모의 잔존세력이 적지 않았다. 일단 추모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추모의 첫 번째 왕비인 예씨부인과 유리였다. 그런데 유화부인이 서기했다. (기원전 24년 암살이 아니다.) 당시는 금와가 생존한 상태로 보이는데 고구려에 추모는 사신을 급파하여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지만 사실상 유화부인 서거는 추모와 관련된 사람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했다. 시시각각 대권을 장악하는 대소는 자신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고 최악에 경우 인질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도 차기 태자 책봉에 논란이 증폭되자 예씨부인과 유리는 지금 못 내려가면 부여와 고구려 양쪽에서 외면 받을 가능성을 느끼고 북부여를 탈출했다. (기원전 19년)
유리는 졸본에 도착하여 자신의 아버지(?)인 추모에게 아들이라는 증표를 내줌으로써 고조선 멸망 이후 초분열상태에서 전쟁을 계속하던 열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우리 민족에 최전성기인 삼국시대는 개막되었다. 사실 이때 삼국시대의 두 주역인 고구려와 백제가 실질적인 건국과 동시에 대분열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소서노, 비류, 온조에 연타발 가문은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에 모든 것을 바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고 완전히 새 됐어!
(아 저것이 전설에 학춤?)
이로써 해유리는 고구려 1대 태자로 책봉된다. (기원전 19년 4월)
그 다음 고구려 1대 고추모가 의문에 죽음을 한다. (기원전 19년 9월)
추모의 급서와 유리명왕의 즉위로 위기감을 느낀 비류와 온조는 탈출을 결심하고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유리명왕 즉위 이후)
자 이것이 유리명왕의 즉위과정이다.
뭐 이야기가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이로써 해유리는 고구려 1대 태자로 책봉된다. (기원전 19년 4월)
그 다음 고구려 1대 고추모가 의문에 죽음을 한다. (기원전 19년 9월)
여기다. 일단 부자가 성이 다르다. 지금 내가 아버지에게 성씨를 바꾸고 싶다고 말하면 아버지에 혼날 것이다. 하물며 왕조국가에서 성이 다르다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더 웃긴 것은 고추모의 사망일이다. 유리명왕이 내려오자마자 태자 책봉하고 바로 죽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다. 추모가 죽을 때가 되었다면 말이 되겠지만 다음 증거를 보면 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보면 추모성왕의 최후가 기록 되어있다.
추모성왕이 왕위에 있는 것이 즐거워하지 않아서 용을 타고 승천하니 유리명왕이 명을 받들어 왕이 되었다.
일단 서거 이유는 없는 상태에서 말년에 왕위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시 말년 추모성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인데 기원전 19년경에 일이 이라면 유리의 출현, 태자책봉, 비류와 온조가 완전히 새가 됨, 이 정도이다.
그렇다면 추모는 유리가 나타난 것이 싫었던 것 아닐까? 그 이전에 유리가 추모의 아들이 아니라 전임지도자를 끌어내리고 새로이 권력을 움켜진 신세력이 아니었을까?
유리명왕은 수성시대를 이끈 군주 치고는 너무나도 창업군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날아다니는 것은 기본이니까. 당시 추모성왕은 신흥지도자 유리명왕의 출현에 일격을 당하고 이성계처럼 폐위된 것이 아닐까? 저번에 금와왕당시 부여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가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했다. 우태나 추모, 유리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대규모 집단을 이끌고 내려오던 시기였다. 부여에 왕족으로 추측되는 유리도 추모와 같이 대소집권직전에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겨우 대소 집권 이후에 상당히 안정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구려에 살지도 않았던 북부여 이탈세력 유리가 무려 4개월만에 권력탈취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연타발가문,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있었을 것이다.
일단 북부여계세력들인 오이, 마려, 협보
구 졸본에 중심인물 송양일파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북부여계세력과 졸본세력의 연합세력이었다. 만약 졸본세력이 대권을 잡는다면 북부여계는 순식간에 몰릴 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급한 것은 졸본세력 송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졸본에 1인자위치에 있었지만 추모를 동원해서 연타발, 소서노일파에게 격파 당했다. 그런데 만약 비류나 온조가 왕위를 잇는다면 자신은 연타발에게 구 졸본세력에서 완전히 배재 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즉시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겠다는 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리명왕 초기는 왕권이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일단 소서노세력은 힘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떠났다. 그 후 몇 년 뒤에는 사랑하는 한족출신 치희왕후가 내쫓긴다. 자신의 왕후인 화희, 골천가문의 강력한 힘에 유리명왕은 치희를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도 못 지키니 왕신세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조가나 읊을 뿐이었다.) 전임자(아버지?)때 노신(오이, 마려, 협보, 부분노)들은 버젓이 살아있었고 유리명왕때는 기존의 권력이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유리명왕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심복들인 옥지, 구추, 도주는 한번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다. (모두가 유리명왕의 심복으로 추모성왕을 몰아내고 유리명왕을 옹립하는 데 일조했겠지만 뭐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유리명왕때도 추모성왕때 노신인 오이, 마려, 협보가 대활약하는 것을 보면 기이한 현상이다.) 아마 유리명왕은 초기에는 이방원처럼 ‘용에 눈물’을 찍고 싶어도 못 찍었을 것이다.
유리명왕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는 거의 선비족정벌(즉위 11년)과 국내성천도(즉위 22년)이후로 보인다. 이때부터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데 이 때 친아들 해명태자가 죽임을 당하고 노신 협보가 추방당한다. 즉 즉위 초 유리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다기보다는 공신들의 힘에 의해서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왕통이 서지 않은 창업초기였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왕의 후계자가 귀족회의에 선출로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태조왕, 신대왕, 미천태왕이다. 태조왕의 경우는 당시 고구려왕족이었던 해씨왕족도 아니었다. 아무리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해도 여러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국가에서 추모성왕은 귀족들의 지지 없이는 한순간에 몰락할 위험한 상태였다.
결국 추모는 북부여계 귀족, 송양, 골천귀족들의 집단적인 후계자 유리 지목 요청에 무릎을 꿇고 레임덕(?)에 시달리다가 집권준비를 완료한 유리세력에 의해서 의문의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추모성왕 암살설로 이어진다. 이유는 추모는 소서노의 결혼으로 사실상 부여와 졸본 연타발을 이어주는 고리가 되어 있었다. 부여, 송양귀족들은 그가 빨리 죽을수록 좋은 일이었다. 사실 추모성왕이 죽은 후에야 소서노파는 패배를 인정하고 고구려에서 이탈 백제를 건국한다. 재미있는 것은 부여세력들중에는 추모와 같이 내려온 오이, 마려, 협보가 있었다는 점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동지도 배신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즉위 후 유리명왕은 전임자인 추모성왕의 흔적 지우기에 열을 올린다. 일단 왕족의 성씨부터 고씨에서 해씨로 바꾸었다. 게다가 졸본에서 골천으로 거점을 옮겼다가 국내성을 아주 천도한다. 유리명왕부터 모본왕때까지 해씨왕조시대에는 시조묘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다. 추모에 대해서는 모른 채 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시조묘를 참배한 첫 왕은 신대왕 즉 유리명왕의 해씨왕조가 무너지고 고씨왕조가 부흥된 이후이었다. (고구려왕계와 추모성왕 조작설은 분량문제로 다음 편에 소개하겠다.)
유리명왕의 즉위는 엉뚱하게 200년 찬란한 역사를 이었고 현토군을 몰아내고 아들 고구려를 낳았던 친어머니 졸본세력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역사는 결국 고구려의 어머니를 북부여만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끝내고 싶었지만 사실 졸본으로 시작했으니 졸본의 최후까지는 쓰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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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나라 총리 2007-01-13 01:02
추모성왕과 유리명왕은 아무리 부자지간이라지만 솔직히 이상하게 그 행동이 일치되는 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일단 첫째 활을 잘 쏘는 무사영웅이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술을 쓸 줄 안다는 점
(추모성왕은 송양과의 싸움에서 비를 내렸다. 유리명왕은 자신이 추모성왕의 아들을 인정하기 위해서 왕궁에서 하늘로 잠시 날아올랐다. 게다가 유리명왕이 만난 사람들중에는 커다랑이에 날개(?)까지 달려있으니 말 다했다. 유리명왕은 추모성왕의 신화시대와 대무신왕의 역사시대가 중첩되는 왕으로 보이는데 이는 유리명왕이 건국영웅과 수성군주에 중간점이라는 증거다)
둘째 북부여를 탈출하여 딴 길로 가지 않고 졸본으로 갔다는 점. (즉 처음에 기반이 없었다는 점)
셋째 동료 세 명을 이끌고 왔다. 추모는 오이, 마려, 협보, 유리는 옥지, 구추, 도주
(덧붙인다면 부여내 이탈세력을 이끌고 왔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될 덕목을 가진 건국영웅에 기질이 보인다.)
넷째 졸본에 도착하여서 기존의 토착세력을 상당히 수월하게 접수했다는 점이다.
추모는 좀 예외조항이 있겠지만 연타발의 큰 도움으로 수월하게 고구려 건국을 했다는 점이다. 유리는 왕실에 왕통도 바로 서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와서 거저먹기로 태자가 되고 몇 개월 되어서 왕에 올랐다는 점, 게다가 추모는 남하하자마자 졸본의 실력자 연타발의 딸과 결혼했다면 유리명왕도 오자마자 졸본의 실력자 송양의 딸과 결혼 했다는 점도 있다. (즉 조건과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는 점이다.)
하지만 추모성왕은 건국자이고 유리명왕도 건국자라면 좀 이상하다. 고구려 2대 태왕인 유리명왕은 수성시대의 군주다. 국가가 제일 위험한 병목시기를 넘기는 군주라면 좀 더 현실적인 기록이 남아야 되는데 유리명왕은 약간 이단자의 모습이 보인다.
사실 추모는 너무 일찍 죽은 감이 있다. 그 나이 40세였다.
한민족의 선조 국가 창업군주중에서 기록이 남은 분 중 최단명이다. 고구려왕들의 예상 평균수명이 55세정도인 것을 생각한다면 강대국 고구려의 활동적인 위대한 건국자치고는 너무 일찍 죽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출처: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 김용만 출판사 바다출판사)
여기서 한 드라마를 시청하겠다. 불멸의 윤필동 아니 불멸의 이순신이시다.
정철: 각하 하여간 나라도 뒤숭숭하고 고이즈미과 동물인 도요또미가 배달시키면 되는 중국집 가는 길 좀 빌려달라고 지랄합니다. 이왕 각하춘추도 40이신데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김춘추처럼 평양을 같다온 이후X정보부장 아니 광해로...
선조: 나 죽으면 좋다는 것이구나? 삼선개현, 유신한지도 아니 이게 아니지 하여간 너 나도 노무X처럼 레임덕은 없어! 임기 끝날 때까지 할 말하고 살 거야? 수경사령관 윤.. 아니 이 정철아저씨야! 가뜩이나 너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다. 이 견자야! 당장 보안사령관 강... 아니 도승지 저놈 원지 부처야
정철: 각하? 한동안 똥강아지처럼 저를 좋아하시지 않았습니까? 동인을 작살낼 때 뒷배를 봐 주실 때는 ...
선조: 네가 너 예쁘다가하니까 머리끝까지 올라갈래! 감히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후계자를 논해 좋았어. 외적이 쳐들어오건 말건 서인 때려잡고 나중에 동인 때려잡고 이순신도 때려잡고 그 다음에 백성들 때려잡을 거야! 하하하하하
뭐 더 보고 싶지만 여기까지 보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40이라는 숫자다. 사실 지금이야 환갑 넘는 것은 예삿일이지만 그 당시는 톱뉴스감이니 거의 40~50대에 사람들이 이승을 떠난 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신료들이 후계자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타이밍이 바로 이 시기이었다. 그리니까 당시 고구려도 바로 이런 문제에 봉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맥을 보면 적어도 40세 이전에는 태자 책봉이 확실하게 없었다.
게다가 비류와 온조의 고구려 탈출기록을 보면 분명히 당시 고구려에 심각한 문제는 추모성왕의 후계자 문제였다. 일단 사람들 상식으로 생각하기로는 분명히 추모성왕의 핏줄을 이은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후일이지만 신라에서 사위가 후계자를 잇고 왕위를 외가로 돌려주는 일이 있었다. 그것이 관례였다. 추모는 사실 연타발 가문에 큰 은혜를 입고 고구려를 건국했다. 즉 당시 시대관례상 우태와 소서노사이에 태어난 비류나 온조(추모성왕의 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를 책봉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에 말했듯이 유리명왕설화는 중국에 칼장인이야기를 표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 진행을 위해서 일단 유리명왕이 추모성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나중에 정리를 하겠다.
이 때 국제정세는 서서히 고구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한은 외척들의 난동으로 사실상 붕괴된 상황이었는데(처음부터 전한이 고조선일대를 지배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은 1편에 소개했다.) 문제는 북쪽 북부여였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추모 아빠인 금와가 서서히 늙어가고 초기 고구려에 최대숙적 대소가 정권을 접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강경파에 부여집권은 고구려 국내정세를 심각하게 흔들어 놓았다. 당시 초기였던 고구려는 부여에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아니 형제끼리 왜 이러시나?)
당시 부여내에는 추모의 잔존세력이 적지 않았다. 일단 추모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추모의 첫 번째 왕비인 예씨부인과 유리였다. 그런데 유화부인이 서기했다. (기원전 24년 암살이 아니다.) 당시는 금와가 생존한 상태로 보이는데 고구려에 추모는 사신을 급파하여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지만 사실상 유화부인 서거는 추모와 관련된 사람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했다. 시시각각 대권을 장악하는 대소는 자신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고 최악에 경우 인질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도 차기 태자 책봉에 논란이 증폭되자 예씨부인과 유리는 지금 못 내려가면 부여와 고구려 양쪽에서 외면 받을 가능성을 느끼고 북부여를 탈출했다. (기원전 19년)
유리는 졸본에 도착하여 자신의 아버지(?)인 추모에게 아들이라는 증표를 내줌으로써 고조선 멸망 이후 초분열상태에서 전쟁을 계속하던 열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우리 민족에 최전성기인 삼국시대는 개막되었다. 사실 이때 삼국시대의 두 주역인 고구려와 백제가 실질적인 건국과 동시에 대분열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소서노, 비류, 온조에 연타발 가문은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에 모든 것을 바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고 완전히 새 됐어!
(아 저것이 전설에 학춤?)
이로써 해유리는 고구려 1대 태자로 책봉된다. (기원전 19년 4월)
그 다음 고구려 1대 고추모가 의문에 죽음을 한다. (기원전 19년 9월)
추모의 급서와 유리명왕의 즉위로 위기감을 느낀 비류와 온조는 탈출을 결심하고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한다. (유리명왕 즉위 이후)
자 이것이 유리명왕의 즉위과정이다.
뭐 이야기가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이로써 해유리는 고구려 1대 태자로 책봉된다. (기원전 19년 4월)
그 다음 고구려 1대 고추모가 의문에 죽음을 한다. (기원전 19년 9월)
여기다. 일단 부자가 성이 다르다. 지금 내가 아버지에게 성씨를 바꾸고 싶다고 말하면 아버지에 혼날 것이다. 하물며 왕조국가에서 성이 다르다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더 웃긴 것은 고추모의 사망일이다. 유리명왕이 내려오자마자 태자 책봉하고 바로 죽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다. 추모가 죽을 때가 되었다면 말이 되겠지만 다음 증거를 보면 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보면 추모성왕의 최후가 기록 되어있다.
추모성왕이 왕위에 있는 것이 즐거워하지 않아서 용을 타고 승천하니 유리명왕이 명을 받들어 왕이 되었다.
일단 서거 이유는 없는 상태에서 말년에 왕위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당시 말년 추모성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인데 기원전 19년경에 일이 이라면 유리의 출현, 태자책봉, 비류와 온조가 완전히 새가 됨, 이 정도이다.
그렇다면 추모는 유리가 나타난 것이 싫었던 것 아닐까? 그 이전에 유리가 추모의 아들이 아니라 전임지도자를 끌어내리고 새로이 권력을 움켜진 신세력이 아니었을까?
유리명왕은 수성시대를 이끈 군주 치고는 너무나도 창업군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날아다니는 것은 기본이니까. 당시 추모성왕은 신흥지도자 유리명왕의 출현에 일격을 당하고 이성계처럼 폐위된 것이 아닐까? 저번에 금와왕당시 부여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가 아니었을까라는 말을 했다. 우태나 추모, 유리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대규모 집단을 이끌고 내려오던 시기였다. 부여에 왕족으로 추측되는 유리도 추모와 같이 대소집권직전에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겨우 대소 집권 이후에 상당히 안정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구려에 살지도 않았던 북부여 이탈세력 유리가 무려 4개월만에 권력탈취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연타발가문,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있었을 것이다.
일단 북부여계세력들인 오이, 마려, 협보
구 졸본에 중심인물 송양일파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북부여계세력과 졸본세력의 연합세력이었다. 만약 졸본세력이 대권을 잡는다면 북부여계는 순식간에 몰릴 수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급한 것은 졸본세력 송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졸본에 1인자위치에 있었지만 추모를 동원해서 연타발, 소서노일파에게 격파 당했다. 그런데 만약 비류나 온조가 왕위를 잇는다면 자신은 연타발에게 구 졸본세력에서 완전히 배재 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즉시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겠다는 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창업 동지인 오이, 마려, 협보/ 군부에 부분노/ 졸본의 실력자 송양/ 고구려 유리명왕 초기 외척세력인 골천세력들은 북부여에서 급히 내려온 신세력인 유리명왕을 지지했던 것은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다면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 소서노파(비류, 온조)이다.
사실 유리명왕 초기는 왕권이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일단 소서노세력은 힘들이지 않고 고구려를 떠났다. 그 후 몇 년 뒤에는 사랑하는 한족출신 치희왕후가 내쫓긴다. 자신의 왕후인 화희, 골천가문의 강력한 힘에 유리명왕은 치희를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도 못 지키니 왕신세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조가나 읊을 뿐이었다.) 전임자(아버지?)때 노신(오이, 마려, 협보, 부분노)들은 버젓이 살아있었고 유리명왕때는 기존의 권력이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유리명왕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심복들인 옥지, 구추, 도주는 한번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다. (모두가 유리명왕의 심복으로 추모성왕을 몰아내고 유리명왕을 옹립하는 데 일조했겠지만 뭐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유리명왕때도 추모성왕때 노신인 오이, 마려, 협보가 대활약하는 것을 보면 기이한 현상이다.) 아마 유리명왕은 초기에는 이방원처럼 ‘용에 눈물’을 찍고 싶어도 못 찍었을 것이다.
유리명왕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는 거의 선비족정벌(즉위 11년)과 국내성천도(즉위 22년)이후로 보인다. 이때부터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데 이 때 친아들 해명태자가 죽임을 당하고 노신 협보가 추방당한다. 즉 즉위 초 유리 스스로의 힘으로 올랐다기보다는 공신들의 힘에 의해서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왕통이 서지 않은 창업초기였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왕의 후계자가 귀족회의에 선출로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태조왕, 신대왕, 미천태왕이다. 태조왕의 경우는 당시 고구려왕족이었던 해씨왕족도 아니었다. 아무리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해도 여러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국가에서 추모성왕은 귀족들의 지지 없이는 한순간에 몰락할 위험한 상태였다.
결국 추모는 북부여계 귀족, 송양, 골천귀족들의 집단적인 후계자 유리 지목 요청에 무릎을 꿇고 레임덕(?)에 시달리다가 집권준비를 완료한 유리세력에 의해서 의문의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추모성왕 암살설로 이어진다. 이유는 추모는 소서노의 결혼으로 사실상 부여와 졸본 연타발을 이어주는 고리가 되어 있었다. 부여, 송양귀족들은 그가 빨리 죽을수록 좋은 일이었다. 사실 추모성왕이 죽은 후에야 소서노파는 패배를 인정하고 고구려에서 이탈 백제를 건국한다. 재미있는 것은 부여세력들중에는 추모와 같이 내려온 오이, 마려, 협보가 있었다는 점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동지도 배신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즉위 후 유리명왕은 전임자인 추모성왕의 흔적 지우기에 열을 올린다. 일단 왕족의 성씨부터 고씨에서 해씨로 바꾸었다. 게다가 졸본에서 골천으로 거점을 옮겼다가 국내성을 아주 천도한다. 유리명왕부터 모본왕때까지 해씨왕조시대에는 시조묘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없다. 추모에 대해서는 모른 채 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시조묘를 참배한 첫 왕은 신대왕 즉 유리명왕의 해씨왕조가 무너지고 고씨왕조가 부흥된 이후이었다. (고구려왕계와 추모성왕 조작설은 분량문제로 다음 편에 소개하겠다.)
다음 편은 마지막편인 6편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편이다.
유리명왕의 즉위는 엉뚱하게 200년 찬란한 역사를 이었고 현토군을 몰아내고 아들 고구려를 낳았던 친어머니 졸본세력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역사는 결국 고구려의 어머니를 북부여만으로 기록했다.
여기서 끝내고 싶었지만 사실 졸본으로 시작했으니 졸본의 최후까지는 쓰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편에 주인공은 유리명왕, 제일 조연은 유리명왕의 아들 해명태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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