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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원본이 있는 사이트가 사라져 구글 이미지에서 작은 목차그림(썸네일)을 가져왔습니다.
<주몽을 까발려주마> 1탄 무적의 현도군?
눈나라 총리 2006-12-28 00:38
아싸! 철기병 포스는 나지만 지금 이 장면은 관우가 기관총을 들고 있는 격이다. 사실 위만조선은 철기로 무장했고 멸망한 뒤에는 한반도 남부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이야기에 무리가 있었다. 사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네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한반도 남부세력과 전한과의 교역로를 막아버린 것
(고조선은 진번, 임둔을 침공했고 남쪽 진과 한나라의 교역을 막고 중개무역을 행했다. 고구려도 나중에 고스란히 따라한다.)
둘째는 고조선의 전한 침략
(일단 이 문제들은 시대조건으로 변하지만 내용상으로 고스란히 고구려-수, 당 전쟁의 원인이 된다.)
서기 기원전 108년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서기 기원전 107년에 압록강 중류에 현도군을 세운 것인데 ......
이중 진번, 임둔은 서기전 82년경에 사라지고 낙랑왕 최리가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가 나타내서 한국과 중국학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낙랑군의 지도자가 왕을 칭한다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솔직히 진번, 임둔은 기록이 거의 없어서 설치했는지도 의문이다.)
일단 분명히 기원전 8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예맥족은 대대적인 전한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주몽은 사실 이때 예맥족은 대반격시대를 모티브로 했을 것이다. 주몽시기 졸본은 예맥족간의 세력 다툼 시기지 전한와의 전쟁 시기는 이전에 지난 상황이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기원전 72년 현도군은 예맥족의 침공으로 요동으로 도망갔다. 80년경에 진번, 임둔이 사라진 것도 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고 본 위원에 견해로 낙랑군도 사라졌을 것이다.
이러한 대대적인 봉기의 원인은
첫째는 전한의 통치 방법이 잘못되었다.
예맥족 시기 너무나도 백성들이 순해서 법이 8개에 지나지 않던 것이 전한 지배가 시작되자 법이 60개로 늘고 전한 상인들을 사기행위도 극에 달했다. 중국 애들이 돈 사기에는 옛날부터 일가견이 있었나부다. 또 하나는 전한의 풍속을 전파인데 뿌리부터가 다른 예맥사회는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전한 국가전략의 변화이다.
예맥의 대봉기때 전한은 너무나도 이상하게 한사군의 몰락을 지켜보기 만했다.
고조선의 멸망시킨 한무제는 원래 미친놈이었다. (한 페이지 뒤에 그가 미친놈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 나온다. 당태종도 두 가지 점에서 마찬가지다.)
사방에 세력을 모두 복속시켜야한다는 정신으로 원정을 가니 국가의 힘은 급속도로 소모된 것이었다. 당태종은 강남에 풍부한 물자라도 있었지만(이것이 고구려멸망의 원인중 하나다.) 전한시대는 강남도 미개발 지대였다. 한무제 사후 국가제정의 한계를 알고 있던 전한의 실력자들은 대외관계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한의 최대적수는 흉노다. 그 흉노에 비단길을 장악을 막고 말려 죽인다. 즉 북방과 서역방면으로 군사들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예맥족의 대봉기는 한무제가 사후(기원전 87년) 이루어졌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100년경 이전에 전한이 대희생을 치루면서 흉노의 부유한 지역인 하서주랑 일대에 점령하고 흉노와의 평화협상이 이루어지지만 실패하고 잠시 소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전한은 흉노와의 전쟁 상황이었다. 또 흉노의 비단길을 장악을 막기 위해서 서역일대로 대규모 작전으로 한나라의 국가 역량을 소모한 상황에서 동쪽에 예맥의 봉기를 저지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고구려가 수, 당전쟁에서 남북 양면에서 전쟁을 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나라도 통일신라와 토번과의 양면전쟁에서 패하였다. 당시 전한은 흉노를 상대로 하서주랑과 서역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전한의 몰락이다.
당시 전한은 외척 때문에 망해가는 중이었다. 결국 한무제는 결국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소제의 젊은 어머니인 구익부인(자기 마누라)을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기원전 88년 본 위원이 무제가 미친놈이라는 두 번째 증거다.) 하지만 외척문제는 부인이 죽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왕권이 든든하면 상관없는데 기원전 80년 즉위하는 선제는 평민출신이고 역적집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권력을 보위하기 위해서 외척을 임용했다. (요분 아버지가 원래 태자였는데 할아버지인 한무제 때 피살되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평민으로 강등된다. 왠지 한무제의 구린내가 나지 않는가?) 그 후 전한의 황제들은 외척들이 손아귀에 놀아나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하는 작태는 안동 김씨를 능가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임 황제의 외척과 후임 황제의 외척의 교체기에는 피를 안 뿌린 날이 없었다. 즉 내란이 빈번했고 그것으로 인해 전한이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자기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 구의 부인이시다. 재미있는 것은 북위가 이것을 흉내 내서 태자 어머니는 아들 즉위 전까지 죽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미쳐야 저렇게 될까 궁금하나 사실 왕후는 몰라도 친척정리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 사진은 원본이 있는 사이트가 사라져 구글 이미지에서 작은 목차그림(썸네일)을 가져왔습니다.
<주몽을 까발려주마> 1탄 무적의 현도군?
눈나라 총리 2006-12-28 00:38
중국사서의 기록을 뒤지면 현토군은 전한 시기 인구가 고작 20만 명이다.
징병가능자를 최대한 잡아서 5%(?)로 해도 군사적으로 만 명 이하라는 것인데 일단 비전투병을 제외하면 그렇게 숫자가 많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본 위원이 주몽계 세력의 적대 세력으로 유주자사 (전한시대도 그런 이름이었는지는 의문)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했지만 몇몇 역사책을 쓰신 모님의 견해로는 요동태수가 적당했다는 말을 하셨다. 사실 이 부분은 작가들이 일단 실수를 좀 한 셈이다.
<현도군(수) 얼굴>
주몽에서는 강력할 지도 몰라도 군수(?)는 별 볼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앙에서 병력을 보내면 되지 않겠냐? 당시 전한은 쇠퇴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철기군 이야기하지 말자. 철기병은 고구려 동천왕이 최초다. 전한이 철기병 썼다는 기록 있으면 찾아와서 말하라. 이건 상식이다.)
아싸! 철기병 포스는 나지만 지금 이 장면은 관우가 기관총을 들고 있는 격이다. 사실 위만조선은 철기로 무장했고 멸망한 뒤에는 한반도 남부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이야기에 무리가 있었다. 사실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네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한반도 남부세력과 전한과의 교역로를 막아버린 것
(고조선은 진번, 임둔을 침공했고 남쪽 진과 한나라의 교역을 막고 중개무역을 행했다. 고구려도 나중에 고스란히 따라한다.)
둘째는 고조선의 전한 침략
(명백한 사실이다. 뭐 전한 먹어 볼 생각은 아닌 것 같고 다만 군사충돌은 사실이다. 고구려도 수, 당영토를 가벼이 보았다. 다만 수, 당정복은 심사숙고해야 된다.)
셋째는 흉노와 동맹가능성
(전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고구려도 돌궐, 설연타, 철륵과 지속적으로 선을 유지했다.)
넷째는 중화세계의 편입을 거절한 것이다.
(전한은 서기 109년 사신 섭하를 보내 조공내지 항복을 요구했다. 고조선왕 위우거님는 당연히 거절하셨습니다. 수문제의 조서에 영양태왕은 영주공격을 명령했다. 연개소문은 말할 것도 없다.) (일단 이 문제들은 시대조건으로 변하지만 내용상으로 고스란히 고구려-수, 당 전쟁의 원인이 된다.)
<연개소문과 당태종>
이들이 치고 박은 원인은 이미 고조선말기에 정치적 상황의 재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는데 미안하지만 고조선멸망은 전한장수들이 잘 싸웠다 라기 보다는 고조선의 내부 반란 때문이었다. 사실 전한 원정군에서 장성급은 거의 대부분이 처벌은 받는다. 그리고서는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인데....... 과연 정상적으로 설치가 되었느냐가 의문이다.서기 기원전 108년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서기 기원전 107년에 압록강 중류에 현도군을 세운 것인데 ......
이중 진번, 임둔은 서기전 82년경에 사라지고 낙랑왕 최리가 지배하는 이상한 동네가 나타내서 한국과 중국학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낙랑군의 지도자가 왕을 칭한다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솔직히 진번, 임둔은 기록이 거의 없어서 설치했는지도 의문이다.)
[사실 낙랑군의 위치 중으로 예상되는 평양일대는 전한시기 유물이 거의 없고 후한시기에 유물이 대부분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이 봉니를 뿌려서 낙랑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지만 해방이후에도 평양에는 후한시대 유물이 꾸준히 나온다.) 사견이지만 본 위원은 낙랑군이 다른데 있다가 80년대~70년대에 예맥족의 대반격때 사라지고 고조선 토착세력계 낙랑국이 평양일대에 고조선시기 쭉 있었거나 기원전 80년~70년경에 발생했다. 그런데 대무신왕의 무력침공에 이 나라는 무너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후한 광무제가 구 고조선 영토인 낙랑 일대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해군을 보내서 제 2기 낙랑군을 평양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낙랑군을 다스리는 한인 관리가 한동안 부임도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낙랑군은 고구려에서 이상하게도 대무신왕이후 미천태왕 이전에까지 한 번도 침공목표가 되지 않는데 본 위원이 보기에는 군사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이유인 것 같은데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다만 이것은 저의 사적인 견해다. 하여간 전한 시기 낙랑군은 확실히 평양에는 없었다.]
자 그러면 현도군은 어떤 것인지 보자
일단 분명히 기원전 8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예맥족은 대대적인 전한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주몽은 사실 이때 예맥족은 대반격시대를 모티브로 했을 것이다. 주몽시기 졸본은 예맥족간의 세력 다툼 시기지 전한와의 전쟁 시기는 이전에 지난 상황이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기원전 72년 현도군은 예맥족의 침공으로 요동으로 도망갔다. 80년경에 진번, 임둔이 사라진 것도 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고 본 위원에 견해로 낙랑군도 사라졌을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에서 나온 지도를 발췌했다. 문제되면 지우겠다. 본 위원과 견해는 다르지만 이 분들은 본 위원보다 역사공부를 만 배는 더하신 분이니까. 할 말은 없다.
1현도군이 왜 저기 있는지는 모르겠고
2현도군이 기원전 72년에 요동(무순)으로 추방된다.
첫째는 전한의 통치 방법이 잘못되었다.
예맥족 시기 너무나도 백성들이 순해서 법이 8개에 지나지 않던 것이 전한 지배가 시작되자 법이 60개로 늘고 전한 상인들을 사기행위도 극에 달했다. 중국 애들이 돈 사기에는 옛날부터 일가견이 있었나부다. 또 하나는 전한의 풍속을 전파인데 뿌리부터가 다른 예맥사회는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전한 국가전략의 변화이다.
예맥의 대봉기때 전한은 너무나도 이상하게 한사군의 몰락을 지켜보기 만했다.
고조선의 멸망시킨 한무제는 원래 미친놈이었다. (한 페이지 뒤에 그가 미친놈이라는 또 다른 증거가 나온다. 당태종도 두 가지 점에서 마찬가지다.)
사방에 세력을 모두 복속시켜야한다는 정신으로 원정을 가니 국가의 힘은 급속도로 소모된 것이었다. 당태종은 강남에 풍부한 물자라도 있었지만(이것이 고구려멸망의 원인중 하나다.) 전한시대는 강남도 미개발 지대였다. 한무제 사후 국가제정의 한계를 알고 있던 전한의 실력자들은 대외관계에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한의 최대적수는 흉노다. 그 흉노에 비단길을 장악을 막고 말려 죽인다. 즉 북방과 서역방면으로 군사들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예맥족의 대봉기는 한무제가 사후(기원전 87년) 이루어졌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100년경 이전에 전한이 대희생을 치루면서 흉노의 부유한 지역인 하서주랑 일대에 점령하고 흉노와의 평화협상이 이루어지지만 실패하고 잠시 소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전한은 흉노와의 전쟁 상황이었다. 또 흉노의 비단길을 장악을 막기 위해서 서역일대로 대규모 작전으로 한나라의 국가 역량을 소모한 상황에서 동쪽에 예맥의 봉기를 저지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고구려가 수, 당전쟁에서 남북 양면에서 전쟁을 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나라도 통일신라와 토번과의 양면전쟁에서 패하였다. 당시 전한은 흉노를 상대로 하서주랑과 서역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전한의 몰락이다.
당시 전한은 외척 때문에 망해가는 중이었다. 결국 한무제는 결국 자신의 아들이자 태자인 소제의 젊은 어머니인 구익부인(자기 마누라)을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기원전 88년 본 위원이 무제가 미친놈이라는 두 번째 증거다.) 하지만 외척문제는 부인이 죽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왕권이 든든하면 상관없는데 기원전 80년 즉위하는 선제는 평민출신이고 역적집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권력을 보위하기 위해서 외척을 임용했다. (요분 아버지가 원래 태자였는데 할아버지인 한무제 때 피살되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평민으로 강등된다. 왠지 한무제의 구린내가 나지 않는가?) 그 후 전한의 황제들은 외척들이 손아귀에 놀아나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하는 작태는 안동 김씨를 능가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임 황제의 외척과 후임 황제의 외척의 교체기에는 피를 안 뿌린 날이 없었다. 즉 내란이 빈번했고 그것으로 인해 전한이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자기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 구의 부인이시다. 재미있는 것은 북위가 이것을 흉내 내서 태자 어머니는 아들 즉위 전까지 죽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미쳐야 저렇게 될까 궁금하나 사실 왕후는 몰라도 친척정리에 관해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즉 기원전 80년대부터 후한 성립기인 기원후 25년 때 전한은 구 고조선지역에 힘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거나 부족했다. (유리명왕과 왕망의 싸움 딱 한번은 논외로 하겠다.)
우리가 주몽에서 보는 무지막지한 한사군(현도군)이 얼마나 미약했던 존재인가를 설명했다.
* 다음 주 수요일에는 기원전 72년 현도군을 몰아낸 세력인 송양계 세력과 기원전 37년 이후에 남하한 부여남하세력인 고추모의 관계를 논하겠다. 놀라셨겠지만 사실 현도군을 몰아낸 것은 송씨 집안사람들(연타발, 소서노도 포함될 수 있다)이다. 본 위원이 확신하건데 송양이 현도군수를 만났다면 송양이 칼로 죽여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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