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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을 까발려주마> 4탄 사기당한 소서노와 백제건국
눈나라 총리 2007-01-05 00:24


자 일단 이야기를 돌려서 비류, 온조의 아버지이야기를 해보자. 

삼국사기에는 백제건국설화가 두 개있다. 일단 첫 번째 온조 건국설화로 기록한 부분에는 소서노의 아들들인 비류, 온조의 아버지가 추모(주몽)이다. 그런데 두 번째 비류 건국설화에는 해부루(금와아버지)의 서손인 우태라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될까? 힌트는 전혀 엉뚱하게 백제의 왕가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백제의 건국설화는 이상하게 아버지(주몽이나 우태)가 있고 형제가 건설을 한다. 보통은 한 영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온간 시련을 헤지고 국가를 건설해야 되는 데 두 영웅이라니 구린내가 안 날 수 없다. 

사실 이것은 백제왕가가 두 개 있었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반듯한 한개 왕조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인천 일대 세력인 비류계 왕가와 서울 일대 세력인 온조계 왕가가 공존했다는 것이다. 
(백제초기 고이왕과 비류왕 등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삼국사기에 기록에는 8대 고이왕이 5대 초고왕의 형제로 기록되어 있는데 나이차가 장난이 아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일은 비류왕때 또 재현된다. 이것은 후대 백제사가들이 두 개의 왕조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일어난 조작의 흔적이다. 이것은 고구려나 신라에도 발견된다.)

다만 국가 건설은 온조가 완성했지만 건설 초기 대부분은 형인 비류계 왕가가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초고왕시절 온조계가 최후에 승리를 함으로써 비류계는 온조계에 통합된다.


근초고왕때 백제의 급성장은 왕실내부에 분란이 화합으로 바뀌면서 국가적 에너지가 대폭발한 것이었다. 

백제왕계를 보면
그렇다면 비류계 왕조와 온조계 왕조의 성씨 분석하면 시조의 아버지가 추모인지 우태인지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6대 구수왕은 학계에서는 비류계일 가능성도 높다고 주장한다. 그 사람이 첩에게 아들을 두었는데 그 사람이 우복이다. 우(!)복? 그런면 비류계는 우씨인 것이다. 그러면 비류의 아버지는


(요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반론이 있겠지만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 온조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미안하게도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다. 온조계는 부여씨로 기록되어있다. 다만 온조세력과 비류세력은 뿌리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아버지가 같다면 그렇게 심각하게 투쟁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당연하지 같은 성씨이니까) 그렇다면 아버지도 다를 가능성이 높은데 일단 추모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건국신화의 이야기 문맥으로 볼 때는 우태일 가능성도 만만치 않다. 

사실 백제가 시조의 아버지로 동명성왕을 섬긴 사실이지만 그 분이 고구려시조 추모인지 부여시조인 동명인지 모르는 게 사실이다. 졸본도 엄연하게 자신을 부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BC 3세기 고리국에서 탈출하여 지금에 장춘, 농안일대에서 부여를 건국한 동명성왕과 후일 BC 1세기경에 부여를 탈출하여서 지금에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성왕고구려 사가는 추모성왕을 더욱 성스럽게 묘사하기 위해서 동명성왕의 이름 빼앗고 부여의 건국설화를 지우고 고구려의 건국설화의 양념으로 사용했다. (추모성왕 조작설이나 추모성왕 암살설은 유리명왕때 짚고 넘어 가겠다.) 

그런데 졸본 사람들도 문화가 다름에도 자신의 나라를 부여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BC 3세기부터 부여(북부여)의 이주민들이 내려와서 강렬한 선진문물의 영향을 받아서 인 것 같다. 그중 예가 우태인데 만약에 삼국사기의 기록이 (해부루의 서손) 사실이면 그도 부여에서 내려온 이주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백제가 섬긴 동명성왕이 과연 고구려 시조인 추모인지는 심사숙고 해야된다. 사실 부여시조가 더 높은 가능성이 있다. 즉 부여- 고구려- 백제가 아닌 부여 - 백제의 직통계승일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일단 서론은 여기까지 설명하고 저번에 추모의 남하가 너무 쉽게 일어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결론을 냈는데... 
고구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탈이 3번 있었다.

첫째는 유리명왕 즉위 초에 소서노 세력 이탈이었고
둘째는 산상왕 즉위 당시 발기의 소노부세력 이탈 이었고
셋째는 고구려 멸망의 최고 원인이 되는 보장태왕 당시 연남생 세력의 이탈이다. (김용만 소장님의 연개소문 인용) 

둘째 셋째는 고구려에 치명적인 위기가 되는데 첫째 포함해서 모두가 권력 쟁탈에 패한 세력이라는 점이다. 다만 첫째는 외세를 끌어들여서 고구려 탈환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 번 모두가 고구려가 기틀이 흔들리는 시기 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부여의 금와왕시기도 대혼란 시기가 아닐까?
 
하지만 이집트에서 히브리족들이 출애굽을 할때의 시기 추측을 기원전 15세기, 투트모세 3세나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등으로 이집트에 전성기 시절인 편이었다. 그래서 주로 학자들은 히브리족들은 정말 사소한 이탈이었다고 주장하는 데 본 위원은 혹시 이크나톤과 관련된 세력이라서 기록하지 꺼려했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시나이반도나 팔레스타인은 이집트령이나 그의 산하 복속국들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이집트의 파라오가 출애굽을 막으려고 했다면 정말 간단했다. 복속국들인 팔레스타인지역 토착세력들에게 연락해서 잡아 오라면 끝이다. 성서에 기록된 출애굽은 선민사상에 취해있던 이스라엘족이 작당한 것으로 사실 실상과 정말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고 꼭 금와왕 시절을 혼란기라고 생각할 수만 없다는 것이다.
 
또 양길이 궁예를 명주로 보낸 것 같은 일이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 금와왕시절 부여가 어떤 상태였는지는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 우태는 왜 사인은 기록에 없고 하여간 일찍 죽고 아직 서른 살에 아직 저물지 않은 태양인 시절인 소서노는 홀로 남게 되었다. 연타발은 부여에서 탈출하여 기반이 없는 추모에게 과부 딸을 이어주고 자신의 세력을 묶으려고 하였다. 이후 추모와 연타발은 졸본통일을 위해서 졸본 최대세력 송양세력과 전쟁을 시작했다.

 
사실 소서노는 기록상 두차례 결혼과 재산이 많았다는 것과 죽은 날짜밖에 기록이 없다. 뭐 대단한 여자였다고 북 치고 장구 치고들 하는 데 그런 근거는 전혀 없다. 재산이 많았다는 것빼고는 얼굴이 예쁜지 추모의 고구려건국에 조력했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송양이 졸본최대세력이었다는 정황보다 더 미약한 기록을 남긴 것이 소서노이다. 그리고 아무리 고구려 초기라도 남존여비에 사회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 이다. 여성인권에 대학살시대인 조선후기시대처럼 여자들 남편따라 자살하게 하고 과부보고 결혼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를 100% 남자와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했다는 엄청난 무리가 있다.

 
인기가 있었던 황이 본 위원도 보고 울적해서 술까지 사먹고 찌질 거렸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황진이처럼 기생이 양반들에게 호통치고 모욕하면 모가지 잘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조선시대를 현대 여성주의로 바라본 드라마이지 이것으로 조선시대를 짐작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요즘 나오는 고구려 사극은 그 위협성이 더욱 크다. 고구려화 중화주의(수백년 뒤에 나관중이 쓴 삼국지가 줄줄 나오는 고구려인들, 태왕이라고 버젓이 있는 고구려 왕칭을 중국식 황제라고 무리해서 고집하는 것, 태산 쓸깨이야기 한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민족에게 심어둔 만주에 대한 환상이 잘못 결합된 고구려사극은 사실 고구려라는 나라의 실체를 보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들이 한 쌩쑈중에서 제일 대표적인 예인 만주사변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일제도 만주의 집작이 우리 못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만주에 대한 집착의 영향은 일제시대에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는 만주국을 건설하면서 조선청년들에게 신개척지(미국 서부같은)의 2등국민을 보장한다고 했다. 그에 현혹되어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만주에 가서 친일파가 되어서 만주계 친일관료나 친일군인들이 되는데 향후 5.16군사 쿠데타로 한국현대사에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과연 그들이 만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여간 송양은 추모에게 마술싸움은 패했지만 졸본내에 뿌리가 대단했다. 추모는 송양의 영역을 지역을 고조선 부흥거점이라는 다물이라고 이름지고 비류지역 왕으로 전격으로 임명한다. 적대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으로 추모는 졸본일대에서 지도자로 추앙 받게 된다. 

여기서 추모의 고구려 건국이념을 설명하겠다. 

첫째는 고조선 부흥이다. 
현도군을 축출하고 자주성이 높았던 졸본세력은 당연히 강력한 고조선 부활을 염원했다. 추모는 부여출신이기 때문에 고조선과는 연관이 졸본보다는 없었지만 그들의 염원인 고조선 부활을 인정했다. (시대상 고조선과 부여 두 국가는 뿌리는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같은 시대에 공존했던 국가였다.) 송양의 지역을 다물도라고 불렀다는 것은 졸본출신들을 고조선부흥이념으로 뭉치게 하여 포스트 고조선 즉 고구려 건국에 모든 세력을 자발적으로 나오게 했다. 

둘째는 확장주의다.
초기 고구려는 매우 호전적인 군사국가였다. 고구려의 무자비한 약탈전으로 후한시기 요동과 요서일대에 한족들은 초토와에 직면했다. 무자비한 약탈로 한족들은 요동일대에서 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입장에서 요동에서 사는 한족들은 말도 안되는 존재들이다. 고조선의 구토는 모조리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한사군과 함께 침략해 들어와서 사는 한족들은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놈들이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건국초기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에서 농업생산 능력이 낮았고 강력하게 성장하는 국가에 원동력과 불어나는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침략과 약탈뿐이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고구려는 성립초기부터 부여, 한나라, 낙랑 세력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추모는 졸본에 도착하자마자 확장주의와 군사력강화에 열을 올렸고 고구려 영토를 계속 확장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추모성왕-유리명왕-대무신왕 3대 명군시대를 걸쳐서 급격한 성장을 하여서 부여와 낙랑국, 한사군을 능가하는 군사강국으로 성장한 것을 볼 때 확장주의는 고구려초기 국시였을 것이다. 

(적어도 추모성왕 때부터 태조대왕 때까지 고구려 사극을 제대로 만든다면 지상파로는 방영이 불가능하다. 이 기간동안 요동과 요서일대에 한족들은 말 그대로 고구려의 봉이었다. 후한은 고구려에 번번이 패하면서 요동, 요서일대에 세력을 급속하게 상실했는데 그 곳에 사는 한족들은 당연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것이 고구려군은 요동을 지배할 군사력이 됨에도 일부러 점령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유주에 한족부대를 섬멸한 후 여세를 몰아서 한족 마을을 수탈하고 후한의 중앙군이 출동전에 재빨리 퇴각했다. 수탈품은 고구려에서 노예로 평생 일하면서 봉사(?)하게 될 젊은 남자와 여자, 갑옷 같은 군수물자, 식량등이다. 폐허 속에 한족들이 열심 재기해서 농사하고 있다가 추수절이 되면 어김없이 동쪽에서 고구려군이 나타나서 싹 거두어들인다. 뭐 한족들이 어떻게 반항하면 그 뒤에 참극은 말하지 않겠다. 모 잠깐 동안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악순환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사실상 요동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한족들의 비명소리를 듣다 못한 요동태수는 결단을 내린다. 태수 왈 고구려왕이시어 제발 그냥 갖다 바치겠으니 제발 쳐들어오지 마세요. 결국 태수는 주기적으로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산다. 한족들은 그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하례품이나 상거래라고 하는 데 말도 안 되는 소리고 하여간 이러한 상황은 고구려가 농업지대인 요동과 부여, 평양, 황해도일대를 차지한 이후에야 바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많이 줄어든다.) 

셋째는 포용주의였다. 
사람들 죽여 놓고 포용주의라는 말은 안 되지만 추모성왕당시에는 말이 통하는 상대는 가급적이면 안아주려고 했다. 송양 같은 졸본의 유력자를 죽이지 않은 것은 송양이 강했다는 반증이기도 했지만 추모도 적대세력을 모두 죽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대세력의 거점인 송양의 지배지역을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부흥의 거점으로 지명한 것을 보면 얼마나 통이 큰사람인가 알 수 있다. 

하지만 셋째가 추모의 최후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포용정책으로 이때 고구려는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공존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멸망기까지 간다. 사실 이런 것은 고구려의 분열요인도 되었지만 강점도 된다. 일단 무한 경쟁사회니까? 고구려는 왕권도 강했지만 귀족 파벌들의 세력도 강했다. 모두가 강한 사회였다. 그래서 태왕은 귀족들이 무서워서 정신 차리고 산다. 또 귀족들도 태왕이 무서워서 정신 차리고 산다. 고구려는 조선같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국가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일단 건국 초에 현재 추정되는 세력으로는

추모성왕의 부부여계 오이, 마려, 협보, 부분노같은 창업공신들,
왕후 소서노에 연타발세력
구졸본의 중심 인물인 송양세력
유리왕의 왕비가문 중에 골천세력,

출신지를 따지면

창업동지들은 북부여 세력이고
송양과 연타발은 졸본 세력일 것이다.
골천세력은 의문이 가는 데 졸본에 있던 세력은 아니다.
일단 제 3세력이라고 해두자. 이들은 추모성왕의 리더십 아래서 조용히 있다고 것일 뿐이지 언제라도 졸본에 건국된 고구려의 주도권을 두고 전면 충돌의 위험성은 언제나 가지고 있다.

추모성왕의 나이 40대에 그 위험성은 대폭발하고 만다. 기원전 19년 추모성왕의 자칭 아들이라는 유리명왕이 추모성왕의 했던 것처럼 북부여에서 세력을 이끌고 졸본에 나타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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