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mediamob.co.kr/yukikws/frmView.aspx?id=129634
<주몽을 까발려 주마> 6편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
눈나라 총리 2007-01-21 00:55
이번 편에는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편이다.
고구려 왕계
그 전에 이야기 정리상 고구려 왕통에 대해서 정리를 하겠다.
고구려는 백제처럼 두 개왕조가 공존했는데 유리명왕의 해씨왕조(비류나부)와 태조왕의 고씨왕조(계루부)이다.
문제는 과연 추모성왕은 어느 쪽이었느냐가 문제이다. 그런데 사실 추모성왕은 심증적으로 고구려에서 최초로 내쫒긴 국왕이다. (더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차라리 전편[5편] 다시 보시라)
부여성씨는 해씨로 보이는 데 금와의 아들 추모도 처음에는 해씨일 것이다. (그래서 해씨이고 부여에서 귀족이상이었던 유리명왕이 추모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인척관계였을 가능성은 높다.) 그런데 사실 추모성왕과 유리명왕은 부여에 왕족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세력이다. 추모성왕은 소서노일파를 지지를 받고 있었고 유리명왕은 오이, 마려, 협보같은 북부여계세력와 송양세력 골천세력에 지지를 받았다. 자 그렇다면 추모성왕은 부여왕족출신임에도 사실상 고씨왕조의 조상일수도 있다. 해씨였던 추모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씨성을 만든 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계루부세력이 자칭 후계자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다. 추모성왕 계열이 유리명왕의 해씨왕조에게 숙청당해 씨가 마른 상태였다고 치자. 그런 뒤에 해씨왕조를 무너지고 난후 계루부의 쿠데타(?)세력이 해씨왕조에게 지워진 추모성왕의 핏줄을 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사서에는 고구려왕조가 한번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만일 추모성왕의 기록까지 포함하면 두 번 교체되었다고 기록해야 되었지만 사실 고구려건국기이었을때 멸망기였던 전한은 대외적으로 정보수집을 하지 못하던 때였으니 기록이 못 했을 수도 있다.
결국 중국사서에 왕조교체는 해씨왕조의 모본왕이 피살당하고 계루부가 태조왕이 옹립되었을 때 기록일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게 추모성왕 조작설이다. 추모성왕은 사실 없는 존재이고 태조왕에 계루부정권이 만든 가공에 왕이거나 잠시 동안에 졸본의 지배자였을 뿐이고 사실상 고구려의 건국자는 유리명왕이라는 것이다. 사실 추모와 유리는 초반기에는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행보가 똑같다.
광개토태왕릉비
고구려에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광개토태왕이 추모성왕에 17대손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12대손이다. 많은 의심을 사고 있는 태조왕과 차대왕을 부자지간으로 보더라도 많게는 4명의 왕이나 왕손이 역사기록에서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무엇인가 왕계보에 대대적인 수술이 있었다는 이유가 된다.
고구려 역사를 천년으로 보는 대조영 (사진 : 보장왕)
북한학계나 한국에 일부에서는 이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천년이라고 하는 데 추모성왕부터 신대왕 때까지의 왕계를 분석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무신왕이 태자시절 활약을 볼 때 나이가 너무 어리고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이 3형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고구려 전 시기에는 졸본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것이 많다. 졸본의 출토되는 유물만 분석해도 고구려 건국 때를 기준으로 문화가 달라진다. 고구려는 서기 70~19년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여와 졸본의 결합에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추모성왕부터 신대왕 때까지의 왕계 대혼란이 지난 후에 계루부 고씨왕조가 제멋대로 왕을 만들고 사라지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누구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근거를 가지고 본다면 그래도 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의심이 간다고 그 동안에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한 증거가 나와야 고구려의 미스터리한 건국사를 진실 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해씨왕조나 고씨왕조 모두다 북부여의 왕족이나 고위귀족출신이라는 점이다. 해씨왕조의 유리도 북부여 출신이고 계루부의 수장으로 보이는 태조왕의 어머니는 부여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인이 보기에는 선조가 부여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즉 부여계 고구려인으로 보인다.) 태조왕 이후에 직접적인 부여 출신명은 사라지지만 고구려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부여에서 온 이민자를 자처했다. 즉 해씨왕조와 고씨왕조의 싸움은 부여계세력간에 혈전이었다.
라인하르트에 자유행동동맹 침공 작전명 신들의 황혼 (Ragnarok)
이 시나리오에서 얀 웬리로 한번 깨보았다. 일단 이젤론 요새로 쳐들어오는 로이엔탈을 박살내고 .....
본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다.
졸본의 패권은 송양-추모-유리로 넘어갔다. 추모성왕이 급사하자 바로 뒤이어서 유리명왕이 즉위를 하고 패배한 소서노일파는 남하를 결정했다.
소서노 세력의 남하도
어떤 학자는 해양세력인 비류는 서해로 온조는 추가령계곡을 통해 남하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심심치 않게 소서노가 추모를 사랑했기에 그냥 떠나주었다는 말이 도는데 사실 이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소서노의 사랑 때문에 이 당시 달린 가문사람들이 모조리 자신의 땅을 포기하고 뿌리도 없는 곳(서울-인천)에서 고생해야 되나? 땅도 재산도 영광도 잃어버리고 떠나게 되는 밑에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 것인가? (생각해봐라 기업주의 딸내미가 남편을 사랑해서 기업을 주었다. 남편이 후계자결정을 개판으로 해서 기업이 첩에 아들로 들어가고 딸내미 사람들은 옷 벗는다. 그 사람과 그 가족들은 기분이 어떨까? 아 그대로 딸내미가 사랑했기에 라는 말이 나오겠나?)
역사적으로 세력 간에 대규모 충돌은 지도자의 결단보다도 밑에 꼬봉들이 사고치거나 지도자를 협박하거나 설득해서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역사를 선악이나 사랑, 우정으로 보면 더욱 실체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신데렐라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유
추모와 소서노 결혼은 정략결혼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에 권력자들이 정략결혼하듯이. 그래서 비극을 불렀을 수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참여사회연구소가 14일 공개한 한국사회상류층 혼맥도 일부.)
북부여계세력과 송양의 연합공격으로 소서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리명왕을 끌어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천지를 찾아서 남하했다. 하지만 유리명왕은 소서노가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당시 졸본은 유혈이든 무혈이든 내란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서로 출혈을 막기 위해서 승부를 피했을 수도 있다. 소서노세력이 나가자 졸본세력은 급속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할 정도로 엄청난 인제와 재산을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송양같은 졸본에 원로들은 남아있으니 아주 없어졌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유리명왕은 즉위 후 국가의 안정차원에서 졸본세력의 거두 송양의 딸과 결혼한다. 전임자인 추모성왕이 졸본의 실력자인 연타발의 딸과 결혼 했듯이
그런데 송양의 딸이 일 년 정도 후에 덜꺽 죽은 것이다. 그 후 등장하는 두 여자가 황조가에 주인공들은 화희와 차희다. 화의는 골천 세력, 차희는 한족 상인 출신이었다.
중화민국 4대 황제 후X타오 (일명: 티벳의 도살자)
등소평에게 천안문대학살이 있으면 그는 88년 티벳에서의 대학살이 있었다. 그는 동북공정에 지시자로 심심치 않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말 특이한 것은 언제나 중국의 지도자는 대학살을 꼭 한 번씩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이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지금도 공직생활을 했을 것인데 그에게는 애석한 일이다. (요즘 중국공산당에 훌륭한 지도하에 있는 판타지작가들이 동북&북한&한국고대사 접수 프로젝트를 하면서 유리명왕의 부인인 차희가 한족이라는 것 가지고 작당을 한다는데 웃기는 소리다. 어디서 미친 개가 짓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왜냐 차희는 모 해보지도 못하고 내쫓기어서 집으로 갔으니까! 유리명왕시절 고구려내에 한족들의 영향력은 희박했다. 게다가 조금 후에는 유리명왕은 왕망과 전쟁까지 했다. 역사는 이데올로기라고도 하지만 요즘 중국사학은 완전히 미쳐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궁을 졸본에서 골천에도 세운다는 것이다. 즉 졸본세력보다는 골천도 중심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졸본세력에 송양은 이 당시 또 다시 딸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유리명왕의 뒤를 잇는 셋째 대무신왕이 송양의 딸에게서 태어나는 데 첫 번째 송씨왕후는 일 년만에 죽었다. 그렇다면 송양은 둘 이상에 딸을 유리의 부인으로 올린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오히려 화를 내야 되는 졸본세력이 매달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서노가 사라진 졸본은 저무는 태양과 같지는 않았을까?
mbc에서 방영한 나디아가 끝나듯이 졸본도 끝나가는 구나!
소서노세력의 이탈로 졸본은 거세되었다.
(상관이 전혀 없는 사진, 본 위원은 블루워터를 정말 좋아했다.)
유리명왕은 초기 약화된 왕권을 선비족토벌로 타개하기 시작했다. 즉위 11년 고구려 초창기 최고의 명장인 부분노가 대활약하여서 선비족을 정복했다. (일부부족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태조왕시절 선비는 고구려용병으로 활약하니 전체부족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당시 선비는 발전단계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부여에 대소왕을 자극했다. 고구려가 선비를 복속하자 부여는 선비족 방면에 서쪽측면을 위협받기 시작하고 이 후에 고-부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이다. 3년 뒤 대소왕의 부여는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구려는 부여보다 국력에서 한참 밑이었다. 유리명왕도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낼까 생각을 했지만 결국 도절의 반대로 안 보냈다. 대소왕은 유리명왕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자 군사를 출동시키지만 겨울 폭설로 실패한다. 선비족을 토벌하고 부여를 물리친 유리명왕의 권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추모성왕시절 매우 유리했던 고구려 국제정세는 유리명왕때 위기로 몰린다. 고구려는 최대적국 부여는 북쪽에서, 전한을 멸망시킨 신나라 왕망은 서쪽에서 고구려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는 유리명왕 14년(기원전 6년)과 32년(서기 13년)에 부여군을 격퇴했고 신나라와의 전쟁에서는(유리명왕 31년경, 서기 12년) 서로 고구려장군 연비와 신나라 장군 요서대운 전담을 잃었다.
신나라 장군 엄우는 전면전이 시작되면 부여계 예맥족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더욱 단합하여 화가 닥칠 것이라 했을 정도로 유리명왕의 고구려는 당시 중국에 지배자인 신나라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때 고구려는 건국된 지 50년을 겨우 넘긴 상황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유리명왕은 더욱 부여와 신왕조에 강경책을 피었다. 이 당시 절대적인 열세이었던 고구려는 절대로 외세와 타협(?)하지 않고 침략군들을 모두 격퇴하면서 더욱 강력해저가고 있었다. 그런데 치열해지는 국제정세와 달리 엉뚱하게 천도문제가 불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리명왕이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진 국내성 천도였다.(유리명왕 22년 서기 3년)
졸본과 국내성. 압록강을 주목하자
사실 졸본이 우월할까 국내성이 우월할까 물론 지도를 본다면 압록강이라는 이점 때문에 모두가 국내성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가보면 알겠지만 졸본의 평야지대가 국내성의 평야지대보다 넓다. (물론 압록강 건너편에 북한일대에 평야까지 합치면 국내성이 크다.) 그리고 졸본은 200년간 문명을 쌓은 고도였다. 국내성도 도시였겠지만 전통에 졸본보다는 역사적으로 실질적으로 우월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유리명왕은 무리를 해가면서 국내성 천도를 고집했을까? 그것은 유리명왕의 왕권강화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신진세력의 발탁을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재로 이 당시 심심치 않게 고구려에 신 캐릭터가 많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우씨가문, 국내성세력 위씨가문등이다.
하레와 구우에서 촌장임 (겨드랑이에 털(?) 아니 날개? 우씨가문사람들도 엽기에 한 몫 하는 군)
이들은 유리명왕의 국내성천도를 적극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내성 호족이었던 위씨가문은 국내성 천도에 열광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도 옮긴다고 땅값 많이 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기 추모의 노신이었던 협보는 옳은 말했다가 유리명왕에게 추방당한다. 천도 2개월만에 협보에 대한 전격적인 인사조치가 이루진 것으로 보아서 유리명왕도 만만한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슬슬 용에 눈물을 찍을 만한 왕권을 확보한 것이다.
유리명왕의 장자인 도절(都切)이 등장하는데 이름이 이상하다. 도읍을 가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마 처음에 이렇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고 별칭이나 후대에 사가들이 바꾼 것일 것이다. 당시 유리명왕의 골천으로 이궁하거나 국내성천도가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다.
대소에게 볼모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장자 도절이 무슨 사유 없이 죽었다. 그리고 즉위 22년에 국내성 천도가 단행되었다. 그런데 둘째인 예비태자 해명은 졸본에 잔류하게 된다. 물론 유리명왕은 졸본에서 골천으로 거점을 옮기었지만 실질적인 구수도는 졸본이었다. 그런데 그런 졸본에 후계자인 해명을 남기다니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왕조국가에서 후계자인 태자는 반드시 국왕의 통제 하에 있어야 된다. 자칫 잘못하면 부자간에 비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것도 왕조가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던 국가 초기에 부자가 서로 다른 곳에서 살림을 차린다는 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옛 수도인 졸본에 잔류한 해명은 예비태자임에도 국가에 중대사인 군사권과 외교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해명은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도 넘치는 팔팔한 청년시절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래서인지 따르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부자간에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유리명왕은 고구려의 수성시대를 이끈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국내성천도, 선비족토벌, 부여와 신나라를 격파하고 강력한 고구려와 해씨왕조를 건설한 영웅 중에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위험한 정치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쩔 수 없이 수용했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해명의 어머니는 화희, 차희, 송양의 두 번째 이상 딸 셋중 하나일 것이다.
한족출신 차희는 추방되기 때문에 어머니일 가능성이 낮고 결국 화희나 송양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골천세력은 아마 졸본에서 멀지 않은 곳이 있었을 것이다. 골천이 먼대 있었다면 고구려에서는 천도가 되었을 것이고 졸본에서 반발도 심했을 것이다.
결국 해명은 졸본의 다물국왕 송양이나 근처에 골천세력과는 혈연관계인 것이다. 사실 유리명왕의 국내성천도는 소서노이탈이후 급속히 쇠약해지는 졸본세력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신행정수도이전때 기득권들의 생난리를 생각해보아라.)
그래서 그들은 해명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들이 X나라당으로 뭉친 것과 같지 않은가?)
해명의 졸본 잔류는 국내성천도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졸본세력과 유리명왕의 타협책이 아니었을까?
해명이 군사권과 외교권같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그 것을 뒷받침하려면 지원세력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해명이 황룡국에 갈 때 말리는 사람이 나온다. 그들은 졸본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졸본은 고구려에 실질적인 건국에 어머니다. 아무리 부여에서 내려온 추모, 유리라 할지라도 고구려에 다수는 졸본의 귀족과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국내성천도후에 해명은 태자책봉을 받는다. (즉위 23년, 서기 4년) 해명은 국내성에서 책봉되었다고 할지라도 졸본으로 또 돌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졸본에서 따로 책봉 받았을 수도 있다.
정말로 고구려는 기형적인 권력구조를 힘들게 유지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옛 수도 졸본에 태자 해명이 신수도 국내성에서는 유리명왕이 고구려를 양분하고 있었다.
마치 노론에 영조와 소론에 사도세자를 보는 듯하다. (대왕의 길)
혹시 영조가 삼국사기에서 유리명왕을 읽지 않았을까?
이러한 기형적인 상황은 4년 뒤에 해명과 황룡국간의 외교마찰을 통해 해결된다.(유리명왕 27년 서기 8년) 유리명왕은 이러한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부터 해명을 일관되게 죽이려했다.
황룡국 활사건은 간단히 이렇다. 황룡국 왕이 해명에게 압력을 좀 가하려고 활을 선물했다. 해명은 자신의 힘을 보이기 위해서인지 고구려의 힘을 보이려는 것인지 활을 부러뜨렸다. 그런데 유리명왕은 그 것을 듣고는 해명에게 화를 냈다. 그는 바로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아무리 해명이 외교상관례를 깨뜨렸다고 했다하여도 너무 과한 조치고 또 대신 죽여 달라 좀 이상하다. 황룡국의 초청에 해명의 신하는 반대했다. 이유 없이 만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해명은 하늘에 일이라면서 상관없이 황룡국에 갔고 잘 놀고 온다. 황룡국왕은 죽이려고 했던 해명보고 쫄았던 것 같다. 유리명왕은 그래도 아쉬웠는지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죽어라.”
해명의 자살명령서를 졸본편에 부쳤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하여간 해명은 아버지의 말을 받들고 고분고분하게 자결했다.
해명 자결 후 황룡국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사건 직후 황룡국은 고구려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해명이 황룡국의 활을 그냥 부러뜨렸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군사력면에서 별 볼일이 없다는 뜻이다. 즉 황룡국은 부여급이나 고구려급으로 강대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리명왕은 해명을 시켜서 황룡국을 토벌하면 되었을 문제였다. 하지만 유리명왕은 그것을 빌미로 아들 해명을 사실상 살해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명왕이 해명에게 보낸 자살명령서(?)에 엉뚱하게 국내성천도문제가 쓰여 있다는 것이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이것은 유리명왕과 태자 해명이 국내성천도에 대한 견해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쩌면 국내성천도당시 졸본에 지지를 받고 있는 해명은 아버지인 유리명왕과 이런 말을 나누지 않았을까?
유리 “국내성 천도는 이미 결정되었다!”
해명 “아버님 여기는 200년 고조선에 역사가 담긴 고토이고 다물국왕 송양의 선조들이 현토군을 몰아내고 선대 추모성왕이 나라를 건국한 졸본이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곳을 버리고 역사도 없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유리 “나는 국내성백성들과 함께 대국을 건설할 것이다. 누구도 넘보지 않는 그런 강대국을!”
해명 “졸본에서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사옵니다. 아버님.”
유리 “이놈이! 외삼촌들이 그러하라고 시키더냐? 그래 좋다 너 해명은 여기서 남아라! 남아서 졸본에서 죽든지 살든지 맘대로 해라!”
해명 “아버님 졸본은 이 나라 고구려의 중심입니다.”
해명의 말은 졸본 세력의 마지막 비명소리였다. 사실 고구려는 곧 현토군을 몰아낸 졸본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 바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 그래서 당연히 고조선 부흥의 그 중심은 200년 역사에 고도 졸본이어야 됐다. 하지만 막상 건국한 고구려는 자신들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하지만 유리명왕은 국내성천도를 단행했다. 물론 고구려가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졸본세력을 한순간에 몰락시키려는 유리명왕의 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 역사의 전체를 보면 국내성천도는 너무나도 옳은 일이었다.
유리명왕 시기를 넘어가면서 고구려는 코딱지만 한 졸본만의 나라가 아니며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국가로 성장 중이었던 것이다.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구려의 중심인 해씨왕실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졸본에 소박한 꿈정도는 사라져도 상관이 없었다. 굳세게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타고 뻗어 나가야 되는 고구려를 위하여.
결국 해명은 졸본에서 유리명왕의 자살명령서를 받들었다. 창을 땅에 꽂고 뛰는 말위에서 뛰어내려 가슴 같은 급소를 찔려 죽는 고구려 방식에 자결이었다. 그의 뜨거운 피는 졸본의 땅을 적시었다.
고구려 첫 수도 졸본.
해명태자는 이곳에서 아버지인 유리명왕의 명을 받들어 자결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해명은 아버지 유리명왕을 쓰러뜨리고 싶은 않았을까? 만약 졸본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그가 반기를 들었다면 부여와 졸본의 결합물인 고구려는 양분되었을 것이고 삼국시대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명태자 그리고 졸본에게는 유리명왕을 쓰러뜨릴 힘이 없었을 것이다. 해명이 쓰러짐으로써 졸본은 시조 추모의 무덤만 있는 곳으로 전락한다. 고구려에 어떠한 정치세력도 해명처럼 졸본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해명의 자살은 단순한 부자간에 갈등이 아니라 배후에 졸본 최후의 저항이 낳은 비극적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추모의 삼 트리오
(협보의 추방도 아마 국내성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 2개월뒤에 이루어진 인사조치였고 협보의 간언한 말중에서 해명태자와 똑같이 수도천도 문제가 나온다. 오이와 마려는 이후에도 유리명왕의 정복전쟁에 협조했던 것과 달리 협보는 유리명왕시절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고 유리명왕에 비타협적이었다. 이를 볼때 협보-오이, 마려는 같은 추모성왕의 노신이었지만 배신하고 신흥세력인 유리명왕의 즉위에는 지지했지만 협보는 서서히 불만 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북부여세력인 오이, 마려는 졸본세력의 제거에 동의를 한 것으로 보이고 협보는 약간 중간적 입장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만 북부여출신인 협보가 왜 졸본세력 제거에 반대했는지는 모르겠다. 본인의 사견으로 권신이었던 협보 자신을 위해서 국내성천도보다 왕권강화와 신진세력등용에 반대했을 것이다. 협보는 고구려를 떠나 남한南韓으로 내려갔다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었다.)
이후 졸본세력들은 흩어지면서 북부여계세력에 흡수되거나 고구려 피지배층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을 부여에서 온 이민자의 나라임을 공표했고 소서노의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졸본은 그렇게 쓸쓸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북부여에서 내려온 유리명왕과 한때 졸본의 지배자였던 다물국왕 송양의 딸사이에서 태어난 대무신왕은 졸본에서 즉위하지 않은 고구려왕이 첫 번째 왕이 된다. 그가 즉위한 곳은 국내성, 고구려에 3분에 2의 역사가 쓰인 곳이었다. (물론 평양 천도 전에 국내성에서 다른 곳으로 수도가 왔다 갔다 한다.) 이제 난산 속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며 태어난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역동적인 성장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 좀 쉬었다가 다음에는 말이 많은 대무신왕을 쓸 생각이다. 요 사람 매우 무서운 사람이다. 기대하시라!
타이틀도 바뀐다. 평범하게 고구려역사기행으로 정했다. 아 그리고 맞춤법 하고 문법이 이상하면 지적 부탁드린다. 글쟁이인데 맞춤법 틀리면 무슨 망신인가? 도와주시라! 틀리면 씹X 내주시라~ 전에 어떤 역사카페에 올린 소설 온달도 올리련다.(초반은 전쟁소설인데...) 역사카페에 올린 것은 미수정본이고 오늘부터 올리는 것은 수정본이니 옛날 것 찾을 필요는 없다. (내용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주몽을 까발려주마를 읽어주신 여러분 졸라 감사드린다. 졸라~ 보통 금요일밤 12시에 올리는데 다음주는 쉴 것 같다. 다다음주에 보장~ <금요일 밤 12시-토요일 0시에 주로 업하고 늦어도 하루 늦을 수도 있다.>
참고 서적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 김용만 <바다 출판사>
<주몽을 까발려 주마> 1탄 무적의 현도군?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1
<주몽을 까발려 주마> 2탄 송양가문 현도군을 몰아내다?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0
<주몽을 까발려 주마> 3편 혼인빙자 사기꾼 주몽(?)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2
<주몽을 까발려 주마> 4탄 사기당한 소서노와 백제건국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3
<주몽을 까발려 주마> 5탄 유리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18
<주몽을 까발려 주마> 6편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19
<주몽을 까발려 주마> 6편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
눈나라 총리 2007-01-21 00:55
이번 편에는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편이다.
고구려 왕계
그 전에 이야기 정리상 고구려 왕통에 대해서 정리를 하겠다.
고구려는 백제처럼 두 개왕조가 공존했는데 유리명왕의 해씨왕조(비류나부)와 태조왕의 고씨왕조(계루부)이다.
문제는 과연 추모성왕은 어느 쪽이었느냐가 문제이다. 그런데 사실 추모성왕은 심증적으로 고구려에서 최초로 내쫒긴 국왕이다. (더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차라리 전편[5편] 다시 보시라)
부여성씨는 해씨로 보이는 데 금와의 아들 추모도 처음에는 해씨일 것이다. (그래서 해씨이고 부여에서 귀족이상이었던 유리명왕이 추모의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인척관계였을 가능성은 높다.) 그런데 사실 추모성왕과 유리명왕은 부여에 왕족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세력이다. 추모성왕은 소서노일파를 지지를 받고 있었고 유리명왕은 오이, 마려, 협보같은 북부여계세력와 송양세력 골천세력에 지지를 받았다. 자 그렇다면 추모성왕은 부여왕족출신임에도 사실상 고씨왕조의 조상일수도 있다. 해씨였던 추모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씨성을 만든 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계루부세력이 자칭 후계자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다. 추모성왕 계열이 유리명왕의 해씨왕조에게 숙청당해 씨가 마른 상태였다고 치자. 그런 뒤에 해씨왕조를 무너지고 난후 계루부의 쿠데타(?)세력이 해씨왕조에게 지워진 추모성왕의 핏줄을 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사서에는 고구려왕조가 한번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만일 추모성왕의 기록까지 포함하면 두 번 교체되었다고 기록해야 되었지만 사실 고구려건국기이었을때 멸망기였던 전한은 대외적으로 정보수집을 하지 못하던 때였으니 기록이 못 했을 수도 있다.
결국 중국사서에 왕조교체는 해씨왕조의 모본왕이 피살당하고 계루부가 태조왕이 옹립되었을 때 기록일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게 추모성왕 조작설이다. 추모성왕은 사실 없는 존재이고 태조왕에 계루부정권이 만든 가공에 왕이거나 잠시 동안에 졸본의 지배자였을 뿐이고 사실상 고구려의 건국자는 유리명왕이라는 것이다. 사실 추모와 유리는 초반기에는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행보가 똑같다.
광개토태왕릉비
고구려에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광개토태왕이 추모성왕에 17대손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12대손이다. 많은 의심을 사고 있는 태조왕과 차대왕을 부자지간으로 보더라도 많게는 4명의 왕이나 왕손이 역사기록에서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무엇인가 왕계보에 대대적인 수술이 있었다는 이유가 된다.
고구려 역사를 천년으로 보는 대조영 (사진 : 보장왕)
북한학계나 한국에 일부에서는 이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천년이라고 하는 데 추모성왕부터 신대왕 때까지의 왕계를 분석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무신왕이 태자시절 활약을 볼 때 나이가 너무 어리고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이 3형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고구려 전 시기에는 졸본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것이 많다. 졸본의 출토되는 유물만 분석해도 고구려 건국 때를 기준으로 문화가 달라진다. 고구려는 서기 70~19년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여와 졸본의 결합에 산물이기 때문이다.
즉 추모성왕부터 신대왕 때까지의 왕계 대혼란이 지난 후에 계루부 고씨왕조가 제멋대로 왕을 만들고 사라지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누구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근거를 가지고 본다면 그래도 추모일 가능성이 높다. 의심이 간다고 그 동안에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한 증거가 나와야 고구려의 미스터리한 건국사를 진실 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해씨왕조나 고씨왕조 모두다 북부여의 왕족이나 고위귀족출신이라는 점이다. 해씨왕조의 유리도 북부여 출신이고 계루부의 수장으로 보이는 태조왕의 어머니는 부여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인이 보기에는 선조가 부여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즉 부여계 고구려인으로 보인다.) 태조왕 이후에 직접적인 부여 출신명은 사라지지만 고구려의 지배층은 자신들이 부여에서 온 이민자를 자처했다. 즉 해씨왕조와 고씨왕조의 싸움은 부여계세력간에 혈전이었다.
라인하르트에 자유행동동맹 침공 작전명 신들의 황혼 (Ragnarok)
이 시나리오에서 얀 웬리로 한번 깨보았다. 일단 이젤론 요새로 쳐들어오는 로이엔탈을 박살내고 .....
본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다.
졸본의 패권은 송양-추모-유리로 넘어갔다. 추모성왕이 급사하자 바로 뒤이어서 유리명왕이 즉위를 하고 패배한 소서노일파는 남하를 결정했다.
소서노 세력의 남하도
어떤 학자는 해양세력인 비류는 서해로 온조는 추가령계곡을 통해 남하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심심치 않게 소서노가 추모를 사랑했기에 그냥 떠나주었다는 말이 도는데 사실 이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소서노의 사랑 때문에 이 당시 달린 가문사람들이 모조리 자신의 땅을 포기하고 뿌리도 없는 곳(서울-인천)에서 고생해야 되나? 땅도 재산도 영광도 잃어버리고 떠나게 되는 밑에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 것인가? (생각해봐라 기업주의 딸내미가 남편을 사랑해서 기업을 주었다. 남편이 후계자결정을 개판으로 해서 기업이 첩에 아들로 들어가고 딸내미 사람들은 옷 벗는다. 그 사람과 그 가족들은 기분이 어떨까? 아 그대로 딸내미가 사랑했기에 라는 말이 나오겠나?)
역사적으로 세력 간에 대규모 충돌은 지도자의 결단보다도 밑에 꼬봉들이 사고치거나 지도자를 협박하거나 설득해서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역사를 선악이나 사랑, 우정으로 보면 더욱 실체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신데렐라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유
추모와 소서노 결혼은 정략결혼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에 권력자들이 정략결혼하듯이. 그래서 비극을 불렀을 수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참여사회연구소가 14일 공개한 한국사회상류층 혼맥도 일부.)
북부여계세력과 송양의 연합공격으로 소서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리명왕을 끌어내릴 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천지를 찾아서 남하했다. 하지만 유리명왕은 소서노가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당시 졸본은 유혈이든 무혈이든 내란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서로 출혈을 막기 위해서 승부를 피했을 수도 있다. 소서노세력이 나가자 졸본세력은 급속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할 정도로 엄청난 인제와 재산을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송양같은 졸본에 원로들은 남아있으니 아주 없어졌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유리명왕은 즉위 후 국가의 안정차원에서 졸본세력의 거두 송양의 딸과 결혼한다. 전임자인 추모성왕이 졸본의 실력자인 연타발의 딸과 결혼 했듯이
그런데 송양의 딸이 일 년 정도 후에 덜꺽 죽은 것이다. 그 후 등장하는 두 여자가 황조가에 주인공들은 화희와 차희다. 화의는 골천 세력, 차희는 한족 상인 출신이었다.
중화민국 4대 황제 후X타오 (일명: 티벳의 도살자)
등소평에게 천안문대학살이 있으면 그는 88년 티벳에서의 대학살이 있었다. 그는 동북공정에 지시자로 심심치 않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말 특이한 것은 언제나 중국의 지도자는 대학살을 꼭 한 번씩 한다는 것이다. 전두환이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지금도 공직생활을 했을 것인데 그에게는 애석한 일이다. (요즘 중국공산당에 훌륭한 지도하에 있는 판타지작가들이 동북&북한&한국고대사 접수 프로젝트를 하면서 유리명왕의 부인인 차희가 한족이라는 것 가지고 작당을 한다는데 웃기는 소리다. 어디서 미친 개가 짓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왜냐 차희는 모 해보지도 못하고 내쫓기어서 집으로 갔으니까! 유리명왕시절 고구려내에 한족들의 영향력은 희박했다. 게다가 조금 후에는 유리명왕은 왕망과 전쟁까지 했다. 역사는 이데올로기라고도 하지만 요즘 중국사학은 완전히 미쳐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궁을 졸본에서 골천에도 세운다는 것이다. 즉 졸본세력보다는 골천도 중심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졸본세력에 송양은 이 당시 또 다시 딸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유리명왕의 뒤를 잇는 셋째 대무신왕이 송양의 딸에게서 태어나는 데 첫 번째 송씨왕후는 일 년만에 죽었다. 그렇다면 송양은 둘 이상에 딸을 유리의 부인으로 올린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오히려 화를 내야 되는 졸본세력이 매달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서노가 사라진 졸본은 저무는 태양과 같지는 않았을까?
mbc에서 방영한 나디아가 끝나듯이 졸본도 끝나가는 구나!
소서노세력의 이탈로 졸본은 거세되었다.
(상관이 전혀 없는 사진, 본 위원은 블루워터를 정말 좋아했다.)
유리명왕은 초기 약화된 왕권을 선비족토벌로 타개하기 시작했다. 즉위 11년 고구려 초창기 최고의 명장인 부분노가 대활약하여서 선비족을 정복했다. (일부부족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태조왕시절 선비는 고구려용병으로 활약하니 전체부족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당시 선비는 발전단계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부여에 대소왕을 자극했다. 고구려가 선비를 복속하자 부여는 선비족 방면에 서쪽측면을 위협받기 시작하고 이 후에 고-부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이다. 3년 뒤 대소왕의 부여는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고구려는 부여보다 국력에서 한참 밑이었다. 유리명왕도 태자 도절을 볼모로 보낼까 생각을 했지만 결국 도절의 반대로 안 보냈다. 대소왕은 유리명왕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자 군사를 출동시키지만 겨울 폭설로 실패한다. 선비족을 토벌하고 부여를 물리친 유리명왕의 권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추모성왕시절 매우 유리했던 고구려 국제정세는 유리명왕때 위기로 몰린다. 고구려는 최대적국 부여는 북쪽에서, 전한을 멸망시킨 신나라 왕망은 서쪽에서 고구려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는 유리명왕 14년(기원전 6년)과 32년(서기 13년)에 부여군을 격퇴했고 신나라와의 전쟁에서는(유리명왕 31년경, 서기 12년) 서로 고구려장군 연비와 신나라 장군 요서대운 전담을 잃었다.
신나라 장군 엄우는 전면전이 시작되면 부여계 예맥족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더욱 단합하여 화가 닥칠 것이라 했을 정도로 유리명왕의 고구려는 당시 중국에 지배자인 신나라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때 고구려는 건국된 지 50년을 겨우 넘긴 상황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유리명왕은 더욱 부여와 신왕조에 강경책을 피었다. 이 당시 절대적인 열세이었던 고구려는 절대로 외세와 타협(?)하지 않고 침략군들을 모두 격퇴하면서 더욱 강력해저가고 있었다. 그런데 치열해지는 국제정세와 달리 엉뚱하게 천도문제가 불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리명왕이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진 국내성 천도였다.(유리명왕 22년 서기 3년)
졸본과 국내성. 압록강을 주목하자
사실 졸본이 우월할까 국내성이 우월할까 물론 지도를 본다면 압록강이라는 이점 때문에 모두가 국내성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가보면 알겠지만 졸본의 평야지대가 국내성의 평야지대보다 넓다. (물론 압록강 건너편에 북한일대에 평야까지 합치면 국내성이 크다.) 그리고 졸본은 200년간 문명을 쌓은 고도였다. 국내성도 도시였겠지만 전통에 졸본보다는 역사적으로 실질적으로 우월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유리명왕은 무리를 해가면서 국내성 천도를 고집했을까? 그것은 유리명왕의 왕권강화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신진세력의 발탁을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재로 이 당시 심심치 않게 고구려에 신 캐릭터가 많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우씨가문, 국내성세력 위씨가문등이다.
하레와 구우에서 촌장임 (겨드랑이에 털(?) 아니 날개? 우씨가문사람들도 엽기에 한 몫 하는 군)
이들은 유리명왕의 국내성천도를 적극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내성 호족이었던 위씨가문은 국내성 천도에 열광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도 옮긴다고 땅값 많이 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기 추모의 노신이었던 협보는 옳은 말했다가 유리명왕에게 추방당한다. 천도 2개월만에 협보에 대한 전격적인 인사조치가 이루진 것으로 보아서 유리명왕도 만만한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슬슬 용에 눈물을 찍을 만한 왕권을 확보한 것이다.
유리명왕의 장자인 도절(都切)이 등장하는데 이름이 이상하다. 도읍을 가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마 처음에 이렇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고 별칭이나 후대에 사가들이 바꾼 것일 것이다. 당시 유리명왕의 골천으로 이궁하거나 국내성천도가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이름이다.
대소에게 볼모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장자 도절이 무슨 사유 없이 죽었다. 그리고 즉위 22년에 국내성 천도가 단행되었다. 그런데 둘째인 예비태자 해명은 졸본에 잔류하게 된다. 물론 유리명왕은 졸본에서 골천으로 거점을 옮기었지만 실질적인 구수도는 졸본이었다. 그런데 그런 졸본에 후계자인 해명을 남기다니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왕조국가에서 후계자인 태자는 반드시 국왕의 통제 하에 있어야 된다. 자칫 잘못하면 부자간에 비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것도 왕조가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던 국가 초기에 부자가 서로 다른 곳에서 살림을 차린다는 것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옛 수도인 졸본에 잔류한 해명은 예비태자임에도 국가에 중대사인 군사권과 외교권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해명은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도 넘치는 팔팔한 청년시절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래서인지 따르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부자간에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유리명왕은 고구려의 수성시대를 이끈 탁월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국내성천도, 선비족토벌, 부여와 신나라를 격파하고 강력한 고구려와 해씨왕조를 건설한 영웅 중에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위험한 정치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쩔 수 없이 수용했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해명의 어머니는 화희, 차희, 송양의 두 번째 이상 딸 셋중 하나일 것이다.
한족출신 차희는 추방되기 때문에 어머니일 가능성이 낮고 결국 화희나 송양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골천세력은 아마 졸본에서 멀지 않은 곳이 있었을 것이다. 골천이 먼대 있었다면 고구려에서는 천도가 되었을 것이고 졸본에서 반발도 심했을 것이다.
결국 해명은 졸본의 다물국왕 송양이나 근처에 골천세력과는 혈연관계인 것이다. 사실 유리명왕의 국내성천도는 소서노이탈이후 급속히 쇠약해지는 졸본세력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신행정수도이전때 기득권들의 생난리를 생각해보아라.)
그래서 그들은 해명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들이 X나라당으로 뭉친 것과 같지 않은가?)
해명의 졸본 잔류는 국내성천도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졸본세력과 유리명왕의 타협책이 아니었을까?
해명이 군사권과 외교권같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그 것을 뒷받침하려면 지원세력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해명이 황룡국에 갈 때 말리는 사람이 나온다. 그들은 졸본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졸본은 고구려에 실질적인 건국에 어머니다. 아무리 부여에서 내려온 추모, 유리라 할지라도 고구려에 다수는 졸본의 귀족과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국내성천도후에 해명은 태자책봉을 받는다. (즉위 23년, 서기 4년) 해명은 국내성에서 책봉되었다고 할지라도 졸본으로 또 돌아갔을 것이다. 어쩌면 졸본에서 따로 책봉 받았을 수도 있다.
정말로 고구려는 기형적인 권력구조를 힘들게 유지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옛 수도 졸본에 태자 해명이 신수도 국내성에서는 유리명왕이 고구려를 양분하고 있었다.
마치 노론에 영조와 소론에 사도세자를 보는 듯하다. (대왕의 길)
혹시 영조가 삼국사기에서 유리명왕을 읽지 않았을까?
이러한 기형적인 상황은 4년 뒤에 해명과 황룡국간의 외교마찰을 통해 해결된다.(유리명왕 27년 서기 8년) 유리명왕은 이러한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부터 해명을 일관되게 죽이려했다.
황룡국 활사건은 간단히 이렇다. 황룡국 왕이 해명에게 압력을 좀 가하려고 활을 선물했다. 해명은 자신의 힘을 보이기 위해서인지 고구려의 힘을 보이려는 것인지 활을 부러뜨렸다. 그런데 유리명왕은 그 것을 듣고는 해명에게 화를 냈다. 그는 바로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아무리 해명이 외교상관례를 깨뜨렸다고 했다하여도 너무 과한 조치고 또 대신 죽여 달라 좀 이상하다. 황룡국의 초청에 해명의 신하는 반대했다. 이유 없이 만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해명은 하늘에 일이라면서 상관없이 황룡국에 갔고 잘 놀고 온다. 황룡국왕은 죽이려고 했던 해명보고 쫄았던 것 같다. 유리명왕은 그래도 아쉬웠는지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죽어라.”
해명의 자살명령서를 졸본편에 부쳤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데 하여간 해명은 아버지의 말을 받들고 고분고분하게 자결했다.
해명 자결 후 황룡국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사건 직후 황룡국은 고구려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해명이 황룡국의 활을 그냥 부러뜨렸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군사력면에서 별 볼일이 없다는 뜻이다. 즉 황룡국은 부여급이나 고구려급으로 강대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리명왕은 해명을 시켜서 황룡국을 토벌하면 되었을 문제였다. 하지만 유리명왕은 그것을 빌미로 아들 해명을 사실상 살해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명왕이 해명에게 보낸 자살명령서(?)에 엉뚱하게 국내성천도문제가 쓰여 있다는 것이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 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이것은 유리명왕과 태자 해명이 국내성천도에 대한 견해차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쩌면 국내성천도당시 졸본에 지지를 받고 있는 해명은 아버지인 유리명왕과 이런 말을 나누지 않았을까?
유리 “국내성 천도는 이미 결정되었다!”
해명 “아버님 여기는 200년 고조선에 역사가 담긴 고토이고 다물국왕 송양의 선조들이 현토군을 몰아내고 선대 추모성왕이 나라를 건국한 졸본이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곳을 버리고 역사도 없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유리 “나는 국내성백성들과 함께 대국을 건설할 것이다. 누구도 넘보지 않는 그런 강대국을!”
해명 “졸본에서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사옵니다. 아버님.”
유리 “이놈이! 외삼촌들이 그러하라고 시키더냐? 그래 좋다 너 해명은 여기서 남아라! 남아서 졸본에서 죽든지 살든지 맘대로 해라!”
해명 “아버님 졸본은 이 나라 고구려의 중심입니다.”
해명의 말은 졸본 세력의 마지막 비명소리였다. 사실 고구려는 곧 현토군을 몰아낸 졸본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온 힘을 다 바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 그래서 당연히 고조선 부흥의 그 중심은 200년 역사에 고도 졸본이어야 됐다. 하지만 막상 건국한 고구려는 자신들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하지만 유리명왕은 국내성천도를 단행했다. 물론 고구려가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졸본세력을 한순간에 몰락시키려는 유리명왕의 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 역사의 전체를 보면 국내성천도는 너무나도 옳은 일이었다.
유리명왕 시기를 넘어가면서 고구려는 코딱지만 한 졸본만의 나라가 아니며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국가로 성장 중이었던 것이다.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구려의 중심인 해씨왕실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졸본에 소박한 꿈정도는 사라져도 상관이 없었다. 굳세게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타고 뻗어 나가야 되는 고구려를 위하여.
결국 해명은 졸본에서 유리명왕의 자살명령서를 받들었다. 창을 땅에 꽂고 뛰는 말위에서 뛰어내려 가슴 같은 급소를 찔려 죽는 고구려 방식에 자결이었다. 그의 뜨거운 피는 졸본의 땅을 적시었다.
고구려 첫 수도 졸본.
해명태자는 이곳에서 아버지인 유리명왕의 명을 받들어 자결했다.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해명은 아버지 유리명왕을 쓰러뜨리고 싶은 않았을까? 만약 졸본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그가 반기를 들었다면 부여와 졸본의 결합물인 고구려는 양분되었을 것이고 삼국시대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명태자 그리고 졸본에게는 유리명왕을 쓰러뜨릴 힘이 없었을 것이다. 해명이 쓰러짐으로써 졸본은 시조 추모의 무덤만 있는 곳으로 전락한다. 고구려에 어떠한 정치세력도 해명처럼 졸본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해명의 자살은 단순한 부자간에 갈등이 아니라 배후에 졸본 최후의 저항이 낳은 비극적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추모의 삼 트리오
(협보의 추방도 아마 국내성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 2개월뒤에 이루어진 인사조치였고 협보의 간언한 말중에서 해명태자와 똑같이 수도천도 문제가 나온다. 오이와 마려는 이후에도 유리명왕의 정복전쟁에 협조했던 것과 달리 협보는 유리명왕시절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고 유리명왕에 비타협적이었다. 이를 볼때 협보-오이, 마려는 같은 추모성왕의 노신이었지만 배신하고 신흥세력인 유리명왕의 즉위에는 지지했지만 협보는 서서히 불만 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북부여세력인 오이, 마려는 졸본세력의 제거에 동의를 한 것으로 보이고 협보는 약간 중간적 입장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만 북부여출신인 협보가 왜 졸본세력 제거에 반대했는지는 모르겠다. 본인의 사견으로 권신이었던 협보 자신을 위해서 국내성천도보다 왕권강화와 신진세력등용에 반대했을 것이다. 협보는 고구려를 떠나 남한南韓으로 내려갔다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었다.)
이후 졸본세력들은 흩어지면서 북부여계세력에 흡수되거나 고구려 피지배층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을 부여에서 온 이민자의 나라임을 공표했고 소서노의 백제도 마찬가지였다.
졸본은 그렇게 쓸쓸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북부여에서 내려온 유리명왕과 한때 졸본의 지배자였던 다물국왕 송양의 딸사이에서 태어난 대무신왕은 졸본에서 즉위하지 않은 고구려왕이 첫 번째 왕이 된다. 그가 즉위한 곳은 국내성, 고구려에 3분에 2의 역사가 쓰인 곳이었다. (물론 평양 천도 전에 국내성에서 다른 곳으로 수도가 왔다 갔다 한다.) 이제 난산 속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며 태어난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역동적인 성장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 좀 쉬었다가 다음에는 말이 많은 대무신왕을 쓸 생각이다. 요 사람 매우 무서운 사람이다. 기대하시라!
타이틀도 바뀐다. 평범하게 고구려역사기행으로 정했다. 아 그리고 맞춤법 하고 문법이 이상하면 지적 부탁드린다. 글쟁이인데 맞춤법 틀리면 무슨 망신인가? 도와주시라! 틀리면 씹X 내주시라~ 전에 어떤 역사카페에 올린 소설 온달도 올리련다.(초반은 전쟁소설인데...) 역사카페에 올린 것은 미수정본이고 오늘부터 올리는 것은 수정본이니 옛날 것 찾을 필요는 없다. (내용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주몽을 까발려주마를 읽어주신 여러분 졸라 감사드린다. 졸라~ 보통 금요일밤 12시에 올리는데 다음주는 쉴 것 같다. 다다음주에 보장~ <금요일 밤 12시-토요일 0시에 주로 업하고 늦어도 하루 늦을 수도 있다.>
참고 서적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 김용만 <바다 출판사>
고구려의 발견 저자 김용만 <바다 출판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 전 저자 김용만 <바다 출판사>
지도로 보는 한국사 저자 김용만, 김준수 <수막새>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저자 전호태 <사계절>
다시 보는 고구려사 <고구려 연구 재단>
맨얼굴의 중국사 저자 백양 <창해>
한국 생활사 박물관 <사계절>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저자 르네 그루쎄 <사계절>
<주몽을 까발려 주마> 1탄 무적의 현도군?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1
<주몽을 까발려 주마> 2탄 송양가문 현도군을 몰아내다?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0
<주몽을 까발려 주마> 3편 혼인빙자 사기꾼 주몽(?)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2
<주몽을 까발려 주마> 4탄 사기당한 소서노와 백제건국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23
<주몽을 까발려 주마> 5탄 유리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18
<주몽을 까발려 주마> 6편 신들의 황혼, 졸본의 멸망 - 눈나라 총리 http://tadream.tistory.com/119
'고구려 > 건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몽을 까발려 주마> 1탄 무적의 현도군? - 눈나라 총리 (0) | 2011.10.18 |
---|---|
<주몽을 까발려 주마> 2탄 송양가문 현도군을 몰아내다? - 눈나라 총리 (0) | 2011.10.18 |
<주몽을 까발려 주마> 5탄 유리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 눈나라 총리 (0) | 2011.10.18 |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김운회의 新고대사 7] - 중앙 (0) | 2011.10.17 |
협보 - 환단고기 (0) | 2011.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